박문하 전 포항시의회 의장
박문하 전 포항시의회 의장

몇 해 전 경북도의회 의원으로 재직할 때 자치시대의 화두인 지방분권 관련 심포지엄에 참석하고 촘촘한 일정에 틈을 내어 한국과 일본의 도자기 문화를 꽃피운 우리 조상의 눈물과 가슴시린 사연을 간직한 심수관(심당길) 도예전시관을 방문한 바 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200여년 동안 전쟁이 없었던 시기가 종식되고 선조 16년(1592년)에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전쟁에 대한 대비가 전혀 없었던 조선은 단 18일 만에 수도 한양이 점령된다.

비겁한 임금과 무능한 조정으로 인해 전 국토가 유린되고 수많은 백성들이 도륙당한 7년 전쟁의 대가는 일찍이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참혹했다.

우리에겐 이처럼 굴욕의 전쟁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은 우리와는 매우 상반된 전란으로 기록하고 있으니 그 이면에는 임진왜란을 일본이 도자기 강국으로 도약하는 첫 출발점으로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목기와 도기만 존재했던 일본은 전쟁을 통해 한 차원 높은 자기를 만들 수 있는 수많은 조선의 수준 높은 도공을 납치하여 강제로 이송했다.

서두에 언급한 전북 남원의 심당길이 왜군에게 붙잡혀 가고시마(사쓰마번)로 끌려갔고 자기장 이작광과 이경 형제는 야마구치(조슈번)로 지금도 일본에서 도조로 추앙받는 이삼평과 아가노자기의 초석을 세운 경남 사천 출신의 김존해는 사가현(사가번)으로 붙잡혀 갔다. 요즘 말로 하면 전쟁을 통해 한국의 최첨단 기술이 일본으로 유출된 셈이다.

그러나 조선에서 천민 취급을 받던 이들은 현장에서 실용적 기술로 실리를 창출하는 전문가를 ‘쇼쿠닌(장인)’으로 인정해주고 대우하며 합당한 보상과 명예를 부여하는 일본의 풍토에 빠르게 적응해 나갔다. 이들이 끌려간 지 1세기도 안 되어 도기밖에 생산하지 못한 일본은 단숨에 자기 선진국으로 발돋움하였고 조선도공이 정착한 사가, 야마쿠치, 가고시마 3개현은 일본자기 생산의 3대 메카로 자리 잡았다.

조선이 성리학을 내세워 담백하고 소탈한 백자만을 고집할 때 이들은 일본에서 빨갛고 노란, 푸른 문양과 풍경을 넣은 자기를 경쟁적으로 만들었고, 개방을 통한 세계화로 유럽으로 진출하였으며 일본 도자기를 접한 유럽의 왕실은 그 아름다운 예술성에 열광하였다.

지금도 일본의 컬러(색상)자기의 창시자로 인정하는 이삼평의 후손들은 자신들이 만든 도자기를 들고 1867년 세계 만국 박람회에 출품하고자 나가사키항을 떠나 프랑스 파리로 향했다.

유럽의 왕실과 귀족들의 극찬을 받으며 가지고 간 제품을 완판 하였고, 독일의 선진요업기술까지 받아들여 순식간에 세계 자기산업을 선도하기에 이른다.

도자기를 판돈으로 유럽의 군함을 사 왔고 군사대국으로 가는 첫 발판을 한국의 도공들이 놓았다면 이 또한 기구한 역사의 우연이 아닐까 싶다.

임진왜란을 통해 조선의 도공들이 활약한 일본에서는 찬란한 도자기 문화를 꽃피웠지만 정작 원천기술국인 조선의 도자기는 시름시름 쇠퇴의 길을 걸었다. 당시 도자기 선진국이었던 조선은 새롭고 아름다운 도자기를 만들어가는 시대적 흐름과 동떨어진 정책으로 도자기의 갈라파고스로 남고만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이념이 앞서고 혁신이 거부되는 폐쇄적 체제하에서는 우수한 기술이나 인재가 도태되고 사장되는 것이라는 것을 일본과 한국의 도자기 현실은 확실하게 증명해 주고 있다. 휴대폰의 표준 노키아, 필름의 대명사 코닥 같은 굴지의 기업조차 변화와 혁신을 거부하고 그 이름이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다.

한 번의 실패는 있을 수 있지만 그 교훈을 잊고 계속 실패를 반복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이다. 아름다운 일본 도자기에는 조선의 도공들의 눈물이 담겨 있지만 임진왜란 이후 한 세기만에 어떻게 일본이 세계 도자기 최대 강국으로 발돋움했고 조선은 왜 몰락했는지 그 과정이야말로 우리가 나아갈 방향이 어디인지 시사하는 바가 결코 적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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