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들은 지고 옥상이 떠오른다
저녁은 가만히 내려앉아

너를 잠재울 수도 너를 깨울 수도 있는
사물이 울 수도 사물이 웃을 수도 있는
질서를 꾸미고

나는 가만히
바닥을 뒤집어쓴 너를
집게가 물고 있는 빨랫줄의 성질을
익히고 있다

다 증발한다는 사실에 주목할 때

소리치고 싶은 너는 너대로
울음을 물고 있는 집게는 집게대로
먼 세계를 끌어들여 희석시키고 있다


<감상> 저녁이 가장 먼저 찾아오는 곳이 옥상이다. 그것도 가진 것이 없는 이들에게 옥상은 이들의 차지이므로 개인용 옥상이라는 말이 가능하다. 옥상은 삶의 회노애락을, 삶의 밑바닥을, 심지어 사물의 성질까지 익히고 나름의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공간인가. 가난하고 외롭고 낮은 이들에게는 이 옥상은 공평한 공간이다. 뭐든지 증발시킬 수 있고, 어둠을 끌어들여 한 빛깔로 희석시킬 수 있으니까. 옥상은 늘 외로움을 같이 해 주고, 허공에 내지르는 소리를 걸러주고, 울음을 삼키는 그런 공간이다. 때로는 등짝이 넓은 아버지 같고, 때로는 멀리서 들려오는 어머니 목소리 같고, 내 울음을 멀리 보내는 범종 같기도 하다. <시인 손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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