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요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눈에 띕니다. ‘죽음 교육’, ‘웰 다잉(well-dying)’ 같은 말들이 자주 들립니다. 전에는 그런 이야기에 도통 관심이 없었습니다. 한쪽 귀로 들으면 즉각 다른 한쪽 귀로 흘려보내곤 했습니다. 그런데 나이 든 요즘은 좀 다릅니다. 그런 이야기들이 한동안 제 안에 머물다 나가곤 합니다. 공부의 관심도 결국은 생로병사의 틀을 벗어나기가 어려운 모양입니다. 괴력난신(怪力亂神·판타지와 귀신 이야기)을 멀리 하라신 공자님도 죽음 교육에 관해서는 한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논어』 「선진」편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계로(季路·자로)가 귀신 섬김을 묻자, 공자께서 “사람을 잘 섬기지 못한다면 어떻게 귀신을 섬기겠는가?” 하셨다. (계로가) “감히 죽음을 묻겠습니다.” 하자, 공자께서 “삶을 모른다면 어떻게 죽음을 알겠는가?” 하셨다. (季路問事鬼神 子曰 未能事人 焉能事鬼 敢問死 曰 未知生 焉知死) 귀신 섬김을 물음은 제사를 받드는 바의 뜻을 물은 것이요, 죽음은 사람에게 반드시 있는 것이니,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모두 절실한 질문이다. 그러나 정성과 공경심이 사람을 섬길 수 있는 자가 아니면 반드시 귀신을 섬기지 못할 것이요, 시초를 근원해 보아 생(生)을 알지 못하면 반드시 종(終)으로 돌아가 죽음을 알지 못할 것이다. <중략> 그러므로 부자(夫子, 선생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해 주신 것이다. [성백효 역주, 『논어집주』, 「선진」 第十一]

자로가 죽음에 대해 물었을 때 공자가 “아직 삶도 모르면서 어떻게 죽음을 알겠는가”라고 대답한 것을 두고 한때 “그건 궤변이거나, 아니면 일종의 회피 전략이 아닌가?”라고 여긴 적이 있었습니다. 일종의 감정의 오류(affective fallacy)가 아닌가, 싫은 것이니 아예 생각하지 말자는 게 아닌가,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삶이 시작된 바를 잘 알아야 그 끝인 죽음도 알 수 있다”고 공자님은 가르쳤던 것입니다. 젊어서 시험용으로 독일어 공부를 할 때 본 내용이 생각납니다. 해석 문제 중에 “사람들은 자신의 생(生)이 어디서 온 것은 생각하지 않고 죽음 뒤에 어디로 갈 것인가만을 염려한다”라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공자가 자로에게 한 말과 비슷한 내용이었습니다.

열심히 일하며 살고, 편안히 늙고, 죽음에서 안식을 찾는다는 것은 오랜 인간의 소망입니다. 사후(死後)가 어떤 모습인지 하는 문제는 본래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미지생 언지사(未知生 焉知死)’라는 공자의 가르침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사람을 잘 섬기지 못한다면 어떻게 귀신을 섬기겠는가?”라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말씀 속에는 “귀신은 없다”라는 내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직 사는데 충실하라는 말씀입니다. 자기 앞에 놓인 삶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게 인간의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귀신은 그저 인간이 죽음의 공포를 무마시키기 위해 만든 한갓 대리공포물일 뿐임을 지적합니다.

만약에 죽음의 공포가 말끔하게 사라진다면 인간사회가 어떻게 변할까요? 일단 분쟁이 일어났을 때 극단적인 해결책을 구하는 경향이 늘 것 같습니다. 우리가 경멸해 마지않는 비겁과 비굴은 확연히 줄 겁니다. 그 부작용도 만만치 않을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유지해온 공동체의 기율에 일대 변화가 요구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죽음의 공포도 필요 이상으로 소거(消去)되면 안 좋을 것 같습니다. 사이코패스와 같은 사회 부적응자들 때문이 아닙니다. 잘나고 힘 있는 인간들에게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들의 욕심에 제동을 걸 중요한 제동 장치 중 하나가 그것이니까요.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