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선비·학자문화 정수 담긴 '500년 집성촌'

근래 한강대 정상에 건립된 한강정

조선시대 양반들은 자신들의 신분과 지위에 걸맞게 행세하기 위해서 세 가지를 중요하게 여겼다. 하나는 조상의 글을 모은 문집이고 다른 하나는 번듯한 종택이 있어야 하며, 천하의 길지를 잡아 조상을 모실 수 있어야 했다. 특히 영남지방은 양반문화가 크게 꽃핀 곳이라는 데에서 선조의 글을 모아 발간한 문집이 다른 지역에 비해 많았고 종가 또한 월등하게 많이 남아 있다.

종가는 같은 조상을 모시는 사당이 있기에 온 문중 사람들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었고, 너른 대청은 가문의 의사를 결정하는 회의의 공간인 동시에 화합과 결속을 다지는 친목의 장이었다. 그리고 자손이라면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열린 마당으로서 말 그대로 ‘큰 집’을 말한다.

그래서 종가가 위치하고 있는 곳은 그 가문의 집성촌이 형성되는 경우가 많았다. 성주 수륜면 수성리 갖말마을도 조선 중기 대유학자인 한강 정구(1543~1620)의 후손들이 종가를 중심으로 모여 살고 있는 청주정씨 집성촌이다.

정구는 조선 중기 낙동강 중류지역의 유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는 낙동강 상류 지역의 퇴계 이황과 낙동강 하류 지역의 남명 조식 양 문하에 나아가 그들의 성리학과 사림정신을 계승하는 한편, 영남 남인계 예학을 집대성하고 목민관을 거친 곳마다 지방지를 편찬하는 등 경세학 방면에도 많은 저술을 남겼다. 또한 그의 학문적 성과는 근기지역 퇴계학맥으로 이어져 경세치용의 실학으로 꽃피우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1784년경 영재 김상진이 그린 무흘구곡도의 제2곡 한강대

△ 생리(生利)와 산수(山水)가 조화로운 마을.

갖말마을은 창평상을 주산으로 하고 거문봉을 안산으로 하여 자리잡고 있으며, 마을 서쪽으로 대가천이 북서에서 남동쪽으로 휘감아 흐른다.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입지를 갖추고 있는 마을이다. 마을의 이름인 ‘갖말’은 나무를 기르는 산자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인데, 한자로는 지촌(枝村)이라 한다.

오른쪽으로 멀리 가야산이 바라보이는 전망, 평탄하고 양지바른 지세, 산과 물이 조화를 이루어 빚어낸 주변의 아름다운 장관은 한 가문의 백세터전으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즉 조선시대 양반들이 가장 선호한 터는 경제적 조건인 생리와 문화적 조건인 산수가 잘 조화를 이루고 있는 마을인 것이다.

갖말마을 주변에는 조선시대 ‘선비문화’, ‘학자문화’의 정수를 보여 주는 문화경관들이 즐비하다. 이것은 자연과 인간의 절묘한 조화가 빚어낸 삶과 학술의 공간이었고, 문자의 향기가 피어오르는 문화의 향로와도 같은 곳이었다. 세상에 기이한 경관이 드물지 않고 빼어난 경치 또한 적지 않았지만, 갖말마을을 중심으로 펼쳐진 주변은 대유학자의 후손들이 모여 살기에 손색없는 경관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를 대표하는 공간으로서 회연서원과 무흘구곡 제2곡 한강대가 갖말마을에 인접하여 있다.

회연서원은 정구가 한때 학문을 닦고 강학하던 회연초당이 있었던 장소에 건립된 서원이다. 1622년 지방 유림의 의견을 모아 서원으로 건립하기 시작하여 1627년 준공되었으며, 1690년 사액되었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 대부분의 건물은 철거되었으나 유일하게 강당만은 보존되었다. 이후 1974년 정부의 보조와 지방유림의 협력으로 복설하였고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현재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갖말마을의 뒷산인 창평산의 정상에는 한강 정구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 무흘구곡 제2곡 한강대가 자리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유학은 흔히 주자학의 갈래를 따르고 있다. 따라서 조선의 선비들 누구나가 존경해 마지않는 인물이 주자학을 창시한 주희였다. 주희는 일반적으로 주자라는 경칭으로 불린다. 동방의 주자로 불린 퇴계 이황은 이런 측면에서 지식인 사회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칭호를 받은 사람이라 하겠다.

주자에 대한 이러한 존경심은 여느 선비나 마찬가지겠지만 한강 정구는 특히 더하여서 주자와 관련된 여러 서적을 집필하기도 하였고, 주자가 무이산에 은거하며 무이구곡을 경영하고 「무이도가」를 지은 것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졌다.

무흘구곡은 정구가 평소 유상하던 대가천 일대의 명승지 9개소를 선정하여 이름 붙인 곳으로, 주자의 삶을 매우 높게 평가하고 이를 따르려 했던 정구의 뜻이 담겨 있는 구곡원림이다. 다만 그의 생존 시에는 주자에 대한 존경의 마음으로 직접 경영하지 않았으며, 후대에 그 후학들이 일종의 추모사업으로 그의 자취가 서린 경관을 중심으로 구곡을 설정하였다.

무흘구곡제2곡 정상바위의 한강대 각자

한강대가 위치한 뒷산 정상의 바위에는 ‘한강대(寒岡臺)’라는 큰 글자가 새겨져 있어 그 자취를 남기고 있다. 갖말 쪽에서 진입이 가능하지만 전체 경관은 보기 어렵다. 오히려 회연서원 옆에 대가천을 건너서 바라보면, 전체를 조망하는 것이 가능하다.

갖말마을은 정구가 고개 넘어 성주군 대가면 유촌마을에서 태어난 후 창평산에 어른의 묘를 쓰게 되면서 이곳 갖말로 옯긴 이래 그 후손들이 집성촌을 형성하면서 500년을 살아온 전통을 지니고 있다.
 

회연서원 전경(멀리 왼쪽 끝에 갖말마을이 보인다)

△ 22살에 정해진 운명 꿋꿋이 지켜오다.

마을의 우측 끝 부분에 갖말마을 청주정씨들의 중심인 종가가 있다. 종가는 언뜻 보기에 우리가 알고 있는 여러 종가들과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데 그 규모가 검박할 뿐만 아니라 가옥구조도 단순하게 되었다. 종가의 입구에 위치하여 위압감을 주는 솟을대문도 없거니와 종가 건축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口’자 형태도 아니다. 안채, 사랑채를 비롯하여 사당까지 건물 3동이 종가 건물의 전부이다.

종가에는 여러 해 전에 세상을 떠난 종손 정염씨를 대신해 종부인 김기 여사 혼자 종가를 지키고 있다. 지금 종손인 맏아들은 외국에 살고 있어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올해 여든을 넘긴 종부는 안동의 의성김씨 집성촌으로 유명한 내앞마을 사람이다. 8남매 가운데 넷째로 태어난 종부는 안동에서 고등학교를 나와 세무서에 근무했다고 한다. 그 시절 여느 반가의 여성들처럼 나이 22살 되던 해에 집안 어른들의 결정에 따라 갖말마을 한강종가에 시집을 왔다.

1962년에 결혼했으니 종부가 갖말마을에 온 지도 어느새 60여 년에 되었다. 반 백 년이 넘는 세월을 보내는 동안 수많은 일들을 겪었지만 2남 2녀의 슬하 4남매가 반듯하게 성장해서 잘 살아가고 있는 것은 그녀의 삶에 큰 위안이 되고 있다.
 

종부가 홀로 지키고 있는 종택

△ 마지막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40대 초반에 시부모가 다 돌아가시면서 종부가 된 이래 김기 여사는 ‘봉제사 접빈객’이라는 종부로서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다.

특히 봉제사는 종가의 정체성을 지켜내는 원천이 되고 있다. 종가의 제사에서 가중 중시되는 것은 흔히 ‘큰제사’로 불리는 불천위 제사이다. 아무래도 불천위 제사는 가문의 격을 말해주는 분명하게 나타내는 기준으로서 역할을 하였기에 다른 제사에 비해 더 중시되었을 터이다.

중부는 늘 불천위제례 시기가 다가오면 손수 장을 봐서 제수를 준비해왔다. 정구의 불천위 제일이 정월 초닷새라 설제사와 겹치기 때문에 섣달이 되면 종부는 마음이 분주해진다. 따라서 종부는 섣달 중하순이 되면 성주를 비롯하여 인근의 대구나 고령으로 가서 제수를 조금씩 챙긴다. 그나마 예전에는 마을에 사는 대소가 사람들을 비롯한 지손들이 장보는 일을 거들었지만 지금은 오롯이 종부의 몫이 되고 말았다.

지금은 그렇게 찾는 사람이 많지 않지만 종가의 주요 일상에 있어 손님을 맞아 대접하는 접빈객은 항상 마음이 쓰이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역시 접빈객에는 종가의 음식을 빼놓을 수 없다. 접빈객을 위해 종부가 특별히 준비하는 음식은 ‘약감주’이다. 감주가 무슨 특별한 음식이냐고 하겠지만 이 약감주는 김기 여사만의 특별한 비방으로 만들어 찾아오는 손님들에 대접한다.

이제 인생의 황혼에 접어들어 살아온 세월을 정리하는 시기이지만 종부로서의 책임감을 느끼는 김기 여사는 지금보다는 미래의 종가에 대한 걱정이 앞서있다.

다행히 종가가 지난 2013년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제614호)로 지정되어 성주군의 지원을 받아 안채를 보수하였지만, 작은 규모의 사랑채를 고쳐서 제대로 된 모양을 갖추지 못했고, 또 사당도 보수해서 조상을 제대로 모실 수 있는 여건을 갖추었으면 하는 바램이 종부의 마음에 담겨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오랜 세월 종가가 잘 보존되기를 갈망하고 있다.

한편, 집성촌인 갖말마을은 주민 대부분이 청주정씨로서 현재 20가구에 30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마을 크기에 비해 주민의 수가 적은 이유는 아무래도 젊은 사람들이 외지로 많이 나가 있어서 어쩔 수 없는 현상으로 보인다. 여느 농촌 마을과 다른 특징은 없지만 동네 주민들은 무엇보다 한강 정구의 후손으로 높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통을 지켜나가고 있음을 남다른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그리고 마을 내에는 한강종가를 비롯한 중매댁, 숙야재 등 한옥들이 즐비해 오랜 전통을 지닌 마을로서의 풍모를 보이고 있다. 도움말=박재관 성주군학예사
 

권오항 기자
권오항 기자 koh@kyongbuk.com

고령, 성주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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