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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광장] 청산리 독립전쟁에 참여한 경북인들
[아침광장] 청산리 독립전쟁에 참여한 경북인들
  • 강윤정 안동대학교 사학과 교수
  • 승인 2020년 10월 22일 15시 59분
  • 지면게재일 2020년 10월 23일 금요일
  • 1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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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정 안동대학교 사학과 교수
강윤정 안동대학교 사학과 교수

1920년 시시각각 다가오는 전운(戰運)은 모두의 가슴을 조여왔다. 1920년 10월 일제의 약 2만명의 병력이 간도로 향하고 있었다. 목적은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화’였다. 누군가에게 이미 비극은 시작되었고, 누군가에게는 공포의 시간이었다. 그 사이에서도 일상은 흘러갔고, 누군가는 독립을 위해 한발 더 나아가야 했다. 이미 1920년 6월 봉오동에서 한 차례의 큰 전투가 있었다. 최진동·홍범도·안무·이흥수가 이끄는 독립군 연합부대가 일제의 월강(越江) 추격대와 맞서 싸운 전투였다.

그러나 이 무렵 독립군단의 고민은 컸다. 일본군과 전면 전쟁을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독립운동 근거지 파괴는 물론, 간도지역 한인들이 입을 피해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독립군은 피전책(避戰策)을 선택했다. 그에 따라 수색을 피하기에 용이한 백두산록 서쪽으로 이동하였다. 1920년 5~9월 사이 독립군단은 화룡현 2도구와 3도구에 집결하였다. 경북인이 많았던 서로군정서도 다시 이곳으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10월 대규모 일본군이 출병한 상황에서 전쟁은 피하기 어려웠다. 독립군의 동태를 파악한 일본군은 출병군의 일부를 보내, ‘독립군 토벌’에 나섰다. 일본군이 동서남북 사방에서 포위하듯 좁혀왔다. 독립군은 다른 돌파구를 찾던지, 아니면 연합단을 형성하여 싸워야 하는 상황이었다. 더이상 물러설 수 없었다. 결국 전투가 시작되었다. 10월 21~26일까지 10여 차례 전투가 계속되었다. 결과는 독립군의 승리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측의 자료에 따르면 일본군측 전사자 1,200여 명, 부상자 2,100여 명이었고, 독립군 측 전사자는 130여 명, 부상자는 220여 명이었다.

이 전투에 참여한 경북인 가운데 그 이름이 확인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울진의 최해, 안동의 강인수·김성로·김중한·김태규 정도이다. 강인수를 제외한 네 사람은 모두 신흥무관학교 출신이다. 이들 가운데 최해(崔海, 1895~1948)는 북로군정서 여단장으로 전투에 참여한 인물이다. 그는 울진군 원남면 덕신리 출신이다. 덕신리는 해안가에 위치한 마을로 그의 집안은 대대로 어업과 농업을 겸하였다. 생활이 넉넉할 리 없었다. 그는 일제강점 직후인 1910년 9월 울진 평해에 사는 김아지(金阿只, 1892~1968)와 혼인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곧바로 만주로 이주하였다.

남편 최해가 만주 이주를 결정하자 김아지는 완강하게 거부하였다. 아들의 증언에 따르면 ”어머니(김아지)는 고향을 떠나던 날, 마을 고목나무 밑에서 못 가겠다며 몇 번이나 발버둥을 쳐보았지만 허사였고, 남부여대하여 죽변항에 이르러 조그만 배에 올랐다.”고 하였다. 만주 이주 후 최해는 신흥무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그의 아내 김아지는 학교에 다니는 남편을 대신해 농사를 지어야 했다.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최해는 1919년 북로군정서의 교관 및 여단장으로 활동하였다. 이어 1920년 청산리전투에 참여하였다.

이들처럼 이름이 알려진 이도 있지만, 드러나지 않은 수많은 독립군이 있었다. 또한 그 뒤에서 일상을 지키며 후방지기 역할을 해낸 사람들도 적지 않다. 물론 1911년부터 만주로 망명하여 숱한 어려움을 극복하며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지도자들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청산리에서의 승리는 독립을 향한 이들 모두의 열망과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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