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가 공원 벤치에 앉아 여자에게 자신의 헤드셋을 씌워준다. 두 사람의 눈길이 부딪히자 남자의 몸속에서 푸르게 일렁이던 물결이 여자의 귓속으로 흘러 들어가고 여자의 반짝이던 눈빛이 남자의 검은 눈동자 속에서 나비가 된다

그러자 어둡고 딱딱한 그들의 가슴을 뚫고 올라오는 눈부신 꽃대 하나
그 끝 폭죽처럼 환한 수련 한 송이
허공을 가득 채운다

저런 순간이 있었던가
물과 빛을 나누던 순간이

나는 습지에서 자라는 양치(羊齒)
햇빛을 곁눈질하며 그늘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별꽃 한 송이 피워보지도 못한 채
이제 늑골 밑 안개집에서
꽃씨 같은 검은 포자(胞子)를 쏟아낸다

그늘의 발끝까지 햇귀가 퍼지는 오후였다


<감상> 한 때 연못의 수련 같이 눈부신 꽃대를 피운 적이 있었지. 남자는 연못처럼 그녀의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이었지. 그녀는 귓바퀴가 젖고, 눈빛은 나비가 되어 날아다녔지. 나비의 눈동자가 너무 커서 나는 접근조차 할 수 없었지. 그녀가 혹시 찾아 올까봐 환한 수련을 연못 가득 채워두었지. 물과 빛을 나누던 순간은 지나가고, 내 몸은 점점 말라 양치식물이 되었지. 꽃을 피우지 못하고 포자로 번식하는 양치식물처럼 그늘 속에 갇히고 말았지. 그늘 속이라도 햇귀가 찾아와 주었으면 하는 마음은 간절하지. 그대 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처럼. <시인 손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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