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힌 하수도 뚫은 노임 4만원을 들고
영진설비 다녀오라는 아내의 심부름으로
두 번이나 길을 나섰다
자전거를 타고 삼거리를 지나는데 굵은 비가 내려
럭키슈퍼 앞에 섰다가 후두둑 비를 피하다가
그대로 앉아 병맥주를 마셨다
멀리 쑥국 쑥국 쑥국새처럼 비는 그치지 않고
나는 벌컥벌컥 술을 마셨다
다시 한번 자전거를 타고 영진설비에 가다가
화원 앞을 지나다가 문 밖 동그마니 홀로 섰는
자스민 한 그루를 샀다
내 마음에 심은 향기 나는 나무 한 그루
마침내 영진설비 아저씨 찾아오고
거친 몇 마디가 아내 앞에 쏟아지고
아내는 돌아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냥 나는 웃었고 아내의 손을 잡고 섰는
아이의 고운 눈썹을 보았다
어느 한쪽, / 아직 뚫지 못한 그 무엇이 있기에
오늘도 숲속 깊은 곳에서 쑥국새는 울고 비는 내리고
홀로 향기 잃은 나무 한 그루 문 밖에 섰나
아내는 설거지를 하고 아이는 숙제를 하고
내겐 아직 멀고 먼 /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


<감상> 어설프고 시대착오적인 시인이자 가장(家長)은 영진설비에 돈 갖다주는 것도 실패하고 만다. 한 번은 현실 생활에 한심하고 무용(無用)한 자신을 한탄하며 술을 마신다. 한 번은 버려진 것들의 아름다움을 버릴 수 없어 자스민 한 그루를 사다가 아내의 심부름을 망각한다. “아직도 뚫지 못한 그 무엇”은 바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고뇌와 갈등이 아닌가. 현실 속에서는 별다른 능력이 없는 남편이지만, 나름대로 이상은 품고 있을 것이다. 시(詩) 자체가 현실 속에서 쓸모없는 것이지만, 쓸모있는 아름다움을 품고 있듯이. <시인 손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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