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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오디세이] 17. 경주남산 창림사지
[삼국유사 오디세이] 17. 경주남산 창림사지
  • 김동완 역사기행 작가
  • 승인 2020년 10월 28일 18시 21분
  • 지면게재일 2020년 10월 29일 목요일
  • 15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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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간 세월은 말이 없고…검붉은 석양 아래 탑만 홀로 우뚝
창림사지 삼층 석탑 너머로 보이는 일몰.

경주 남산 장창곡 산기슭에 우뚝 서 있는 창림사지 삼층석탑을 향해 가는 길이다. 삼층석탑은 황금들판을 앞에 두고 푸른 산기슭에 기대어 홀로 우뚝하다. 마치 고대 이집트 왕조의 기념비 오벨리스크를 보는 것 같다. 삼층석탑은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의 궁궐이 있던 자리를 지키는 기념비다. 그리스 델포이에 있는 ‘대지의 배꼽’ 옴파로스를 닮은 것도 같다. 그리스 신화는 제우스가 2마리의 독수리를 세상의 끝지점에서 날려 한가운데에서 만나게 한 뒤 그 자리에 옴파로스를 세웠다고 전한다. 신라의 첫 궁궐지인 창림사지는 초기 신라의 배꼽이었고 정치적 중심이었다.

포석로에서 창림사지로 가는 들머리가 장창곡이다. 이 길의 끝, 남산 중턱에 장창이 있다. 신라 남산성의 무기고와 식량고가 있던 곳이다. 장창곡은 신라 창업의 신화(神話)가 가득한 골짜기다. 박혁거세가 탄강했다는 나정과 신라 6부 촌장의 위패를 모신 양산재, 배씨 시조인 배지타를 제향하는 경덕사가 있다. 남간사지와 일성왕릉, 혜공의 설화가 남아있는 천은사가 있다. 박혁거세와 6부 촌장은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천강신화의 주인공이다.

장창곡 초입의 비석에는 신라 설화의 향기가 물씬 풍긴다.

길목마다 가을이 깊숙이 내려앉았다. 가을은 서리 내리는 상강을 지나 입동으로 가는 중이다. 서리가 내리는 시기에 군자 노릇 하는 꽃이 국화다. 서리맞고도 꼿꼿한 기상이 선비를 닮아 오상고절(傲霜孤節)이라고 부른다. 길목에 국화과의 벌개미취와 쑥부쟁이가 땅에 쏟아놓은 별사탕처럼 자글자글, 반짝반짝하다.

△13세 소년, 왕이 되다.

남간마을 앞에서 남간사지 당간지주를 지나 농로를 따라가면 창림사지로 가는 길과 포석정으로 가는 길이 갈린다. 창림사지는 신라가 문을 연 창업의 현장이고 포석정은 신라 패망의 상징이다.

농로를 버리고 왼쪽 산길로 접어들면 창림사지다. 창림사는 신라의 첫 궁궐지다. 『삼국유사』 ‘신라시조 박혁거세’조는 이렇게 기록했다. “남산의 서쪽 기슭(지금의 창림사다)에 궁궐을 짓고 두 신성한 아이를 받들어 길렀다. 사내아이는 알에서 태어났는데 알은 바가지처럼 생겼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바가지를 박이라 하니 성을 박(朴)이라 했고 여자아이는 그가 나온 우물로 이름을 지었다. 두 성인은 나이가 열세 살이 되자 오봉 원년 갑자(기원전 57)에 남자는 왕이 되고 여자는 왕후가 됐다. 국호를 서라벌 또는 서벌이라 하고 혹은 사라 또는 사로라고도 하였다.”

두 신성한 아이는 박혁거세와 알영이다. 박혁거세는 기원전 69년 나정 인근 숲에서 알을 깨고 나온 뒤 6부 촌장의 보살핌을 받아 알영부인과 함께 창림사지가 있는 궁궐에서 자랐다. 13세가 되던 기원전 57년 오봉 원년 갑자에 왕이 됐다. 올해는 신라창업 2077년 되는 해이다. 경주시는 이때를 양력으로 환산해 경주시민의 날을 6월 8일로 정했다. 박혁거세는 기원전 32년 금성에 궁궐을 지을 때까지 39년 동안 창림사지가 있는 궁궐에서 살았다.

13살 소년왕 박혁거세는 정치를 잘했다. 왜구들을 물리쳤고 왕비 알영과 함께 6부를 돌아다니며 농사와 양잠을 장려하고 토지를 잘 활용하라고 독려해 백성들이 먹고사는 문제에 걱정이 없도록 했다. 재위 19년 차에는 변한을 복속시켰다. 나라의 규모가 커지자 금성을 쌓게 하고 재위 26년에 금성에 궁실을 짓고 첫 궁궐을 떠나 금성으로 갔다.
 

창림사지 삼층석탑. 7세기 신라석탑 양식으로 축조됐다.

△궁궐터에 세워진 창림사

창림사지가 언제 건축됐는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1824년 창림사지 탑이 무너졌다. 도굴꾼이 탑 안의 사리장엄구를 훔쳐내려다가 무너뜨렸다. 이때 무구정광다라니경과 ‘국왕 경응조무구정탑원기(國王慶膺造無垢淨塔願記)’가 발견됐다. ‘경응(慶膺)’은 문성왕의 생전 이름이며 무구정(無垢淨)은 통일신라시대에 탑을 세우는 근거가 된 불교 경전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의미한다. 4년 뒤에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 경주에 왔다가 동판에 새겨진 발원문을 그대로 베꼈다. 이 발원문에 신라 문성왕 17년인 855년에 절을 세웠다는 사실이 기록돼 있다.

창림사지 삼층석탑의 팔부신중과 문비.

그러나 금석문의 기록과는 달리 창림사지 석탑이 설명하는 고고학적 근거는 절의 건립 시기를 이보다 훨씬 이른 7세기 말로 보고 있다. 탑은 2중으로 된 기단을 조성한 후 탑신부 3개 층을 얹은 전형적인 신라 삼층석탑 양식이다. 아래층 기단은 돌 하나에 면석(面石)과 그것을 받치는 돌인 저석(底石)을 나누어 다듬는 한편 각 면석에는 일종의 기둥인 탱주 3개를 새겼다. 학계에서는 탱주 개수로 석탑의 조성 시기를 판단하는 근거로 활용한다. 통일신라 초기인 7세기 말로 보는 유력한 근거다. 하층 기단부는 10개 석재로 만들었는데 이는 8개 석재로 만든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국보 37호)이나 경주 장항리 서(西)오층석탑(국보 236호)보다 더 오래된 석탑양식이라는 것이다. 창림사지 석탑 팔부신중은 화려하지만 남면(南面) 1구, 서면(西面) 2구, 북면(北面) 1구만 남았고 나머지는 평면면석으로 복원했다. 보물 제1867호로 지정됐다.

창림사지 쌍귀부. 없어진 비신의 글은 신라의 명필 김생이 썼다.

창림사지삼층석탑 아래쪽 발굴현장, 흙바닥에 쌍귀부가 남아 있다. 사각대석은 귀퉁이를 모가 나지 않게 돌려 깎은 모죽임수법으로 만들었고 대석 위에 두 마리의 거북이가 큰 비석을 지고 고개를 들어 기어가는 모습을 조각했다. 거북의 크기는 한 마리의 너비가 86.3㎝, 길이 142.5㎝ 높이 38.5㎝이다. 두 마리 거북의 머리는 모두 떨어지고 없는데 한 마리의 머리는 경주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귀부 위에는 비신도 없다. 비신에는 신라시대의 명필 김생의 글씨가 새겨져 있어 당나라에까지 알려졌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원나라 학사 조자앙(趙子昻)의 창림사비 발문을 인용하면서 ‘이것은 당대 신라 중 김생이 쓴 그 나라의 창림사비다’라고 했다”고 전한다.
 

포석로에서 본 창림사지 삼층석탑. 발굴조사가 진행 중이다.

△장엄하고 처연한 창림사 일몰

창림사는 꽤 큰 절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8세기 신라시대에서부터 14세기 고려시대까지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2014년 발굴 결과 금당지와 회랑지, 쌍귀부의 비석을 덮은 전각지, 종각지, 축대, 담장 등의 유구들이 세 차례 이상 중복되면서 복잡한 양상으로 유적이 확인됐다고 한다. 통일신라~고려시대로 연대가 추정되는 보상화문(寶相華文)·비천문(飛天文)·귀신 눈 같은 귀목문(鬼目文) 등의 다양한 기와막새(와당·瓦當)와 1291년의 연호가 새겨진 명문 기왓장 등이 출토됐다.

창림사지는 일몰이 아름다운 곳이다. 석탑 너머로 보는 일몰은 장엄하고 숙연하다. 2000년 전 박혁거세도 아름다운 일몰에 취했을 것이다. 그때는 석탑 대신 궁궐의 건물지가 있었을 것이다. 해는 패망한 고대국가의 기념비 같은 석탑에 어두운 실루엣을 드리우고 장작불 타오르듯 하늘을 검붉게 물들이고 제 갈 길을 간다. 흔적이 없는 궁궐지와 복원이 한창인 폐사지에서 보는 해넘이가 더욱 처연하다.

“찰기장은 더부룩 많이 자랐고/메기장도 파랗게 싹이 돋았네/느릿느릿 걸어서 궁궐 터를 돌아보니/마음속이 답답하여 편하지 않네/나를 아는 사람들은 걱정 때문이라 하고/날 모르는 이들은 바라는 게 있어서라네/아득하게 멀리 있는 푸른 하늘아/누가 이곳을 이렇게 만들었단 말이냐”『시경』 ‘왕풍’.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글·사진= 김동완 역사기행 작가
글·사진= 김동완 역사기행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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