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김진혁 작

못 자리에는 아파트가 수초처럼 자라나 있었다. 자라난 콘크리트 건물을 겨울바람이 휭휭 휘감았다. 그 바람을 물살인 양 가르고 지나가는 나는 한 마리의 물고기 같았다. 내 기억이 스민 지난날이 비릿한 냄새를 풍겼다. 무엇을 낚으려 했기에 그 기억의 터에 수시로 낚싯대를 드리웠을까. 못 중심에서 못 둑이던 곳까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휴대전화기를 들여다보았다. 선배와의 약속 시각이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는 왜 나를 식당으로 불러내는 것일까? 그와 나는 각자의 삶에서 생겨나는 아픔을 슬쩍 기대곤 하던 사이였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와의 관계가 껄끄러워지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함께 앉아있었던 찻집에서의 일을 떠올려보았다. 그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고 가야겠어. 하며 벌떡 일어났었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그 무렵부터 달라졌던가? 미처 떠나보낼 준비를 하지 못한 나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그 당시 그의 동공에서는 설핏, 어떤 새로운 결의 같은 것이 서려있었다. 내가 그의 알 수 없는 행동을 헤아리는 사이, 그는 벌써 찻집 밖으로 총총 걸어 나가고 있었다. 제발 가지 마! 미처 발설하지 못한 말을 입에 물고 나는 어이없게도 입천장 아래와 위를 얼얼하도록 부딪치고 있었다. 씁쓸한 마음을 달래며 창가에 주저앉아 다급하게 내 곁에서 사라지는 그의 모습을 속수무책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단 한 번도 그를 만나지 못했다. 그가 떠나고 없는 날들이 쭉- 쭉 이어졌다.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지나가고 어느새 계절은 겨울로 성큼 건너뛰어 있었다. 나는 신호등 앞에 멈춰 섰다. 아파트 앞 횡단보도 주변에는 땅의 여러 곳이 갈라지고 벌어져있었다. 아마도 못이 메워지고 생겨난 지반의 특성 같았다. 이 동네와 나는 인연이 질겼다. 풍경이 몇 번이나 갈아엎어진 이곳에서 몸의 어혈을 풀며 나는 지금껏 대궁 마른 수초를 흔들고 있었다.

*

<연못>이라는 식당으로 올라가기 위해 나무계단을 밟다가 깜짝 놀랐다. 발목을 휘청하며 뒷걸음질 쳤다. 이 추운 겨울에, 더군다나 도시의 언덕배기에 웬 뱀이지? 뱀을 보자 나도 모르게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떠올랐다. 나는 아버지보다는 강단이 세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나무막대기 하나를 주워들었다. 그리고는 두 눈을 부릅뜨고 막대기로 뱀을 건드렸다. 작디작은 초록색 새끼 뱀이었다. 뱀은 이미 무거운 무언가에 깔려 몸통 중간 부분이 짓이겨져 있었다. 계절을 분간하지 못한 새끼 뱀이 안쓰러웠지만, 그와 동시에 내 철천지원수를 만났다는 생각에 목 뒷덜미가 뻣뻣해졌다. 이미 죽은 새끼 뱀인데도 불구하고 나는 뱀을 노려보았다. 그런데 어라…? 뱀을 자세히 살펴보니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장난감이었다. 뱀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는 나는 놀란 가슴을 허망하게 쓸어내렸다. 쓸데없이 쿵쾅거리는 심장에 손을 얹고 휴,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식당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플라스틱 뱀이 졸졸 따라오는 것 같아 몇 번이나 뒤돌아보았다. 뱀에 놀라 뒷걸음치다가 휘청한 발목이 걸음을 떼어놓을 때마다 쩌릿했다. 당분간은 조심해야 합니다. 라고 주의를 주던 의사의 말이 생각났다. 십 년 전에 발목을 삐끗한 후 별 치료 없이 회복된 발목이었는데, 지금에 와서 통증을 일으켰다. 엑스레이 검진결과 헐렁해진 인대에 발목뼈도 24도가량이나 벌어져 있어 <발목불안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이 경우는 수술만 하면 예후가 좋다고 했다. 망설이던 나는 두 달 전에 재활병원에서 벌어진 발목뼈에 나사를 박고 인대 재건수술을 받았다. 그래서 아직은 발목이 상당히 불안정한 상태였다.

식당 문을 밀었다. 앉아 있는 몇몇 사람을 쭉 둘러보았다. 아직 선배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접질려진 오른발을 절룩거리며 창가로 다가갔다. 창가에서 바라보면 이곳으로 올라오는 길목이 보였기 때문이다. 올라오는 길목 어디에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식당 창가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이 지역이 한때는 못이었다는 사실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둥그런 지형이 못 형태 그대로였다. 못의 원판 안에는 수초가 아닌 아파트로 빼곡했다. 배자못과 이어진 대불산은 이름만 산이지 낮은 언덕배기에 불과했다. 그 언덕배기에 들어선 식당을 마을에서 올려다보면 크고 덩그랬다. 바람이 미세먼지를 휘감으며 분지 안을 맴돌다가 가끔 언덕배기를 오르내렸다. 경사지고 꼬불꼬불하던 2차선 도로는 넓고 시원한 8차선으로 바뀌어 있었다. 마을 뒤편에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금호강물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마을은 강 때문에 더는 뻗어나갈 수 없는 구조였다. 몰리고 몰리다가 더는 도망칠 여력이 없어진 범죄자와 같았다. 도시의 외곽지로 한없이 낙후된 이곳을 사람들은 검단들이라 칭했다. 검단들은 밀려오는 도시개발에 까치발로 버티다가 결국 서리 맞은 잡풀처럼 무릎을 꺾었다. 저 멀리 버스 종점이 보였다. 89번, 51번 대신 이제는 636, 323, 937번 버스가 세워져 있을 것이다. 오래전 이곳에는 새벽이면 짙은 안개로 사위가 잘 분간되지 않았다. 에워싼 안개만큼이나 습한 이야기가 자욱하게 갇혀 있었다. 낚시터였던 못가에서는 토막시신이 발견되었다. 그 당시 시청률이 높았던 TV프로 <수사반장>을 통해 사건이 재연되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못은 공단 폐수로 오염되어 악취와 모기떼로 오글거렸다. 그다음에는 못이 메워지는 공사현장이 나타났고, 그 공사현장에서는 또 다른 슬픈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새로운 굴삭기 작업자가 공사현장에 투입되면서였다. 그는 흙으로 돋워놓은 땅의 지반을 미처 인식하지 못한 듯했다.

“작업하던 굴착기가 숨구멍으로 말려들었대.”

“겨우 기계를 빼 올렸지만, 사람의 목숨은 구해내지 못했나봐.

“결혼을 앞둔 총각이라는데 어쩌누.”

“경험이 적어서 실수를 했나보네.”

끔찍한 일이었지만, 그 사건마저 허망하게 메워졌다. 매워지고 메워진 땅은 물컹했다. 물컹한 땅을 밟고 다니던 사람들은 현기증을 일으켰다. 마을사람들은 그 땅을 고무 땅이라 불렀다. 우리는 고무 땅을 밟으며 술에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렸다. 땅을 딴딴하게 다지기 위해 그곳에서는 사람들의 발길을 불러들이는 각종 행사가 열렸다. 나도 부지런히 그 행사장을 돌아다녔다. 그러고 일 년쯤 더 흘렀을까? 이번에는 건설회사가 나타나 아파트를 짓기 시작했다. 그렇게 덮이고 덮이면서 생겨난 아파트에 입주한 나는, 유달리 눈망울이 댕그랬다. 크고 댕그란 눈망울을 갖게 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내 짐작일 뿐이지만, 아마 어머니 뱃속에서 태아胎兒로 웅크릴 때 형성되었을 거라고 믿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죽어가는 아버지를 온몸으로 느꼈을 게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언니 왔어?”

식당 문을 밀며 들어오던 유미가 창가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 아는 체했다.

“네가 어쩐 일이니?”

“어쩐 일은… 영호오빠 만나러왔지.”

영호 선배를? 황당하게도 나는 유미의 말뜻을 얼른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황해하는 나를 힐끗 쳐다보며 유미가 피식 웃었다. 네가 선배랑 만난다고? 자초지종이 궁금했지만, 왠지 물어보면 안 될 것 같았다.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뭘 그렇게 보고 있어?”

유미가 창가로 다가왔다. 나는 우측을 그녀에게 내어주고 좌측으로 비켜섰다. 내가 위치를 바꾸자 창밖에는 아까와는 달리 붕어 한 마리가 수면 위로 튀어 오른 듯, 배자 못 길 도로 명 표지판이 햇살을 받아 번들거렸다.

“많이 변했어. 장구벌레가 바글바글했는데.”

“여름에는 방마다 모기장을 쳤었잖아. 모기장에는 모기들이 새까맣게 달라붙었고, 악취는 또 얼마나 코를 찔렀냐.”

유미는 내 말에 자기도 이 동네에 관해서는 할 말이 많다는 듯 맞장구쳤다.

“언니! 저기 저 도롯가에 서 있었던 버드나무 기억하지? 우듬지에 까치집도 있었는데.”

“기억하지. 버드나무.”

“못가에 뿌리박아 옴짝달싹 못하고 살아가더니…. 풀어헤친 머리에 까치집을 핀처럼 꽂고는 까르르까르르 웃어젖히는 꼴이 나랑 비슷했는데.”

“무슨 말이 그러니?”

“아직도 이 동네를 벗어나지 못했는데 미치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 나도 매일 아침 머리에 머리핀을 꽂았어. 그래야만 버드나무인가보다 하고 숨을 쉴 수 있었거든.”

“결혼이나 해. 달라질 수 있어.”

“언니야! 내 머리통이 온통 헝클어진 실뭉치라니까.”

짜증 섞인 유미의 말에 놀라 힐끗 그녀를 쳐다봤다. 부담스러울 만큼 아름다운 용모였다. 우아하게 서 있는 유미는 온몸에 명품을 휘감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대부호의 외동딸쯤으로 여길 것 같았다. 그녀는 고급 음식이 아니면 속이 부글거린다며 입에도 안 댔다. 늘 까다롭고 도도했다. 외형만으로는 그 누구도 그녀의 슬픈 성장기를 짚어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유미는 이 마을 터줏대감인 할머니가 다섯 살 때 고아원에서 데려온 아이였다. 할머니의 집은 가정부와 운전기사를 두고 살만큼 살림 규모가 큰 집이었다. 말이 입양이지 집안의 소소한 심부름이나 시킬 요량으로 데려온 아이였다.

“언니! 저기 할머니 집 보이지? 독한 할망구… 차라리 고아원에서 데려오지나 말지. 이렇게 근본 모를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다니… 그 할망구도 이젠 치매더라.”

도도하고 아름다운 여자의 입에서 나올 법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유미는 치매 정도로는 속이 안 풀린다는 듯 원망 가득한 눈빛으로 할머니 집을 쏘아보았다.

*

칼날처럼 뿌연 안개가 목련의 목을 댕강댕강 잘라내던 봄이었다. 유미는 주방 창문 난간에 서서 못 안을 기웃거렸다. 그리고는 자욱한 안개 속으로 자신의 몸을 내던졌다. 냉장고에서 떡국과 만두를 꺼내 펄펄 끓는 냄비 안으로 던져 넣듯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지금 뭐하는 거얏!”

냅다 질러대는 외마디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아니라 찌르르 새소리였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년이 쥐약까지 처먹고 뛰어들었어.”

할머니 목소리에 이어 운전기사가 얼른 못 안으로 뛰어들었다. 물에 잠기던 유미의 긴 머리카락이 운전기사는 손아귀에 휘감겨 올라왔다. 할머니는 유미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유미는 삼킨 물을 내뿜으며 물총새처럼 찌르르 가늘게 울었다. 몽롱한 의식에도 안절부절못하는 가정부의 모습이 유미의 눈에 설핏 비쳤다.

“어떡해요. 어르신.”

“물을 토하면서 약도 토해냈으니 밥솥에 있는 밥이나 목구멍으로 퍼 넣어.”

“정신 차려라. 할머니가 보고 계신다.”

가정부는 유미를 안고 할머니가 시키는 대로 분주하게 몸을 움직였다.

“목구멍에 꾸역꾸역 밥이 되올라오도록 자꾸 퍼 넣으라고 하잖아.”

“어르신 병원이 낫지 않을까요?”

“못된 년 때문에 내가 욕을 먹을 수는 없다. 밥으로 씻어내.”

유미는 따뜻하게 챙겨주는 가정부를 엄마처럼 따랐다. 엄마 같은 아주머니가 급전이 필요하다는 말에 유미는 할머니의 지갑에서 돈을 훔쳤다. 돈의 출처가 빤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정부 아주머니는 그 돈을 받아 챙겼다. 급했으니 돈은 요긴하게 잘 쓰였을 것이지만, 유미는 그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만 했다. 손버릇 나쁜 아이로 찍혀 구박과 매질을 당했다. 가정부와 유미는 그 일의 자초지종에 대해서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근본 없는 도둑년!”

할머니의 집 식구들은 아침마다 떡국을 즐겨 먹었다. 유미는 그들이 남겨놓은 식어 빠진 떡국을 입안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으며 실어증을 앓았다. 한동안 그런 날들이 이어졌다. 유미는 문득 자기를 낳아준 친엄마가 궁금했다.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엄마를 그리워하며 점점 벙어리가 되어갔다. 할머니는 그런 유미를 파양罷養하기로 결정했다. ‘박’씨 성으로 창시創始를 했고, 5월 5일 어린이날을 생년월일로 기재시켜 집에서 내쫓았다. 쫓겨난 유미는 공장을 전전했다. 그러면서도 야간 중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 졸업장까지 손에 쥐었다. 유미는 자신의 앞날을 위해 죽을 만큼 노력했다. 부잣집 막내딸처럼 보란 듯이 살아가는 게 그녀의 희망이었다. 천하거나 값싼 것은 되도록 멀리했다. 끝없이 변신을 거듭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이 마을에서의 그녀는 여전히 헛바람 든 고아孤兒에 불과했다.

“늦어서 미안하다.”

선배의 목소리에 우리는 출입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빠! 왜 이리 늦었어?”

유미가 발끈하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그리고는 그가 앉으려는 식탁 앞으로 다가갔다.

“경비원하고 말이 좀 길어졌어.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러는지.”

선배는 늦어진 변명을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랜만에 만난 그가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미가 입술을 씰룩했다.

“언니! 나 영호오빠랑 다른 지역으로 떠날 거야.”

유미의 말이 선뜻 이해가 안됐지만, 가슴부터 철렁했다. 선배와 유미는 띠 동갑이었다. 나이 차이가 있는 만큼 서로에게 관심조차 두지 않던 사이였다. 그런 그들이 도대체 언제부터 만나왔기에 함께 떠난다는 말까지 나오는 걸까. 남녀 사이일까? 내가 저들을 만나지 못했던 9개월 동안에 생겨난 일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나는 듣기 곤욕스러운 유미의 말을 되도록 못 들은 체했다.

“이젠 안정적이고 싶어.”

이번에는 선배가 나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선배는 유미를 좋아하는 마음만은 감출 수 없다는 듯 연신 유미를 향해 눈웃음쳤다. 나는 선배의 모습을 바라보며 몹시 씁쓸해졌다.

선배는 명치에 손을 얹고 얼굴을 찡그렸다. 위가 아픈 모양이었다. 그는 늘 신경성 위염을 앓고 있었다. 유미는 아파하는 선배 옆에서 오빠 배고파를 연발하며 입고 있는 울 셔츠의 잔털처럼 하늘거렸다. 선배는 주방을 향해 음식을 재촉했다. 내가 알고 지내던 선배가 아니었다. 그들의 분위기에 어색해진 나는 자꾸만 창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창밖 언덕배기에는 온갖 마른풀들이 헝클어져 있었다. 그 헝클어진 마른풀 위로 낮게 뜬 비행기 한 대가 허공을 찢으며 지나갔다. 허공에는 금세 커다란 붕어가 비늘을 반짝이며 꿈틀거렸다.

“식으면 맛없어 얼른 먹어봐.”

쉰이 되도록 여자와 두어 번 동거한 경험만 지녔을 뿐, 정식 결혼을 하거나 자식을 얻지 못한 선배가 내 앞 접시에 자꾸만 음식을 얹었다.

그는 가방에서 책을 꺼내 내게 내밀었다.

“뭐죠?”

받아 든 책은 고서古書였다. 책갈피 하나를 넘기자 오래 삯은 종이는 마른 꽃잎처럼 와삭 으스러졌다.

“안 돼, 그렇게 넘기면.”

“이런 걸 왜 줘요?”

“이삿짐을 정리하다가 골라봤어. 그래도 생명의 은인이잖아.”

“은인은 무슨….”

“미안하다.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되고 말았다.”

선배는 주머니에서 작은 보석함을 또 꺼냈다.

“송진이 천 년이면 ‘호박’이 되는 건 알지? 이 천년이면 금파, 삼 천년이면 은파, 사 천년이 ‘미르’가 되는 거야. 전설 같은 이야기지만, 이게 바로 그 미르야.”

그는 18K로 동그란 그물망을 만들어 그 안에 미르를 넣은 반지를 보여주었다. 그는 내 손목을 당겨 그 반지를 손가락에 끼우려 했다.

“나 주려고? 싫어, 유미나 줘요.”

선배와의 실랑이를 지켜보던 유미가 얼른 반지를 낚아채더니 이리저리 돌렸다.

“에게! 송진은 뭐니 뭐니 해도 벌레를 아울러야 멋있는데 별로다 이건.”

“싫으면 제주도로 가져가서 <믿거나 말거나 박물관>에나 기증해버려.”

나는 반지를 슬쩍 쳐다보며 말했다. 18K 망 안에 든 송진인가 뭔가는 뽑아놓은 늙은 어금니 같았다. 누르스름하고 작고 찌그러져서 그야말로 하찮아보였다. 선배는 상처는 상처가 치유한다면서 반지에 의미를 넣어보라고 권했다. 도대체 사 천년 전 소나무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진물이 내 몸에서 흐르는 진물을 어떻게 치유한다는 말인가. 선배는 심드렁한 내 마음 따위에는 아랑곳없이 손가락을 당겨 기어코 그 반지를 끼웠다.

선배와 유미는 겉모습만큼이나 생각도 정반대였다. 저들이 어떻게 서로에게 이끌렸을까. 화려한 옷만큼이나 감수성이 풍부한 유미는 변화무쌍해서 늘 새로웠다. 선배도 그런 유미의 매력에 푹 빠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유미는 선배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꿈속 마을에 관해서도 떠들었다.

“오빠! 많이 헤맸지만, 꿈속이랑 똑같은 곳은 없었지?”

“응. 하지만 그 마을은 왠지 끌리더라고.”

“나도 괜찮아. 무엇보다도 오빠가 내 곁에 있을 거니까.”

유미는 하던 말을 멈추고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는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언니! 지난번에 내가 급전이 필요하다고 말했었지?”

“그래. 액수가 크던데 해결은 했니?”

“오빠가 다 갚아줬어.”

선배가? 유미는 어려워해야할 말을 쉽게도 내뱉었다. 그러니까 유미가 싸 놓은 똥을 이번에는 선배가 치운 셈이다. 유미는 낭비벽이 늘 문제였다. 고급제품만 보면 물불을 못 가려서 수입이 지출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뒷바라지할 남편도 키워낼 자식도 없는데 그녀는 늘 급전을 필요했다. 부모 형제도 해결해주기 힘든 게 돈이야. 자식 키워봐라 여윳돈 있나. 나는 벼룩의 눈물만큼 빌려주면서 공허한 충고만 덧붙였다.

“미안해.”

요구하는 금액만큼 빌려주지 못한 게 죄목이 될 수는 없을 텐데도 나는 죄인처럼 말했다. 그런 내 모습에도 불구하고 유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꼬나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들이 동네를 떠난다고 생각하니 나로서는 수족이 한꺼번에 떨어져 나가는 심정이었다. 나는 마른 입술을 오물거리며 한동안 음식만 삼켰다.

“허공에는 보름달이 떠 있었어. 커다란 저택 앞에서 간절히 대문을 두드리고 있는 꼬맹이인 나와 그 집 툇마루에 앉아 있는 또 다른 백발노인의 나를 보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처연하던지…”

선배는 오랫동안 반복해서 꾼 꿈이라며 나에게도 가끔씩 들려주던 이야기였다. 꼭 자신의 전생前生을 보는 느낌이라고도 말했다.

“전생에서 지은 죄가 있다면 이승에서는 모두 소멸시키고 싶어”

그는 꿈에 엄청 집착했다.

“유미를 보고 있으면 꼭 어릴 적 나를 보는 것 같아.”

선배의 어머니는 그가 여섯 살 때 친인척에게 떠맡기고 재가해버렸다. 그는 친척 집에 얹혀 살면서 늘 겉돌았다. 마당 귀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꼬챙이로 땅바닥을 파며 엄마 얼굴을 그리곤 했다. 그때 흙속에서 가끔 깨진 사금파리들이 발견되곤 하였는데, 그것들도 알고 보면 한때는 그 무엇의 일부였다가 떨어져 나온 것이었다. 그는 그것이 자신과 묘하게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그것들에 마음이 사로잡혀 잊어졌거나 묻힌 것에 관심 갖게 되었다. 그래서 전공도 고고학考古學이었고, 지금까지 낡고 오래된 것에 파묻혀있었다.

유미는 선배에 대해 얼마만큼 아는 걸까. 선배가 지금껏 혼자 살게 된 이유도 알고 있을까. 선배는 매번 동거녀에게서 어머니의 이미지를 찾곤 했었다. 자기가 그려온 어머니상象을 함께 사는 여자에게서 발견되기를 바랐다. 선배의 그런 마음을 읽은 여자들은 모두 선배를 떠나버렸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혼자로 되돌려졌다. 선배는 여자로 인해 신경성 위염을 앓았다. 그런 선배가 이번에는 유미라? 유미에겐 결코 그전 여자들처럼은 대하지는 못할 것 같았다.

유미는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아파트 쪽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오빠! 저 둥근 지형을 솥뚜껑처럼 열어젖히고 싶지? 사실 나도 저 원형 아래가 늘 궁금했거든.”

유미의 말에 그는 멋쩍게 웃었다.

그렇다면 혹시…? 유미도 어젯밤 선배의 행동을 지켜봤다는 뜻일까? 유미가 사는 5층 베란다에서도 충분히 그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 그 소동에도 선배는 누군가의 전화를 받고 차분해지던 게 생각났다. 그래! 어쩜 어젯밤 그 이상한 행동이 유미로 인해 잦아들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

베란다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바닥에는 쩡쩡 얼음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도로 맞은편에는 비틀비틀 언덕을 내려오는 중년 남자가 보였다. 칼바람이 남자의 눈과 뺨을 쪼아대는지 얼굴을 손으로 가렸지만, 그는 틀림없는 선배였다. 선배는 비탈을 내려와서 아파트 입구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뭔가를 발견한 듯 입구 가장자리에 멈춰 섰다. 그가 멈춰선 자리는 자동차의 진입구이고, 예전에 수심 깊던 배자 못 중심이었다. 그가 땅바닥을 이리저리 살피는가 싶더니 품속에서 커다란 벽돌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힘껏 치켜들었다. 치켜든 벽돌을 사정없이 바닥으로 내리쳤다. 캉, 시멘트에 벽돌 떨어지는 소리가 고요한 밤공기를 날카롭게 뚫었다.

“지금 뭐 하는 거요? 어유 술 냄새….”

“뚜껑을 열어야 해요.”

그는 경비원과 실랑이를 벌였다.

“뭡니까?”

지나가던 주민이 두 사람을 말렸다.

“102호 주민인데 땅속에 이장하지 못한 부모가 있다나 봐요. 술만 먹으면 시멘트를 깨부순다고 저 난리니.”

“그래요. 내 부모가 잠들어 있소.”

“그래도 그렇지 사람이 다치면 어쩝니까?”

선배는 온갖 재료들이 들어있는 꽁꽁 언 냉동실 문을 열어젖히듯 시멘트를 열어젖힐 태세였다. 선배가 바닥을 향해 또다시 벽돌을 치켜들자 경비원과 주민이 그를 제압했다.

“그런 문제도 해결하는 곳이 있을 거 아니요. 그리로 가셔야지 우리가 매번 무슨 죄요.”

그는 정말 땅을 열 수 있다고 여기는 걸까. 나는 3층 베란다에서 선배의 술주정을 지켜보다가 공연히 슬퍼졌다. 지나가던 몇몇 사람도 그 광경을 지켜보고는 선배를 돌았다고 여기는지 자신의 머리 위로 검지를 몇 바퀴 돌리면서 지나갔다. 퍽, 경비원들이 방심하는 사이 선배가 던진 돌에 무언가가 맞아 고꾸라지는 소리를 냈다. 내려다보던 나는 덜컥 겁이 났다. 얼른 현관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차갑고 캄캄한 허공이 깨진 유리 조각처럼 내 얼굴 위로 와르르 쏟아졌다.

악악, 악을 쓰던 선배가 아파트 입구로 진입하던 자동차 유리판을 깨버린 듯했다. 그는 내부에 수십 년간 잠들어있던 것들이 일제히 깨어난 듯 두 눈을 희번덕거렸다. 알 수 없는 말을 해대며 끝없이 발악했다. 운전자는 휴대전화기를 꺼내 들고 날벼락 같은 상황을 경찰서에 신고했다. 나는 그만 그들 앞에 나서기가 두려워졌다. 아파트 담벼락에 몸을 기댄 채 그 광경을 지켜보고만 보았다. 그 상황에도 선배는 주머니에서 휴대전화기를 꺼내들었고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짧은 통화를 마친 그가 무슨 일인지 조금씩 차분해지고 있었다. 그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경비원과 운전자에게 사과했다. 하지만, 이미 경찰차가 들이닥쳤고, 선배는 경찰차 안으로 끌리듯 들어갔다.

한동안 만나지 못했던 선배의 행동을 지켜본 나는 마음이 뒤숭숭했다. 아직도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한 선배가 안타까웠다.

“꼭 떠나야만 하니?”

나는 유미에게 물었다.

“언니도 알 거 아냐! 얼마나 떠나고 싶어 하는가를, 그러고 보면 언닌 참 독해.”

“유난 떨지 마.”

“오빠! 들었지? 언니는 우리랑 다르다니까.”

유미의 비난을 흘려들으며 나는 자꾸만 돌아가신 엄마를 떠올렸다. 울적해진 나는 엄마의 넋두리를 되뇌었다. <밭고랑에 독사가 똬리를 틀고 있었단다. 네 아버지는 그 뱀을 작대기에 걸쳐서 멀리 내던졌대. 그런데 글쎄 그 뱀이 날아갔을 못가에는 만삭의 앞집 새댁이 빨래를 하고 있었다지 뭐냐. 혼비백산 집으로 돌아온 네 아버지는 앞집에 그 사실을 알리고는 방으로 들어가 스르르 눕더구나. 동네 사람들이 우르르 새댁을 찾아갔어. 그런데 새댁은 희한하게도 멀쩡하게 빨래를 하고 있더래. 오히려 사람들이 왜 요란법석을 떨어대는지 의아해 하더라는 거야. 네 아버지는 제바람에 놀란 거였어. 그 일로 자리에 누운 뒤 시름시름 앓고 있기에. 놀란 사람에게 침을 맞히지 말라는 말이 있었지만, 사람이 다 죽게 생겼으니까. 급한 마음에 침쟁이를 데려와서 침을 맞혔어. 침이 화근이었는지 삼일 만에 눈을 감더구나.> 어머니는 아버지 이야기를 마치면 늘 눈물을 찔끔거렸다. 나는 사람도 크게 놀라면 죽을 수 있다는 말이 놀라웠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몇 달 뒤에 태어난 나를 동네 사람들은 유복녀라 불렀다. 아버지를 잡아먹고 태어났으니 당연히 천덕꾸러기였다. 나는 어렸지만, 얼굴을 빳빳하게 쳐들고 다니는 행동 따윈 하지 않았다. 치켜든 뱀 대가리를 수없이 봐왔기에 그 꼿꼿함이 얼마나 소름 끼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심성이 착한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늘 그렇게 평가했다. 착해서 뭐? 적어도 아버지라면 새댁의 뱃속과 엄마의 뱃속을 동시에 살폈어야지. 나는 이미 녹슬고 무뎌진 이야기에 따지고 대들었다.

먼지 쌓인 둥근 손거울을 들여다보는 어머니의 얼굴은 늘 퍼석했다. 피붙이가 없는 너는 남편과 아이를 붙들고 살아야 해. 가슴에 슬픔을 품으면 몸이 병들어. 엄마의 신신당부가 아니라 해도 못이 내 과거를 깊이 품어버렸으므로 나도 당연히 잊어야 하는 줄 알았다. 무엇보다도 현실이 더 절박했으니까.

떠난다는 말이 꼭 협박처럼 들리는 나에게 선배와 유미 또한 지나가는 것일까. 못이 지나가고 고무 땅이 지나가고 아파트가 생겨났듯… 지나가면 또 덮여지는 걸까. 취기가 오른 나는 마치 내가 태어나기 이전의 세상에 앉아있기라고 하는 듯 단 한 번도 뵌 적 없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찾으며 두리번거렸다.

“흥, 전설傳說이야 전설. 전설들이 까불고 있어. 이모! 한 병 더.”

유미는 소주병을 치켜들며 소리쳤다.

“이제 그만 마시자.”

선배가 횡설수설하는 유미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렸다.

“왜 죽으려고 했는지 알아? 그 여자 만나려고, 그 여자 만나서 그 여자 잡아먹고, 그 여자를 다시 낳아서, 그 여자를 길바닥에 내버리고 싶었거든.”

유미는 믿도 끝도 없는 오래전 유래된 듯한 노래를 구성지게 부르기 시작했다.

“엄만 죽어 개구리 되고 나는 죽어 배암되어 오월이란 단오 날에 마니리깡애서 만나보세.”

유미는 분홍 울 셔츠에 뚝뚝 눈물을 떨어뜨리며 낮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 뒤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를 쏘아봤다.

“언니 발목 수술했다고? 암튼 강철이야 강철, 강철이 어쩌다가 발목을 다쳤을까.”

“선배 때문이지.”

“나? 그럴 리가.”

선배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곤 곧 생각에 잠겼다. 그 모습에 유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언니! 오빠 발목 잡으려는 거 아니지?”

“아니야!”

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선배는 유미의 입을 손가락으로 막으며 내게 물었다.

“혹시 우리 처음 만난 날 다친 발목이야?”

초등학교 두 해 선배인 그와 가깝게 지낸 지도 어느새 십 년이 흘러 있었다. 십 년 전 나는 저녁마다 금호강둑을 걸었다. 그날도 강둑을 한 바퀴 휘돌아 나오는데 강물 반대편을 바라보고 선 한 남자가 보였다. 잿빛 어둠을 걷어내던 달빛이 그 남자의 그림자를 서걱서걱 갈대에 비벼댔다. 남자는 흐느끼고 있었다. 놀란 나는 갈대 뒤로 몸을 숨겼다. 누구지? 남자는 목울대까지 차오른 울분을 토해내듯 꺼이꺼이 울었다. 남자의 모습이 물 위에 떠 있는 얼음덩어리처럼 위태로웠다. 나는 이 생경하고 낯선 광경이 두려웠다. 남자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살금살금 강둑을 빠져나오는데? 갑자기 남자가 첨벙첨벙 물속으로 들어가는 게 아닌가! 겁에 질려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발걸음조차 제대로 뗄 수 없었다. 엉금엉금 기듯이 강둑을 빠져나온 나는 사람이 죽으려고 해요. 라고 소리쳤다. 다급한 내 목소리에 몇몇 사람들이 집 밖으로 나왔다. 집 밖으로 나온 사람들이 남자를 발견하고 급히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옥신각신 실랑이 끝에 마을 남자들이 그 남자를 질질 끌고 물 밖으로 나왔다. 나는 모여든 몇몇 사람과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 일이 있고난 얼마 뒤 남자는 자신의 위험한 행동을 이웃에 알린 사람이 나 라는 걸 어떻게 알아냈는지 집으로 찾아왔다.

“인사는 하고 싶었어요.”

“괜찮아요. 괜찮아요.”

나는 찾아온 남자가 무서웠다. 남자를 피해 집 밖으로 나갔다. 남자와 멀어지기 위해 무작정 걸었다. 그러다가 이젠 갔겠지 하고 뒤돌아보는데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너무 놀라 더 빨리 뛰려다가 그만 발목을 삐끗하며 나자빠졌다.

“가까이 오지 마세요.”

“나야. 나 기억하니?”

남자의 말에 얼굴을 자세히 살피는데, 어디선가 많이 본 얼굴이었다. 아! 그는 초등학교 두 해 선배인 영호였다. 영호선배라면 대학 졸업 후 서울로 올라갔다고 들었는데… 언제 다시 마을로 돌아온 걸까. 못 본 세월만큼 그는 많이 변해 있었다. 초라한 행색에 다리까지 절룩거렸다. 그를 알아보기란 그 누구도 쉽지 않을 듯했다. 나는 시커멓게 부어오른 발목을 바짓가랑이에 가리며 겨우겨우 집으로 돌아왔다.

선배가 갑자기 내 발목을 잡아당겼다. 그리고는 수술 자국을 이리저리 살폈다. 그러자 유미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젠 다 나았을 거야.”

유미는 발목 얘기를 꺼낸 걸 후회하는 눈치였다. 유미는 얼른 화제를 돌리기 위해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는 드디어 찾았다는 듯 창밖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오빠! 저기 봐봐 함박눈이야.”

유미가 가리키는 창밖엔 커다란 눈송이가 허공을 빼곡히 메우고 있었다. 마치 물뱀, 붕어, 쏘가리, 모기떼가 바닥 깊숙이 웅크리고 있다가 갑자기 시멘트 위로 튀어 오른 것 같았다. 그것들은 허공에서 이리저리 휩쓸리고 있었다. 못이 모든 풍경과 죽음과 집들을 꿀꺽 삼키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하더라도 이곳에서 자생하던 습지식물은 입을 다물지 않았다. 저 함박눈처럼 해마다 나타나서 기억을 상기시켰다. 모든 게 다 덮어지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의 내면에도 차곡차곡 새로운 것들로 빼곡해졌다는 것, 썩지 않는 상처가 끝임 없이 추적해온다고 해도 신神은 우리에게 고요하게 가라앉히는 마법의 가슴을 주셨다는 것, 그러니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문제는 전적으로 개인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취기 때문인지 자꾸만 졸음이 쏟아졌다. 그들 앞에서 나는 꾸벅꾸벅 졸다가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어느새 선배와 유미는 보이지 않았다. 내가 깔고 앉은 둥근 방석이 다른 세상을 열어놓아 어지러웠다. 제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잡풀이 구석진 자리에 떠서 자꾸만 헛구역질을 했다. 갑자기 방석이 소용돌이쳤다. 화장실을 들락거리던 나는 알 수 없는 어딘가로 빨려들고 있었다. 핏발 선 눈을 껌뻑거리며 발버둥을 쳤다. 기진맥진한 옆구리에서는 비늘 몇 개가 떨어졌다. 저 멀리서 지느러미를 흔들며 미궁을 빠져나가는 선배와 유미가 보였다. 이곳에 가라앉은 것들은 뭐였지? 아버지와 어머니? 선배와 유미? 나는 사라지는 것들의 머리채를 휘감았다. 머리카락이 감긴 손가락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언니! 나랑 화장실 가자.”

화들짝 놀란 방석은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스르르 미궁의 문을 닫았다.

“언니 자는 거야?”

유미가 손목을 잡아끌었다. 유미에게 이끌려 일어서려는데 발목이 뻐근했다. 엉덩이를 내밀고 화장실을 찾아 뒤뚱뒤뚱 식당 아래로 내려갔다.

“계단 조심해.”

층층의 어둠을 밟으며 내려가는 곳엔 화장실이 아니라 어쩌면 닥지닥지 지붕을 덧댄 우리의 고향마을이 나타날 것만 같았다. 절름거리는 내 오른발은 물풀의 마디처럼 허약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발목에서는 불규칙한 어머니의 심장 소리가 들렸다.

“아얏!“

내가 부축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미는 미끄러졌다.

“뭐야 나 떠밀었어?”

나는 휴대전화기의 플래시로 바닥을 살폈다. 나무계단 사이로 삐죽이 돋은 마른 풀포기에 유미의 신발이 포개져있었다.

“신발이 풀포기에 걸렸어.”

몇 번이나 확인시켜주었지만, 유미는 나를 노려보았다.

“돈만 빌려줬어도 나 떠나지 않아.”

유미가 내뱉는 씁쓰름한 말을 되 뇌이며 화장실을 다녀오자 선배가 자리에서 부스스 일어났다.

“그만 나가지.”

그는 휘청휘청 계산대로 걸어 나갔다. 식당 밖으로 나가면서 우리는 서로의 몸을 의지했다. 어깨동무를 한 채 나란히 걸었다. 우리 모두는 공교롭게도 허약하기 짝이 없는 발목들이었다. 비슷한 상처의 고향까마귀가 어깨동무로 펼친 커다란 날갯죽지는 땅바닥에 이리저리 쓸렸다. 훨훨 날고 있는 세상을 따라가기에는 턱없이 불안정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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