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혁 학강미술관장
김진혁 학강미술관장

1970년대 초 대구시 봉덕동에 위치한 효성여자대학교 미술과에 재직한 목랑(木朗) 최근배(崔根培)교수의 화명을 들어 보았다. 회화전공에는 최근배, 디자인전공에는 봉준호 감독의 부친인 봉상균 교수가 기억에 난다.

십여 년 전 목랑 최근배 탄생 100주년 특별전이 수성아트피아 전시실에서 열렸다. 오픈식 날 전시장을 찾았다. 가족들이 수적의 작품들을 잘 보관하여 상태도 좋고 시대별로 정리가 잘되어 있었다. 1934년 일본유학 시절 유화작품부터 1940년대 조선미전에 출품하여 입선된 채색화 작품까지 전시 되어 있었다.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근대의 수묵채색화가 대구경북에 발아한 양식을 상세히 보여주었다. 지금의 시대에는 현대미술이라 불리 우는 추상회화나 미니멀아트, 팝아트 등 소위 서구의 양식을 한국의 주거공간에 버무려 장식하고 있다.

이러할 진데, 과연 목랑 최근배(1910~1978)가 시도한 유형의 채색화가 시대의 트렌드에 연결되느냐고 반문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영남지역에는 뿌리 깊은 조선시대 서화의 문인화나 채색화류의 민화풍 등이 근대 시기의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일본화의 영향을 자연스레 받아들였다. 최근배 역시 일본유학 시 양화와 일본화의 체험으로 동양화라 불리 우는 신남종화풍의 수묵채색화를 시도 하였다.

최근배 작. 암향. 종이에 채색. 1942

최근배는 한·일합방의 해인 1910년 함경북도 명천군에서 태어났다. 경성(鏡城)공립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도일하여 일본미술학교 회화과에 입학했다. 1935년 일본미술학교 졸업과 동시에 일본인 부인과 결혼하였다. 이 해에 12회 국화전 입선, 7회 청룡사전에 입선하였다. 1936년 귀국하여 조선일보사 광고부에 입사했다. 이어서 조선미술전람회인 선전에 동양화 2점, 서양화 1점이 모두 입선하였다. 1940년에 조선일보사는 조선총독부의 지시로 폐간됨에 따라 최근배는 서울을 떠났다. 경상북도 김천고등보통학교 미술교사로 부임하고 이 해 조선미전에 ‘탄금도’로 창덕궁상을 수상하였다. 해방 후에는 교감 교장을 김천여자중학교에서 했다. 그 후 경북여자고등학교, 경북고등학교 등에서 교장을 하며 교직을 마쳤다.

1962년 영남지역에서는 처음으로 효성여자대학에 생활미술과가 개설되었다. 최근배는 3년 후 주임교수로 부임하였고 미술대학을 일구어 나갔다. 대학에 몸을 담자 매년 개인전을 개최하며 신남화풍의 수묵채색화를 그렸다. 당시에 서울 뿐만 아니라 대구에서도 현대미술인 추상화가 대세인 시절이었다. 그는 시류에 영합 없이 오직 자신이 배우며 자라온 우리 강산의 아름다움을 그려 나갔다.

주변에 보이는 낙동강, 앞산, 봉덕동, 수성못, 파동 등 우리의 아름답고 정직한 자연과 인물들을 목랑 풍으로 해석하였다. 전통회화의 채색화 기법은 먼저 판넬을 준비하고 화선지나 갱지로 배접을 하였다. 그 화지위에 풍경화나 인물화를 목탄이나 연필로 그리며 먹선으로 형상을 입히고, 지우개로 주변을 깨끗이 한다. 다시 화선지나 장지, 선지 등의 동양 종이를 붙이고 조심스레 본그림을 그려 나갔다. 특히 발색을 낼 때는 물과 채색물감의 적절한 만남으로 분위기를 이끈다. 이러한 기본수법 위에 중첩시키는 배채법, 점묘법, 적묵법 등 목랑의 실경산수화는 빛을 발하고 있다.

그가 남긴 수묵채색화는 누구나 이해가 쉽고 사랑할 수 있는 한반도의 모습을 그려나갔다. 애정 어린 솜씨와 따뜻한 시선으로 대구와 경북의 산천을 60여 년간 닦은 구도자의 모습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우리는 너무 먼 곳에서 새롭고 희귀한 것에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닌지 하고 지나가는 가을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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