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태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원태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지난 10월 15일, 런던 근교의 윈저 성(Windsor Castle)과 스코틀랜드의 발모럴 성(Balmoral Castle) 등에서 부군 필립(Philip) 및 소수의 측근들과 함께 격리 생활을 7개월간 이어온 영국 군주 엘리자베스 2세(Elizabeth II)가 오랜만에 외부 행사에서 얼굴을 드러냈다. 손자인 윌리엄(William) 왕세손과 함께 영국 국방과학기술연구소 산하 에너지학분석센터 개소식에 참석한 94세의 여왕은 구부정한 자세로 천천히 걸으면서 사람들과 대화하고 시설을 둘러보았다. 좁은 아파트가 아닌 드넓은 영지에서 격리 생활을 하고 있는 엘리자베스는 방명록에 서명하면서 농담을 하는 여유를 보이는 등 비교적 건강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훤칠한 ‘왕실의 미래’인 윌리엄이 옆에 있어서 그런지 더욱 도드라져 보인 고령의 여인의 연약함과 노쇠함을 화려한 핑크색 모자와 코트가 가려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와 의회민주주의를 채택한 영국 정치 체제에서 엘리자베스의 역할이 주요 시설 개소식에나 참석하고 의회 개원식에서 보석 박힌 왕관을 쓰고 정부가 쓴 연설문을 앵무새처럼 낭독하는 것에 국한된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하지만 이 힘없어 보이는 할머니에게 보장된 헌법적 권한은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한다. 우선 엘리자베스는 영국뿐만 아니라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 16개 국가들의 원수(元首)이다. 이에 엘리자베스는 이 16개 국가들의 총리 및 내각을 임의대로 해임할 수 있고 새로 임명할 수 있으며 의회를 해산하고 새 선거를 명할 수 있다. 또한 의회가 통과시킨 법안을 임의대로 거부할 수 있음은 물론이고, ‘엄중한 헌법적 위기’가 발생했을 경우 내각과 상의하지 않고 직접 통치권마저 행사할 수 있다. 선전포고권(宣戰布告權) 역시 엘리자베스의 고유 권한으로서 그 누구와의 상의 없이도 외국과의 전쟁을 개시할 수 있으며, 기결수에 대한 형선고의 효력을 상실시키는 사면권(赦免權) 또한 엘리자베스만이 보유한다. 이론적으로는 다 여왕 임의대로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다. 다만 자기 마음대로 할 엄두를 내지 않기 때문에 이를 ‘상징적인’ 권한으로 여기는 것이다.

엘리자베스도 사람인데 어찌 정치적 견해가 없겠고 어찌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욕구가 없겠는가. 특히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온 영국이 쑥대밭이 되어 가는데도 제대로 된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 하고 있는 영국의 위정자들을 공개적으로 혼쭐낸 후에 다 잘라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자신에게 헌법적으로 보장된 권한이라 하더라도 세습군주가 그 권한을 국민의 대표들의 동의 없이 임의대로 행사한다는 것은 물론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렇게 할 경우 영국의 의회민주주의 시스템이 회복 불능 상태로 훼손되고 겉잡을 수 없는 사회적 대혼란이 야기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엘리자베스는 68년간의 재위 기간 내내 자신의 개인적인 견해와 영향력이 정치 프로세스에 개입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으며, 이러한 그녀의 철학과 노력을 인정한 국민들로부터 그 오랜 기간 동안 깊은 사랑과 존경을 받을 수 있었다.

대한민국 검찰총장이 과연 정치인인 법무부 장관의 ‘부하’이냐 아니냐를 두고 벌어진 최근의 논란은 결국 검찰에게는 생명과도 같은 정치적 중립성을 지켜줄 의지가 있느냐의 문제와 직결된다. 우리 사회에 지금 절실히 필요한 검찰 개혁은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확고한 기반이 다져져야만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 이를 다져줄 의지가 있는 법무부 장관이라면, 아무리 ‘상관’으로서 자신에게 보장된 권한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를 ‘부하’에게 함부로 행사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진정한 검찰 개혁의 종착점이 검사 개개인이 외압에 흔들리지 않고 공정하고 투명하고 소신 있게 법을 집행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데에 있는 것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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