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은상] 김미정 '6번 국도'
[소설 은상] 김미정 '6번 국도'
  • 경북일보
  • 승인 2020년 11월 05일 18시 13분
  • 지면게재일 2020년 11월 06일 금요일
  • 14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7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유병수 작

찔끔거리던 비가 걷들자 가판대 가장자리에 햇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민수는 천막 안쪽으로 의자를 조금 들여놓고 앉는다. 도로는 마냥 한산해서 자꾸 가물거리는 눈을 부릅뜨며 졸음을 쫓아본다. 검정색 승합차 한 대가 멀찍이서 달려온다. 민수가 도로가로 뛰어간다. 승합차를 향해 찐 옥수수 두 개가 든 비닐봉지를 흔든다. 조수석에 앉은 장난감 물총을 든 사내아이와 눈이 마주친다. 웃고 떠드는 표정이 물놀이의 여흥이 남아있는 듯하다. 사내아이는 창문을 살짝 내리고 물총 구멍을 겨눈다. 민수는 몸을 움찔하며 몇 발짝 물러난다. 기어이 한줄기의 물이 뿜어져 나오고, 차는 그대로 6번 국도 상행선으로 달아난다.

민수는 승합차 꽁무니를 한참토록 노려보다가 가판대로 돌아온다. 옥수수는 다시 찜판 위에 올려놓는다. 오후 4시가 되어가지만 겨우 세 봉지밖에 팔지 못했다. 곧 이모가 올 것인데, 옥수수가 그대로 쌓여있는 이유를 변명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옥수수가판대 뒤로 펼쳐진 옥수수밭의 누렇게 영근 옥수수를 보고도,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찐 옥수수를 보고도 그대로 지나치는 이유를 설명할 도리가 없다. 또 한 대의 승용차가 달려오고, 민수는 플라스틱의자에서 용수철처럼 튕기듯 일어난다. 이번에는 한층 갓길로 다가가 세차게 봉지를 흔들어본다. 얼굴에 미소까지 띄우고서. 그러나 헛수고다. 민수는 휑하니 지나가버리는 운전자가 못내 서운해서 툭, 돌멩이 하나를 찬다.

쳇, 저만 배부르지.

민수는 개구리 소리를 내는 뱃속을 물로 채우고는 가판대 앞에 놓인 파란색 플라스틱의자에 몸을 웅크리고 앉는다. 뜨듯한 바람이 한차례 불어오자 스르르 눈이 감긴다.

옥수수가판대는 워터파크 물놀이객들이 주요 손님이었으니 찜통 무더위에 찜통 위 간식거리가 눈길을 끌지 못하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사람들의 입이 고급스러워져서 옥수수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고, 이모는 이모부에게 불평을 쏟아내었지만 이모부는 묵묵히 옥수수농사를 지었다. 음식 솜씨가 없는 이모 탓을 하지도 않았다. 주먹밥을 몇 번 얻어먹어본 게 다지만 민수는 이모가 엄마만큼 솜씨가 없다는 걸 단박에 알았다. 큰 알루미늄 찜솥에 물만 부어 삶아내는 옥수수가 혀끝에 감기는 맛을 낼 리가 만무했다. 사카린은 둘째로 치더라도 소금이라도 넣어야 할 것이지만 이모는 뜨내기손님에게 정성을 쏟을 이유가 없다며 줄곧 맹물로만 삶아내었다. 팔고 남은 옥수수는 헐값에 돼지사료로 넘겨졌다. 이모부는 밤늦은 시간, 차량통행이 뜸할 때쯤에야 나타나서는 날옥수수를 부려놓고 쉰내 나는 옥수수를 자루에 넣어 트럭에 싣고 갔다. 민수는 그제야 제몫의 옥수수 하나를 손에 쥐고 정말 옥수수 따위가 되어버리는 장면을 멀거니 지켜보았다.

내 이럴 줄 알았어. 지금 몇 신데 자빠져 자니? 잠깐 걸어오는 사이에 지나간 차만 열대야.

이모의 목에서는 마른 나무가 쪼개지는 소리가 난다.

민수는 의자에서 떨어지고 만다. 정강이가 돌부리에 부딪쳐 으스러지게 아프다. 뼈마디에서 터져 나오는 고통은 어떻게 참아야 할지 몰라 그저 손으로 두 다리를 감싸 안고 발을 동동거린다. 곧이어 이모의 넓적한 손바닥이 아이의 등짝에 내리꽂힌다.

퍽, 퍽, 퍽.

그래도 분이 안 풀리는지 이모는 옥수수 껍질을 아이 머리 위에 쏟아 붓는다. 달큰한 수박향이 난다. 노란수염이 민수의 코끝을 간지럽힌다.

에취!

에잇, 다 귀찮어. 죽어, 어디라도 나가서 죽어버렷!

새끼손가락만 한 연둣빛 생명체가 기어간다. 샌들 밖으로 나온 민수의 엄지발가락 위로 곧 올라올 태세다. 민수가 발을 살짝 들어준다. 니 애미는 넉 달째 깜깜이야. 달랑 한 달치로 입 싹 닦을 작정인가부지. 쓸모라고는 없는 놈을 내팽개치고 갔으면 성의표시는 해야 될 거 아니냐고. 쌍년, 염치도 없지.

연둣빛 생명체는 제 몸집보다 큰 돌멩이 앞에서 잠시 멈춘다. 민수가 돌멩이를 치워주자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부드러운 옥수수 속껍질을 녀석 앞에 깔아준다. 녀석은 껍질 위를 미끄러지듯 리드미컬하게 기어나간다.

이걸 다 어쩔 거야. 응? 또 돼지새끼들만 배터지게 생겼잖아아.

두툼한 발이 아이의 살 없는 엉덩이에 박힌다.

퍽, 퍽, 퍽.

민수가 웅크린 채로 픽, 쓰러진다. 노래를 부른다.

노래하며 춤추는, 나는 아름다운 나비, 날개를 활짝 펴고, 으읔!

발길질은 계속 된다.

싹싹 빌어도 모자랄 판에 지금 노래가 나와? 나오냐고오. 이 바보새끼야.

잘못했다고 빌라며 소리치는데, 민수는 꺽꺽거리며 손으로만 빈다. 이모는 그게 만족스럽지 않은지 발길질을 멈추지 않는다. 민수는 눈을 꼭 감는다. 하나부터 열까지 숫자를 센다. 폭력이 멈출 때까지 돌림세기를 한다. 그건 제법 고통을 잊게 해주었다. 발길질을 한 박자 쉬는 것 같더니 이모가 도로가로 뛰어간다. 차가 자갈밭에 주차하면서 내는 바퀴 소리, 이모의 비음 섞인 소리가 차례로 들려온다. 민수가 살며시 눈을 뜬다. 눈앞에서 연둣빛 생명체가 노려보고 있다. 녀석은 더듬이 두 개를 길게 뻗어 킁킁, 날름거린다. 자세히 보니 연둣빛 몸에 주근깨가 콕콕 박혔다. 동그란 촉수는 투명하고 촉촉해 보인다. 그래서 눈물 같기도 하다.

너 나비가 되고 싶구나. 좋아, 내가 품어줄게.

민수가 천천히 입을 벌린다. 연둣빛 생명체가 입속으로 기어들어온다. 꿈틀 꿈틀, 마른 혓바닥에 까끌거리는 느낌이 전해진다. 따가운 건지 간지러운 건지 표현할 수 없다. 그 생명체는 내처 목구멍으로 내려가는 모양이다. 민수는 부르르 몸을 떨다가 꿀꺽 침을 삼킨다. 목구멍 아래에는 어떤 장기가 있는지 궁금하지만 이모에게 물어보고 싶지는 않다. 자신이 그 녀석을 잘 키울 수 있을지 걱정될 뿐이다. 게걸스러운 뱃속이 녀석을 녹여버린대도 어쩔 수 없지만 좀 가여운 생각이 든다. 노래를 불러준다.

노래하며 춤추는, 나는 아름다운 나비, 날개를 활짝 펴고, 자유롭게 날꺼야아.

아까보다 좀 더 구성지다.

옥수수밭에 나비가 나풀댄다. 바다를 건너왔을지도 모른다. 잠깐 해변의 아이였을 때 나비와 춤을 추었지. 민수는 반가워서 손을 흔든다.

*

노래방이 문을 닫았다.

카운터에 붙은 쪽방에 살았던 엄마와 민수는 살 곳이 없어졌다. 노래방은 지하에 있었고 창문 하나 없었지만, 먹고 자고 싸고 손님이 없는 아침에는 화장실에서 목욕도 했다. 그러니 그 쪽방은 부엌이었고 침실이었고 텔레비전을 보는 거실이었으니 어엿한 집이었다.

영혜 씨, 재건축을 한다니 이제 더는 어쩔 수 없네. 토요일까지는 퇴거해야 된다네. 어디 갈 데는 정했어?

노래방 여사장이 말했다. 안타깝다고 말하는데 속 시원해하는 눈치였다. 엄마가 술을 몰래 훔쳐먹어 스트레스를 많이 주었으니까 그럴만하다고 민수는 생각했다. 여태껏 엄마를 찾는 단골손님 때문에 눈감아준 것인걸 알았다. 여사장은 그런 속내는 감추고 재건축 말이 나오기 전에 다른 업자에게 넘겨줬어야 했다며 후회된다고 말했다. 근처에 새로 지은 건물에 최신식 노래방이 두 곳이나 생기고부터는 손님이 뜸했던 건 사실이었다. 여사장은 민수에게 야쿠르트 하나를 냉장고에서 꺼내주었다. 민수는 꾸벅 인사를 하고 빨대를 꽂아 쪽쪽 빨아 마셨다.

이제 알아봐야죠. 그동안 사장님 덕분에 걱정 없이 살았는데, 감사했어요. 사장님.

엄마는 아주 가엾어 보였다.

엄마의 단골 남자 손님들은 붉은 글자로 쓰인 재건축 안내문을 매단 줄이 건물 입구에 쳐진 날부터 발길을 끊었다. 엄마는 손님 대신 술을 친구로 삼을 작정으로 보였다. 쪽방에서 술잔을 앞에 두고 싸가지가 없는 놈들이라며 고래고래 욕을 해대었다.

내가 지들 기분 업 시켜주려고 목이 터져라 불렀건만. 에잇, 매정한 새끼들!

민수는 노래방 도우미 일이 엄마가 좋아서 하는 일 일거라고 생각했었다. 목이 터져라 불러야 하는 일인 줄은 몰랐다. 엄마는 술이 깨면 일자리를 알아보러 나갔다가 돌아왔다. 그러는 동안 그 작은 쪽방에는 술과 한숨이 함께 머물러 있었다. 쪽방을 비워줘야 할, 토요일을 하루 앞둔 오후 무렵이었다.

우리 이제 어떻게 사냐. 벌써 늙은 여자 취급을 해. 요즘은 고딩만 찾는다나 뭐라나. 더러운 녀석들!

엄마는 가방에 옷가지와 생활용품들을 얼키설키 구겨 넣고는, 술기운이 남아있는 채로 시외버스터미널로 가서 주문진행 버스표를 끊었다. 민수는 엄마의 원피스 자락을 부여잡고 종종걸음을 쳤다. 엄마는 햄과 달걀이 들어간 토스트와 식혜를 사서 민수에게 안겼다. 버스에 타서 자리에 앉자마자 엄마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도착할 때까지 내내 잠만 잤다. 민수는 토스트를 먹고 창밖을 보다가 깜박 잠도 잤는데, 한 번씩 깨어나서 엄마의 존재를 확인했다.

바다는 보이지 않았으나 비릿한 바다내음이 물씬 풍겼다. 5월의 바닷가 기온은 서울보다 훨씬 가벼웠다. 짭짤하고 청량한 바람이 코끝을 쏘았다. 그래서 민수는 기분이 좋아졌다. 버스를 탈 때부터 마음을 졸이게 했던 불안한 마음이 싹 없어지는 것 같았다. 새로 살게 될 곳이 마음에 들었다. 엄마는 터미널 약국에 들러 하얀 알약을 샀다. 터미널을 나와서 다른 약국에 들러 비슷한 약을 또 샀다.

엄마 어디 아파?

아니. 나중에 아플까 봐. 비상약이야.

민수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불안해서, 엄마 옷자락을 잡고 엄마 둘레를 빙빙 돌았다. 일곱 살인지 여덟 살인지 자신의 나이도 모르는 아이는 갑자기 아플 일이 생기지 않도록 엄마를 꼭 지켜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온종일 누워 있다가 저녁 7시 무렵에나 주문진시장을 한 바퀴 돌고 오겠다며 나간 엄마는 호떡과 어묵꼬치를 사들고 왔다. 검은 봉지를 민수에게 통째로 안긴 엄마는 다시 벽을 보고 외로 누웠다. 민수는 엄마가 방안에 들어설 때부터 냄새로 봉지에 든 물건의 정체를 알아챘다.

엄마는?

너나 먹어.

먹고 들어온 것 같지는 않았다. 엄마 입에서는 술 냄새만 났으니까. 민수는 엄마의 쏙 들어간 허리와 엉덩이선을 바라보면서 어묵꼬치를 입에 넣었다. 아래층에서 매운탕 냄새가 올라왔다. 방을 구하러 바다가 보이는 해녀 횟집에 들어섰을 때였으니 따뜻한 밥을 먹은 건 나흘 전이었다. 엄마는 민박할 방을 물어보면서 잡어매운탕을 시켰고, 덜 맵게 해달라고 특별 주문까지 넣었다. 주로 간편식으로 끼니를 때우던 민수는 식당에서 밥 먹을 때가 제일 행복했다. 엄마는 요리하는 걸 싫어했다. 그래서인지 굳이 부엌 달린 집을 얻으려고 하지 않았다. 민수는 그날 먹었던 매운탕과 따뜻한 쌀밥을 생각하며 어묵을 입속에서 우물거렸다. 이제 달콤한 호떡도 짭조름한 어묵도 지겨워졌지만 엄마에게 투정 부릴 정도로 참을 수 없는 건 아니었다. 시끌벅적한 웃음소리와 노랫소리가 들렸다. 민수는 얼른 창문을 닫았다. 그러나 그 잠깐의 틈새를 비집고 “위하여!” 건배 소리가 올라왔다. 엄마는 부리나케 일어나 방을 나갔고, 그래서 민수는 먹던 어묵꼬치를 검은 봉지에 쑤셔 넣어버리고 엄마를 쫓아나갔다.

그새 엄마는 낯선 남자들 틈에서 술잔을 받아들고 있었다. 투명한 소주가 술잔에 부어졌고 엄마는 한입에 술을 털어 넣고는 남자 손님들의 잔에 차례로 술을 따랐다. 술잔이 서너 차례 돌아가자 남자들이 노래를 시켰다. 엄마는 소주를 한잔 더 마시고는 숟가락을 들고 일어났다. 공짜 술을 마실 수만 있다면 노래든 뭐든 기꺼이 했을 테다.

홍도야, 우지마라 오빠아가 이이있다.

엄마는 구릿빛 얼굴의 젊은 남자에게 윙크를 하곤 옆에 가서 앉았다. 오빠로 찍힌 젊은 남자는 히죽 웃으며 엄마의 엉덩이 쪽으로 한 손을 둘렀다. 횟집 주인이자 민박집 주인아주머니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엄마를 곁눈질하고 있었다. 아이는 엄마가 몹시도 부끄러웠다. 갈보년! 하고, 엄마의 별명을 뇌까렸다.

엄마, 나 배 아파.

엄마가 횟집 문 앞에 서 있는 민수를 째려보았다. 엄마 얼굴은 벌써 빨간 떡볶이 국물이 되어 있었다. 젊은 남자가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나더니 민수에게 만원 한 장을 쥐어주었다. 남자의 뼈 굵은 팔목에 노란 팔찌가 치렁거렸다.

고놈 참, 똘똘하게 생겼구나. 옛다, 이걸로 아이스크림 하나 사 먹고 와.

젊은 남자에게서 담배에 절은 땀내가 났다. 민수는 몸을 뒤로 뺐지만 남자는 기어이 주머니에 돈을 넣어주며 횟집 밖으로 내보냈다.

바닷가의 어둠은 빨리 내렸다. 횟집에 걸린 벽시계가 8시를 가리키고 있었으므로 바다가 먹물색이 된지는 두어 시간 전부터였다. 민수는 횟집이 늘어선 해안가 도로에 생뚱맞게 들어앉은 편의점으로 뛰어갔다. 횟집 이층 방 창문에 이마를 대고 내려다보았던 그 편의점이었다. 제 돈으로 무얼 사 먹는 건 아주 오랜만이었으므로 냉동고를 가득 채운 알록달록한 포장지의 아이스크림을 보자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민수는 겨우 딸기 아이스크림콘 하나를 골라 밖으로 나왔다. 방죽 위에 고양이 두 마리가 서로의 얼굴을 비비대고 있다가 민수와 눈이 마주치자 모래사장으로 달아났다. 민수는 고양이가 놀던 방죽 위를 걸으며 아이스크림을 핥아먹었다. 아이스크림을 다 먹을 동안 엄마가 횟집 이층 방으로 올라갔기를 바라지만 그건 희망일 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드문드문 늘어선 가로등이 희뿌옇게 밤바다를 비추었다. 고양이는 보이지 않았고, 바람이 모래사장을 쓸고 지나갔다. 썰렁하고 스산했다. 뱃속도 차가워져서 민수는 꽁지만 남은 아이스크림콘을 입에 물고 횟집을 향해 뛰었다. 큰 창 너머로 보이는 엄마는 여전히 술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민수는 방으로 올라가 텔레비전을 켰다. 여자아이돌 가수들이 트로트를 부르는 음악프로그램이 방송되고 있었다. 심수봉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엄마가 좋아하는 노래였다. 민수는 엄마처럼 간드러지게 따라 불렀다.

눈앞에 바다를 핑계로 헤어지나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보내 주는 사람은 말이 없는데 떠나가는 사람은 무슨 말을 해에.

민수는 엉덩이를 실룩거렸다. 여자아이돌들의 뽀얀 얼굴이 화면 가득히 나타났다 멀어졌다가 했다. 카메라를 향해 윙크를 하고 빨간 입술을 주욱 내밀었다. 민수는 엄마의 화장품 가방에서 빨간 루주를 찾아내어 입술에 발랐다. 그러고는 텔레비전 화면으로 다가가 기다렸다. 좋아하는 누나가 나타날 때를 기다렸다가 입을 맞출 작정이었다.

하나, 둘, 셋, 쪽!

텔레비전 화면에 입술을 갖다 대었다. 루주에서 콜라젤리 맛이 났다. 민수는 루주를 덧바르고 노래가 끝날 때까지 대여섯 번을 반복했다. 뽀뽀놀이가 싫증이 날 때쯤에도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다. 민수는 꼬박꼬박 졸다가 외로 누웠다. 시시각각 변화무쌍하게 송출되는 텔레비전 영상이 민수의 얼굴 위로 어른어른 비쳤다.

텔레비전도 꺼지고 웃음소리와 노랫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일정한 간격으로 들려오는 파도소리 사이로 엄마 목소리가 묻어왔다.

엄만 민수를 사랑하는데에, 술 없인 살 수가 없네.

엄마의 한쪽 팔이 민수 겨드랑이 밑으로 파고 들어왔다.

하아! 그냥 죽으면, 행복해질까.

엄마 입에서 젊은 남자의 냄새가 났다. 민수는 몸부림치는 척하며 엄마에게서 돌아누웠다.

아들, 미안해.

*

미안해를 백번쯤 말한대도 소용없어.

한바탕 패악질을 끝내고 얼마 되지 않은 돈을 지갑에 챙겨 넣는 이모의 뒤통수에 대고 민수는 엄마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온종일 옥수수를 팔아봤자 2만원이 넘지 않았다. 민수는 그 돈의 가치가 노래방 2시간 이용료 정도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엄마가 세상 물정을 알아야 한다며 알려준 경제 상식이었다. 용서하지 않겠다며 다짐했지만 민수는 엄마를 생각하면 찔끔 눈물이 난다. 이모의 패악질에도 안 나던 눈물이 나는 이유는 미안해, 라고 말해줬기 때문이다. 정말 용서할 수 없는 일을 당하면 눈물조차 나지 않는다. 이를 악물고 버텨야 할 때는 숫자를 세거나 노래를 부른다. 몸에서 생각을 분리하면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실제로 민수는 요즘 몸의 감각이 무디어져 가는 걸 느끼며 그걸 다행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이모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저녁엔 또 비가 온대. 이모부 오면 갈무리 잘하고 들어가 자. 첫끗발이 개끗발이라더니 에잇, 오늘도 종쳤네.

이모는 아침에나 올 것이다. 옥수수를 삶아야 얼마간의 돈이라도 만질 수 있으니까. 민수는 외계어 같은 말이 쓰이는 그 노름판이라는 곳이 궁금해진다. 언젠가 이모가“그래, 노름판에 살림을 차렸다 왜?”하고 이모부에게 대거리를 했는데, 왠지 돈이 휙휙 날아다니는 놀이일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날아다니는 돈을 낚아채는 이모의 넓적한 손바닥이 떠올라 이내 몸서리를 친다.

옥수수밭 뒤편에서부터 거물거물 어둠살이 내리고 있다. 아직 팔아야 할 옥수수가 많아서 가판대에 붙은 작은 쪽방에 들어갈 생각은 못한다. 민수는 호롱랜턴을 켠다. 이맘때면 늘 허기가 몰려왔다. 그래도 허락 없이 옥수수 하나쯤 먹을 생각은 못했다. 이모부가 와서 옥수수 하나를 건네줄 때까지 파란색 플라스틱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신기한 일은 허기가 반복되자 점차 배고픈 감각도 없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연둣빛 생명체가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진다. 민수는 배를 문지르며 ‘나는 나비’를 불러준다. 계속 부르다 보니 덜컥 겁이 난다. 티셔츠를 걷어 올리고 맨살을 살살 쓰다듬어본다. 군데군데 멍자국이 든 살갗은 곧 허물을 벗어낼 애벌레처럼 얼룩덜룩하다. 정말 나비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허물을 벗으면 번데기가 될 테고 완전히 새롭게 태어날 것이며, 빛깔 고운 날개를 펄럭이며 옥수수밭을 넘어 6번 국도를 따라 바다를 향해 날아갈 것이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민수는 흰옷을 입을지 얼룩무늬 옷을 입을지 고민스럽다.



*

저리 가버렷!

왜 고양이가 미운건지, 민수는 모래를 한 움큼 쥐어 고양이에게 냅다 던졌다. 방죽 위에서 느긋하게 서로의 몸을 그루밍하던 고양이들이 사나운 모래 세례에 어구 창고 쪽으로 달아났다. 그러다 덩치 큰 놈이 몸을 돌려 하악질을 해대었다. 민수는 놈을 향해 한 번 더 모래를 뿌렸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서 발로 모래를 걷어찼다. 폭죽처럼 모래알이 사방으로 튀어날았다. 노란 팔찌를 치렁이며 엄마의 허리를 안던 그 젊은 남자가 엄마를 찾아왔을 때부터 심통이 났던 터였다. 화풀이 대상이 필요했는데 마침 꼴불견으로 놀던 녀석들이 표적이 된 것이다. 민수는 고양이가 기어들어간 창고 밑바닥 틈새를 모래로 메워버렸다.

초여름의 해수욕장은 밋밋하기 짝이 없었다. 간혹 갈매기들이 해변에 앉았다 쉬어갈 뿐 하늘과 바다와 모래가 하염없이 펼쳐졌다. 민수는 방죽 위를 오르락내리락하다가 모래사장으로 걸어가다가 파도치는 언저리까지 뛰어갔다 돌아왔다. 노래라도 있었으면 덜 지루했을지도 모른다. 손님이 없는 오전의 노래연습실은 민수의 놀이터였다. 트로트부터 발라드, 힙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불렀는데,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글자를 익혔다. 수많은 노래 속에 등장하는 사랑과 이별 그리고 슬픔과 그리움 같은 노랫말들이 꼭 엄마의 이야기 같아서 엄마가 가여운 사람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젊은 남자가 찾아왔을 때 환하게 웃는 엄마를 보면서 잠시 엄마를 양보하기로 했던 것이다.

잠시라지만 언제쯤 횟집 이층 방으로 돌아가도 되는지 가늠할 수 없어서 산책로 끝까지 갔다 와보기로 했다. 해변 산책로는 방죽을 따라 직선으로 뻗어있었다. 터벅터벅 산책로 끝자락에 있는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갔다. 약간 푸른빛이 도는 통창으로 만들어진 마치 뮤직비디오 속에서 본 듯한 정류장이었다. 6번 국도 종점이라는 안내문이 있었다. 버스도 기다리는 사람도 없었다. 민수는 냉큼 의자 위에 올라서서 통창 너머의 바다와 마주 섰다. 바다는 조용히 너울거렸다. 손을 동그랗게 모아 눈에 갖다 대고 먼 바다를 바라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과 새파란 바다면 사이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그 아지랑이를 타고 나비 한 마리가 물결처럼 날아왔다. 민수는 눈을 비볐다. 꽃밭에서나 어울릴법한 처음 보는 크기의 왕나비였다. 은갈색 바탕에 자주색과 검정색이 부챗살 모양으로 펼쳐진 날개에는 바깥 가장자리를 따라 작고 흰 얼룩무늬가 찍혀 있었다. 얇고 투명한 날개면에 맥이 도드라져 보였다. 그것은 힘줄처럼 날갯짓을 할 때마다 불끈 솟아올랐다. 꽃밭보다 바다를 선택한 나비라니, 멋졌다. 민수는 엄마 없이 혼자서 바다를 건너온 나비가 자신보다 훨씬 용감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나비와 잠시 어울릴 양으로 양팔로 날갯짓을 하며 따라가 보기로 했다.

햇볕으로 달궈진 모래사장은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고, 아이와 나비는 누구의 방해 없이 자유롭게 춤을 추었다. 그때 민수는 엄마가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언니, 이거 한 달 생활비정도는 되거든. 나 서울에 다니러 오는 동안 딱 1주일만 돌봐주라. 남자애가 음전해서 없는 것처럼 군다니깐.

곱상하게 생기긴 했네. 영혜 너 어릴 때 모습 고대로야.

흐흐, 그런가? 하루 종일 혼자서도 잘 놀아. 언닌 신경 하나도 안 써도 돼.

엄마와 엄마의 언니는 속닥거렸지만 대화 내용이 설핏설핏 민수에게도 들렸다. 민수는 쪼그려 앉아서 부러진 나뭇가지로 흙을 파고 있었다.

저것 봐. 혼자 잘 놀지?

엄마의 언니는 옥수수 껍질을 까면서 민수를 흘깃 쳐다보았다. 갸름한 눈매에서 서늘한 기운이 돌았다. 이종사촌언니라는데 둥글넙데데한 얼굴도 그렇고 땅딸막한 몸집이 엄마와는 어느 한 군데 닮은 구석이라곤 없었다. 민수는 잠시라지만 저 웃는 체하는 언니와 살고픈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엄마를 따라가겠다고 떼를 쓴다면 두 여자는 당황할 것이었다. 오랫동안 눈칫밥을 먹은 아이는 어쨌거나 저 서늘한 눈빛의 언니와 살게 될 것이며, 그러니 그녀의 비위를 거스르면 안 된다는 것쯤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말썽을 부린 적도 없고 장난감을 사달라거나 과자를 사달라고도 않는 아이를 엄마는 왜 낯선 아줌마에게 맡기려고 하는지, 서러웠다. 엄마를 귀찮게 했다면 술병을 몇 번 감춘 일 정도일 뿐인데. 어림짐작 가는 것은 있었다. 그 젊은 남자! 자신이 귀찮아졌다면 담배 쩐내가 나는 그 남자 때문일 거였다. 일자리를 구하러 간다고 했지만 민수는 썩 믿어지지 않았다.

학교는?

엄마의 언니는 영 귀찮은 표정이었다.

일곱 살이야.

민수의 나이는 작년 크리스마스 때부터 일곱 살에 멈춰있었다. 엄마는 아들의 실제 나이를 잊어버린 듯 굴었고, 민수도 굳이 고쳐 말하지 않았다. 학교라는 말이 나오면 몸이 저절로 움츠려들었다. 또래아이들과 한 교실에서 공부하고 점심을 먹고 같이 놀기도 해야 할걸 상상하면 이유 없이 겁부터 나는 것이었다.

애가 좀 작으네. 난 우는 애는 딱 질색인데.

엄마는 고개를 강하게 흔들었다. 절대 그런 아이가 아니라면서 딱 1주일 만이라고 재차 사정했다. 엄마가 언니에게 하도 매달려서 민수는 엄마 사정이 딱하게 생각될 정도였다. 그래서 울 수도 없었다. 그래도 언니가 쉽게 수락하지 않자 민수는 마음이 초조해졌다. 엄마 일이 틀어지지나 않을까 걱정되었다. 문득 엄마를 미안하게 만들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이렇게 말해버렸다.

얌전하게 있을게요. 이모.

민수는 두 여자의 표정을 살폈다. 엄마는 환하게 웃고 있었고, 언니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런 엄마가 서운했지만 한편 안심이 되었다.

내가 아이를 키워본 적이 있어야지. 자신 없는데.

딱 1주일이야 언니.

민수랬지. 너 옥수수 좋아하니?

엄마의 언니는 민수에게 찐 옥수수 하나를 쥐어주었다. 민수는 꾸벅 인사를 하고 한입 베어 물었다. 톡톡 씹히는 식감이 재미가 있었다. 민수는 자루를 돌려가면서 콕콕 박힌 알맹이를 훑어먹었다.

잘 먹네에.

민수는 아주 맛있는 척, 한 알 남기지 않게 먹어치웠다. 엄마의 언니가 배시시 웃었다.

엄마는 옥수수가판대에 놓인 파란색 플라스틱의자에 민수를 앉히고 일곱 밤만 자고 있으라고, 속삭였다. 그러고는 차를 얻어 타고 6번 국도를 따라 떠났다. 그때 민수는 보고야 말았다. 운전대를 잡은 남자의 팔목에서 그 치렁거리는 노란 팔찌를 말이다. 홍도야 우지마라를 부른 날, 젊은 남자 옆에서 오빠가 있다고 노래한 날부터 엄마 입에서 그 남자의 냄새가 났다. 꼭꼭 걸어 잠근 방문 앞에서 엄마가 지르는 고양이 소리를 들을 때마다 엄마에게는 아들보다 오빠가 필요하다는 것을 민수는 알았다. 이번에 만난 젊은 남자는 술을 좋아했으니까 엄마를 사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엄마가 잠시 여자가 되고 싶은 거라면 민수는 엄마의 사정을 봐주기로 했다. 누구를 좋아하는 일은 나쁜 일이 아니니까.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죽을 마음도 들지 않을 테니까. 엄마가 가방에 숨겨 다니는 하얀 알약을 생각하며 민수는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자신보다 힘이 센 그 젊은 남자를 택한 엄마의 선택은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엄마도 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도 일곱 밤만 자면 데리러 와주면 좋을 것 같았다. 그 일곱 밤이 하염없이 길어지고 있었다.



*

천막 안에 매달아 놓은 호롱랜턴에 날벌레들이 까맣게 앉았다. 민수는 의자를 천막 밖으로 내어놓는다. 의자에 앉으면 바라보이는 산은 검정에 초록을 섞어 만든 물감으로 칠해놓은 것 같다. 그 산꼭대기에 먹구름이 솜이불처럼 걸쳐있다. 가까이 가서 만져보고 싶어진다. 눈처럼 손에 닿자마자 사르르 녹는지 궁금하다. 민수는 산을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다. 그동안 살았던 쪽방에서는 산은 아주 까마득한 곳에 자리해 있었다.

먹구름이 점점 가판대쪽으로 다가온다. 높이도 훨씬 낮아졌다.

후드득, 비가 쏟아진다. 기막히게도 날벌레들이 사라지고 없다. 재빠르게도 숨었다.

휙, 돌개바람이 천막을 친다.

랜턴이 떨어진다. 바삭, 유리가 박살이 난다.

돌개바람이 한 번 더 불자 이번엔 알루미늄 솥뚜껑이 날아간다. 갈무리를 잘 해야 하는데, 민수는 어쩔 줄 모른다. 찜솥을 방 안에 들여놓아야 할 것 같다. 낑낑거리며 들어본다. 일곱 살이나 여덟 살 아이의 힘으로는 어림도 없다. 민수는 옥수수 봉지를 방 안으로 옮긴다. 그러면서 옷이 쫄딱 젖는다. 바람이 점점 더 세차게 분다. 민수의 가녀린 몸이 휘청거린다.

옥수수 밭이 운다. 우수수 우수수. 어둠은 더 짙어져서 좀비들이 옥수수 사이로 달려 나올 것만 같다.

울고 싶다. 이모부는 언제 올까, 민수는 쪽방 구석에 앉아 양손으로 귀를 막고 이모부를 기다린다. 기다리는 일은 두려운 것이었다. 오지 않을까 봐.

자갈밭에 바퀴 구르는 소리가 들리고 트럭 한 대가 선다. 이모부의 걸음은 느릿하다. 날옥수수 포대를 방으로 옮긴다. 그러기를 세 차례 한다. 이모부의 비옷에서 빗물이 떨어진다. 비옷을 벗고 방으로 들어온다. 쪽방이 가득 차는 느낌이다. 이모부는 찐빵 한 개를 건넨다. 민수가 그걸 받아들어 입에 넣는다. 꺼억, 민수의 눈에서 뚝뚝 눈물이 떨어진다.

천천히 먹어.

이모부의 목소리는 낮다. 그래서 마음이 편안해진다.

민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꾸역꾸역 삼킨다.

퀘엑!

민수는 먹은 걸 다 쏟아낸다. 이모부가 등을 두드려준다. 그러고는 생수를 따서 먹여준다. 민수는 물을 마시고 그냥 옥수수를 먹겠다고 말한다. 이모부의 눈이 흔들린다. 민수는 그 눈빛이 싫지 않다. 민수는 옥수수를 먹기 시작한다. 찐빵보다 훨씬 잘 먹어진다.

네 아빠는.

민수는 고개를 젓는다. 이모부는 표정이 없다. 웃지도 화를 내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민수의 몸짓을 꼭 아는 것 같다. 민수에게 아빠는 없다. 엄마가 한 번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건 묻지 말라는 사인이었다. 민수가 아는 남자는 엄마가 만난 수많은 남자 손님뿐이었다.

민수는 옥수수 하나를 금세 먹어치운다.

하나 더 먹을래?

이모부의 말은 다정스럽다.

민수는 고개를 젓는다. 몸이 무거워지면 날지 못할 수도 있다.

너 얼굴에 버짐이 폈구나. 너 혹시 …옥수수만 먹은 거니.

이모부가 한숨을 쉰다. 엄마의 한숨소리와 다른 느낌이다.

이모부는 민수의 얼굴을 만져보더니 차례로 깡마른 팔과 다리를 살펴본다. 마침내 윗옷까지 벗긴다. 얼룩 투성이다. 희고 검은 버짐이 몸 전체에 퍼져있다.

너 왜 이러니.

민수는 대답을 할지 말지 망설인다. 나비가 되고 있다는 말을 하면 놀랄 것이기 때문이다.



일어나야 하는데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민수는 번데기가 되어가나 보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가만히 누워있기로 한다. 이모가 오기 전에 번데기가 되었으면 싶다. 잠을 자고 일어나면 나비가 되겠지. 옥수수 밭을 한 바퀴 돈 다음 6번 국도를 따라 날아갈 테다. 나무가 갈라지는 소리, 이모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침인가 보다. 옥수수 껍질을 까서 찜솥에 물을 넣고 불을 피우겠지. 소금도 없이 사카린도 없이 밍밍한 맹물로 옥수수를 삶아내겠지.

급전이 좀 필요해서 전화했어. 내가 일곱 살짜리 애를 입양했거든. 그 애가 우리 집 돈 먹는 하마네. 딱 1주일만 쓰고 줄게.

나비가 되려는 아이는 돈 먹는 하마라는 소리에 진저리를 친다. 민수는 얼른 번데기가 되었으면 싶어 팔과 다리를 꼭 오므린다. 하얀 옷을 입을지 얼룩무늬 옷을 입을지 어서 골라야 한다. 머릿속으로 이 옷 저 옷으로 갈아입어본다.

아직 쳐 자는 거야?

이모가 쪽방으로 들어온다. 민수는 일어나지 않을 작정이다. 그런데 몸은 부들부들 떨린다. 빨리 번데기가 되었으면 싶다. 이모의 뭉툭한 발이 옆구리에 닿는다. 툭툭, 몇 번을 친다.

야, 일어나. 깬 거 다 알거든.

민수는 눈을 감고 입을 다물고 숨을 참는다. 그리고 숫자를 센다. 하나부터 열까지 돌림세기를 한다. 아직 열 이상의 숫자를 세어본 적이 없다.

씨팔 쌍년! 돈도 안 보내, 전화도 안 받아. 네 애미를 어쩌냐. 내가 왜 너를 미워하겠냐아.

이모는 신세타령을 시작하면서 아이를 한 번씩 발로 찬다. 그래도 민수는 꼼짝 안 할 작정이다. 번데기가 되어야 하므로.

왜냐! 내가 막판 쌍끌이로 끝내는 년이었거든. 근데 너 오고부터는 안 된단 말이지. 왜냐! 재수 옴 붙어서 그런거지이. 너 땜에에.

발길질의 세기가 점점 강해진다. 아이의 몸이 벽 쪽으로 밀려난다. 민수는 노래를 부른다. 목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얼른 얼른 번데기가 되었으면 싶다. 이모가 아이 몸을 흔들어 본다. 아이는 축 늘어진다.

이 바보새꺄! 죽은 거야? 진짜로?

이모가 땅바닥에 풀썩 주저앉는다.

트럭 소리를 들은 것 같다. 민수는 자갈밭에 끌리는 발자국 소리를 듣는다.

몹쓸년!

이모부가 이모의 뺨을 친다.

내가 뭘 어쨌게에.

이모부가 이모를 밀쳐내고 아이를 들쳐 업는다. 이모부의 등이 축축해서 뛰어왔을 거라고 민수는 생각한다. 이모부의 목에 팔을 걸고 싶은데 손가락조차 움직일 수 없다. 이제 번데기가 된 것도 같다. 그런데 얼마나 자야 할지 알 수 없다. 물어보고 싶지만 머리에서 자꾸만 생각이 빠져나간다. 자고 일어나면 용감한 나비가 되어있겠지. 엄마 없이도 혼자서 바다를 건너가겠지. 그러니 좀 오랫동안 자더라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경북일보의 다른기사 보기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