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한 계곡 물가 붉게 익어가는 가을색 내려앉아

옥계천 위로 난 구름다리와 하늘이 조화를 이루고있다.

가을이 산 아래까지 내려왔다. 제법 아침, 저녁이 쌀쌀한 날씨를 보이고 있는 전형적인 가을이 창가에도 일렁인다. 하늘은 높고 푸르며 산색은 울긋불긋 채색이 되어 산객들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 모처럼 지인들과 10월의 마지막 주말에 영덕 달산면에 있는 팔각산 산성계곡을 찾아 떠났다.

포항에서 1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라 접근하기가 편한 곳이지만 생각만큼이나 갈 기회가 없었다. 아주 오래된 기억으로 팔각산(628m)을 여러 번 다닌 적이 있고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험로에 로프를 설치하는 등 애착을 가진 적이 있는 필자로서는 남다른 추억이 있는 산이다. 옥계 쪽에서 범상치 않은 바위산 여덟 개를 힘겹게 오르내리며 닿은 정상에서 옥계계곡의 힘찬 흐름을 굽어보면서 부드러운 우측 능선을 타고 내려오다 세 갈래 갈림길에서 다시 오른쪽 능선을 길게 내려서면 닿는 독가촌이 있다.

산성계곡 생태공원 입간판.

깊은 산골짜기에 홀로 사는 분이 있었던 기억이 나고 너른 개활지에 밭뙈기를 일궈 채소를 가꾸며 주변에 늘린 산복숭아 나무에 주렁주렁 열린 복숭아를 따먹던 기억도 새롭다. 독가촌에서 시작되는 계곡이 ‘산성계곡’이다.

팔각산 등산안내판.

팔각산 정상을 찍고 독가촌으로 내려와 산성계곡을 따라 달산면 옥산리 마을까지 내려오는 종주코스는 줄잡아 5~6시간 걸린 것 같다. 이제는 그렇게 어려운 산행은 할 수가 없고 그저 편한 길만 찾다 보니 산성계곡 트레킹이 이번 ‘힐링 & 트레킹’의 대상지가 되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산성계곡 생태공원 입구 주차장에 차를 대고 생태공원 주변과 청소년들을 위한 어드벤처 시설을 둘러보고는 새로 난 출렁다리를 건너 본격적인 산성계곡 트레킹에 나선다. 생태공원에서 산성계곡 독가촌 까지는 대략 3.8㎞의 거리로 왕복 3시간반 정도 걸리는 여정이다.

산성계곡으로 가는 초입에 있는 철제 구름다리.
생태공원 꽃밭에 핀 상사화(꽃무릇)가 매혹적인 자태로 반긴다.

생태공원 꽃밭에는 상사화(꽃무릇)가 아름답게 피어있고 출렁다리 건너 계곡 초입에 흐드러지게 핀 구절초가 산객들을 반기고 주변 감나무에 노랗게 물든 감이 탐스럽게 익어가는 가을 풍경이 펼쳐진다.

인적이 없는 계곡 속으로 들어 처음 만나는 나무다리를 건너서니 ‘산성계곡(독가촌)’ 가는 길이 2.8㎞ 남았다는 이정목이 나온다. 이어지는 바윗길을 오르며 투명하게 흐르는 계곡 물가에 내려앉은 가을색이 물 안을 수채화로 그려내는 계곡을 만나 익어가는 가을을 탄다.

볕 좋은 벼랑아래에서 휴식을 취하는 일행들.

계곡길이 바위로 이어지고 사람이 다닌 흔적이 없는 듯 자연 그대로인 계곡에 누군가가 가지런히 쌓아놓은 작은 돌탑이 수줍게 일행을 맞는다.

온통 바위투성이로 된 계곡을 따라 바쁜 발품을 팔기도 하고 떡갈나무 사이로 난 숲길을 가기도 한다. 가파른 바윗길을 오르니 저만치 떨어진 계곡사이로 두 번째 나무다리가 하늘에 걸려있다. 짙은 절벽사이로 난 다리에서 하늘을 우러러는 일행들의 몸짓에 카메라가 자동으로 움직인다.

파란 하늘이 붉은 단풍에 가려 가을을 시기하는 듯하다.

푸른 하늘과 회색바위, 깎아지른 벼랑에 걸린 울긋불긋한 나뭇잎, 반짝이는 물비늘을 자랑하는 계곡이 어서 오라 손짓하고 청회색 암반 사이로 흐르는 물소리에 귀가 즐겁다. 이어지는 깊은 계곡에 물가로 내려앉은 단풍이 가을풍경의 속살을 보여주며 산객들과 호흡을 같이한다.

개선문바위를 통과한 일행들이 산성계곡의 또다른 풍광에 넋을 잃는다.

출발점에서 1시간여를 올라가 팔각산등산안내판에 나오는 ‘개선문바위’에 닿았다. 예전에는 ‘독립문바위’라고 불리기도 한, 가운데가 크게 뚫린 바위가 산성계곡 최고의 볼거리로 보는 이를 압도한다. 산객들이 그 속을 지나 끝없는 계곡으로 빨려간다. 속이 훤히 내다보인 계곡물이 잔잔한 너울을 만들고 불타는 새빨간 단풍잎이 파란하늘을 가린 채 뽐내는 사이를 뚫고 바위를 넘나든다. 그간 태풍 등으로 계곡이 많이 달라져 옛 기억은 어디도 없는듯하다. 시간이 많이 지나긴 했지만 자연도 사람처럼 변하기 마련이다. 인위적인 시설이 전혀 없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몸은 고달파도 오히려 마음을 편하게 한다. 계곡 사이로 솟아 지는 가을 햇살을 받으며 붉은색 나뭇잎과 짙은 소나무와 함께 계곡바닥에 넓게 깔린 청회색 암반위로 발걸음을 옮기는 산객들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계곡길이 급경사 오르막으로 막힌다. 급한 오르막을 오르니 저만치 야트막한 양철지붕의 독가촌이 나온다. 반갑기 그지없다. 깊은 계곡을 힘들여 올라온 곳에 아직도 이런 집이 있다니 신기하기도 하고 새삼스럽다. 사람이 아직도 사는 것 같다. 가지런히 가꾸어 놓은 채소밭이며 빨랫줄에 걸린 집게가 매달려 있고 큼지막한 물탱크가 놓여있다.

집주변 감나무에 열린 감들이 노랗게 익어가고 야생동물이 들어오지 못하게 그물망도 쳐져 있다. 이곳까지 어떻게 오가는지 이해가 안 될 지경인데 아무튼 사람이 사는 것 같다. 독가촌 주변을 돌아보며 가쁜 숨을 돌린다.

하산길은 독가촌 좌측으로 난 오솔길로 나 있다. 급경사를 올라갔지만 내려 가는 길은 완만한 숲길이다. 오를 때 모르고 지나친 길이었다. 숲길을 벗어나 계곡으로 내려서는 숲에 단풍이 들어 고운자태로 배웅한다. 노란 나뭇잎과 붉은 단풍나무가 조화를 이루며 오후의 햇살을 받아 눈이 부신다. 산성계곡 특유의 청회색 암반이 넓게 이어지고 햇볕 좋은 바위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허기진 배를 달래 줄 진수성찬(?)에 넋을 빼앗긴 일행들이 즐겁게 식사를 한다. 산중에서의 먹는 재미는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그 깊이를 모른다. 꿀맛 같은 점심이다.

자연속의 쉼은 그 자체가 힐링이요, 명상의 시간이 된다. 느긋한 점심으로 나른해진 몸을 추스르며 다시 길을 걷는다. 허겁지겁 오를 땐 보이지 않던 거북등 같은 암반이 신비로움을 자아내고 청명한 가을 하늘을 담은 계곡물이 졸졸 산객을 따라 흐른다. 오가는 이도 없는 호젓한 계곡을 벗 삼아 내려서는 일행들이 ‘자연인’이 되어 하늘, 숲, 바위 그리고 계곡물과 함께 자연을 노래한다. 힘겹게 올랐다 내려서면 저절로 흥이 나고 발걸음도 빨라져 멀게만 느껴지던 ‘개선문바위’에 닿는다. 오묘하고 신기한 바위모습을 사진 속에라도 담으려는 일행들이 촬영에 정신이 없다. 선뜻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지만 아쉬움을 남긴 채 내려선다. 오를 때와 내려올 때의 가을색상이 달라 보이고 산성계곡의 아름다움 또한 다르다. 긴 터널을 빠져 나오는 듯 깊고 긴 산성계곡의 끝자락이 보인다. 첫 출발점인 산성계곡 생태공원을 둘러싼 암벽 사이로 붉게 물든 나뭇잎과 너른 옥계천이 가슴을 펴게 한다.

인간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자연이 고맙고 밉다. 이제 속세로 들어서는 속인(俗人)들에게는 일상의 무거움만 안기는 듯 아쉽고 자꾸만 선경(仙境)에서나 보던 자연을 뒤돌아보게 한다. 그래도 그게 어딘가. 오늘 하루도 서로를 아끼며 좋아하는 지인들과 자연 속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보는 것마다 비경인 자연을 무심히 흘러 보내지 않고 마음속 깊이 간직하며 살아간다면 세상은 행복한 나날이 될 수 있으련만 찍고 까부는 경박함으로 그 행복이 오래가지 못함에 늘 자연을 목말라 하는지도 모른다.

팔각산이 위치한 이곳은 빼어난 암릉미(岩陵美)를 자랑하는 여덟 봉우리와 함께 구슬이 흘러내릴 만큼 영롱하고 시원스런 물줄기의 옥계계곡이 있고 자연 그대로의 암반을 타고 흐르는 산성계곡 등 영덕에서도 손꼽히는 명승지가 다 모여 있는 곳이다. 고개 하나 넘으면 청송 얼음골이 있고 옥계천을 따라 영덕 오십천으로 흘러드는 계곡물이 너른 동해 바다로 지평을 넓혀가는 산 좋고 물 좋은 영덕 팔각산 산성계곡에서의 하루로 ‘걸어서 자연 속으로’ 열여섯 번째 ‘힐링 엔드 트레킹’ 스토리를 접는다.

김유복 경북산악연맹회장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