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윤정 안동대학교 사학과 교수
강윤정 안동대학교 사학과 교수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는 독립군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일제의 대규모 병력은 만주 한인사회를 그대로 두지 않았다. 1920년 10월 초 서·북간도로 침입한 일제의 대병력은 독립군 ‘초토화 작전’ 못지않게, 간도 한인사회 ‘초토화’에 집중했다. 이로 인해 간도의 곳곳에서 참극이 벌어졌다. 일본군이 한인촌락을 습격해서 사람들을 사살하고, 방화를 자행했던 것이다. 특히 청산리 전투에서 패배한 뒤에는 더욱 심했다. 이를 경신참변(庚申慘變) 혹은 간도참변(間島慘變)이라 부른다. 전자는 시간에, 후자는 공간에 초점을 둔 용어이다.

이때 입은 한인들의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는 명확하게 알기 어렵다. 박은식은 ‘독립운동지혈사’에서 일제의 만행이 가장 극심했던 1920년 10~11월 2개월 동안 피살 인원 3,600명, 체포된 사람이 170명, 부녀자 강간 70여 건, 불탄 가옥이 3,200여 채, 학교 41채, 양곡 소실이 5만 3,400여 석이나 되었다고 기록하였다.

그 수많은 희생자 가운데 경북인 김동만(金東滿·1880~1920, 안동)이 있었다. 그는 형이었던 일송 김동삼이 1911년 만주로 망명하자, 남은 가족들을 이끌고 그 뒤를 따랐다. 1912년 삼원포에 세워진 삼광학교(三光學校)의 교장을 맡아 교육활동을 펼쳤으며, 1910년대 중반에는 잠시 귀국하여 남은 토지를 찰아 자금을 마련하는 일을 맡기도 했다. 그 뒤 1919년 4월에 조직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서 활동하였다.

형을 대신하여 가족을 돌보며 독립운동을 이어가던 그는 1920년 11월 6일 일본군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고 말았다. 이때 유하현 마록구(馬鹿溝)에 살고 있던 12명이 함께 끌려 나와, 왕굴령(王屈嶺)이라는 고개 밑에서 무참하게 죽어갔다. 죽은 김동만의 시신이 너무나 참혹하여, 이를 목격한 아내 월성 이씨는 정신착란 증세를 보였다. 결국 남은 가족들은 안전한 곳을 찾아 북쪽으로의 이동을 선택했다.

1921년 북만주로 이동하는 계획이 갑자기 추진되면서, 집안의 참극으로 인해 미루어졌던 김동삼의 아들 김정묵과 이원일의 딸 이해동의 결혼도 다시 빠르게 진행되었다. 말이 결혼식이지 그저 머리를 올리고 비녀를 꽂았을 뿐이었다. 일행은 영하 30도를 밑도는 추위 속에서 며칠을 달려 개원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기차를 타고 하얼빈에 도착했다. 다시 목단강으로 가는 밤 기차로 이동하여 해림역에 내렸다. 그리고 다시 이동하여 영안현 주가툰에 정착했다. 그러나 그 뒤에도 이동은 계속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비단 김동삼 일가뿐만이 아니었다. 10년간 일구어 놓은 독립운동 본거지는 말할 것도 없고, 생활근거지 마저 안전하지 못했다. 어렵게 마련한 터전을 떠나, 모두가 북으로 북으로 이동하고, 흩어지는 시간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허은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경신년 일본 대토벌이 전 만주를 휩쓸어 애국지사들은 물론이고 농민들도 무조건 잡아다 학살하였다. 애국지사들은 산지사방 가족을 두고 단신으로 흑룡강성 오상현 (지금의 상지지 - 필자 주)·영안현으로 흩어졌다. 우선 봉천성을 빠져나가는 게 시급했다. 가족도 버리고 발길 닿는 대로 걸어서 도피했던 애국지사들은 얼마 후 머물 곳이 정해지면 연락을 취해서 가족들을 몰래 오라고 하였다. 우리도 왕산댁 허학 재종숙이 영안현 철령허로 오라고 하기에 또 그리로 이사하였다. (‘아직도 내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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