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동트기까지는 아직 이른 시각, 모래톱은 포화가 끝난 전장처럼 높고 낮은 무덤이 즐비하다. 그 사이로 물줄기가 흐르고 군데군데 웅덩이가 널찍하다. 흐릿한 물속에는 수많은 치어와 미처 바다로 나가지 못한 숭어 한 마리가 지친 지느러미로 제 몸을 지탱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위기에 갇혀 만조 시까지 참고 견뎌야 한다.

사주 사이의 웅덩이에 갇힌 바닷물은 모래톱으로 밀려났다가 쓸려 들기를 반복하고 있다. 때로는 높이, 때로는 낮게 오르내린다. 발등이 젖을까 봐 뒤로 물러섰다가 숭어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으려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앉는다. 물웅덩이에 갇힌 숭어처럼 나 역시 선택을 간과한 대가로 실패의 덫에 갇혀 이곳 적요한 모래톱에 서서 갑갑한 심사를 달래며 고독과 대치하고 있음이다.

지금의 바다는 밀물일까, 아니면 썰물일까, 밀물 시의 현상을 가늠해 보지만 알 길이 막연하다. 어둠 속 적막이 감도는 모래 갯벌은 미세한 생명체의 부산한 움직임이 어지럽게 감지된다. 허공을 뚫고 희고 검은 물체들이 줄지어 사주로 내려앉는다. 둘러보니 이미 수백 마리의 괭이갈매기가 사주를 점령하고 있다.

한적한 바닷가에 감당치 못할 사건이 벌어질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한다. 소스라치게 놀라 물줄기를 건너 모래언덕으로 뛰쳐나왔다. 적확히 말하면 바닷물이 나의 사위를 둘러싸 꼼짝없이 사주에 갇힐 것만 같았다. 도시에서 살아온 사람에게 일각에 물때를 알아채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헤아릴만한 전조 현상은 갈매기 떼의 등장뿐이다. 밀물 때 만선을 따라 갈매기 떼가 몰려들어 먹이를 구한다는 말을 귀동냥했기에 밀물이 시작되는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두어 시간쯤 지나 웅덩이에 갇힌 숭어가 궁금하던 차, 만조의 바다 풍경을 그리며 해안가를 다시 찾았을 때는 이미 바닷물은 징검돌 같은 섬을 넘어 아득히 수평선을 긋고 있었다. 나의 선입견은 여지없이 빗나가고 말았다. 여명을 따라 모여든 갈매기는 먼 바다를 항해한 지친 몸을 쉬기도 하고 바닷물이 채워지지 않은 모래갯벌에서 먹이를 구하기 위함이었음을 가늠할 수 있었다.

몇 걸음 물러나 시간의 틈새에 귀 기울이면 바다의 미세한 변화를 읽어낼 수 있으련만 조급증으로 진위를 간과한 어리석음은 피안에서 자신의 과오를 바라보아야만 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양 갈래 길에서 발 떼기를 망설이듯, 세상을 살다 보면 양자택일의 혼돈에 빠지는 경우가 종종 생기고는 한다. 친구와의 관계가 그랬다. 옛 친구의 애절한 간청에 여린 심성은 부정보다는 긍정으로 치우쳐 있었다.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불신이 팽배한 사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우기며 큰돈을 빌려주었다. 어설픈 동정은 여지없이 어긋나고 의기의 종국은 커다란 금전 손실로 이어졌다.

바다만이 조석(潮汐)이 있는 게 아니다. 인생에도 만조와 간조가 넘나들고 있다. 만조 시의 풍요와 안락이 지속되리라는 안일한 세월 뒤편에는 작은 실수나 오차도 가차 없이 내치는 고초의 간조가 버티고 있음이다. 나는 지금 호기만으로 버티기 힘든 차안(此岸)의 세월에 서 있다. 견뎌야 할 시간은 온전히 나의 몫이다.

평상시는 무심코 지나쳤을 모래 갯벌을 조심스레 살피며 걸었다. 시행착오를 범한 시선은 갯벌에 집중하였다. 발소리에 놀란 무언가가 작디작은 구멍 속으로 재빠르게 숨어든다. 엽낭게이다. 모래사장에는 은단처럼 작디작은 모래 경단이 각색각양의 글자를 적어놓았다. 그들만의 상형문자일까, 해독하지 못할 암호를 기록해 놓은 걸까, 분주하게 활동하는 엽낭게의 움직임을 숨죽인 채 지켜본다. 세수하듯 집게발로 얼굴을 문지르자 모래 구슬이 하나씩 생겨나는 반복된 공정이 신기하기만 하다. 수없이 뱉어낸 경단은 경계를 이루며 성을 쌓기도 하고 넓게 장애물을 설치하여 자신의 영역을 표시해 두기도 한다. 엽낭게들은 경단을 쌓으며 쉼 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모래갯벌 위쪽 모래언덕에는 신기루처럼 바닷가 식물이 초원을 이루고 있다. 좀 보리사초, 모래지치, 갯씀바귀, 순비기나무가 초원을 이루고 갯메꽃도 앙증스레 꽃을 피웠다. 척박한 모래땅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워 영토를 넓혀가는 모습은, 유목민들이 황무지를 일구어 밭을 만들고 오밀조밀 마을을 이루며 인정스레 살아가는 촌락처럼 같다. 억척스러운 삶이 신선하게 응결되어 다가온다.

파도가 밀려오며 바람을 일으키자, 해안선을 두른 곰솔림이 막아선다. 갯바람과 솔바람이 자웅을 겨루고 모래언덕의 갯그령과 띠는 까무러칠 듯 잎을 젖혀 뒤엉킨다. 그 사이로 모래알이 벌떼처럼 내려앉고 있었다. 근원지를 찾아보니 엽낭게가 모래 갯벌에 쌓은 경단이 바람결에 흩날리고 있는 것이다. 밀물이 싣고 온 모래가 갯벌에 퇴적되고, 썰물 시 바닷물이 빠져나가면 엽낭게는 유기물이 풍부한 모래를 먹고 토해 놓는다. 모래 경단은 햇볕에 건조되고 거센 파도가 밀려오자 비사가 되어 모래언덕의 나뭇가지와 풀잎에 내려앉는다. 이곳이 바다가 억겁의 세월을 수놓아 그려낸 모래언덕이다.

간조 시에도 바다는 생을 향한 몸부림처럼 역할을 감당하며 공존하고 있다. 이대로 밀물이 오지 않는다면 오랜 세월 쌓아 올린 모래언덕은 무너져 내리고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황무지가 되고 말 것이다. 바다는 밀물과 썰물을 반복하여 생태를 보전하고 있지 않은가. 삶 또한 도전과 응전을 거듭하며 살아가거늘 나는 어떠했던가, 간조의 세월을 원망하며 후회와 회한으로 자책하고 괴로워하지 않는가. 옆에서 지켜보는 아내의 심정은 오죽했을까, 아이들은 의기소침한 아빠가 번뇌를 털고 일어나기를 애타게 고대하고 있을 것이다.

모래 언덕의 초목이 자랄 수 있다 함은 밀고 쓸리기를 반복하며 끊임없이 움직이는 밀물과 썰물의 힘 때문이다. 의지할 곳 없는 어린 자식들에게 아버지는 바다와 같은 존재이다. 바다가 폭풍우에 휩쓸려 울부짖으면 불안에 떨고, 바다가 일렁이며 넘실대면 온몸으로 춤을 추는 아이들,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희망을 품고 미래의 꿈을 꾸며 행복감에 젖어드는 아이들 일 진데, 나는 스스로의 과오를 괴로워하며 가족에게 소홀한 존재로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자문자답해 본다.

바닷가에 분출한 용암은 오랜 세월 풍화와 침식을 거듭하며 기기묘묘한 주상절리를 이루기도 하지만, 엽낭게가 쌓은 작디작은 경단은 오랜 세월 퇴적되어 모래언덕을 형성한다. 삶이란, 한 줌 한 줌 인내가 쌓여 언덕이 되고 초지가 되어 생명의 원천을 이루기도 하고, 실패의 진통이 삭아 켜켜이 층을 이루고 세월에 풍화되어 색채 고운 빛을 품기도 한다. 은근과 끈기로 성찰의 빛을 발광하여 세상을 향해 반조(返照)될 때, 삶이 익음을 어찌 모르며 살아왔던가.

나는 지금, 경단이 쌓아 올린 모래언덕에서 바다가 펼친 묵언의 교과서를 읽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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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현정 기자
남현정 기자 nhj@kyongbuk.com

사회 2부 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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