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혁 학강미술관장
김진혁 학강미술관장

중국과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지기 전인 1982년에 대구의 미술가와 대만의 대중시 미술가들에 의한 한·중 국제교류전이 대만 현지에서 열렸다. 중국본토와 직접 외교관계가 성립되기 전이라 자유중국의 작가들과 대구의 소수 작가들이 참석하였다. 국제교류전이 흔치 않은 시대이기에 지역의 서예, 한국화, 서양화 등 평면미술의 작품을 선보였다. 그 시절 대만에는 국제적 명성을 가진 장대천(1899~1983)과 사종안(1907~1997)이라는 거장이 활동하고 있었다.

20세기 대만 최고의 서법대가 사종안에게 품평을 부탁하였다고 한다. “대구의 많은 작품 중에서 나에겐 해정(海亭) 홍순록(洪淳鹿)작가의 작업이 눈에 들어옵니다.” “경력이나 유명세를 넘어서 이 작가의 솜씨는 스스로 체득되어 져 일가를 이룬 것으로 생각되며 마음 가는 대로 무형의 세계를 보여줍니다.” 라고 격찬하였다고 했다.

사종안 작가는 대만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권에서는 금석학 연구와 작품성을 인정받던 국제적 명성을 이룬 작가이기에, 참석한 지역작가들에게 홍순록의 명성이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그는 현지에 가지 않아 그러한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해정 홍순록이 사군자를 그리는 모습

홍순록은 1916년 경북 고령군 우곡면에서 출생하였다. 어릴 때 선친으로부터 한학과 한의학을 지도받았다. 1939년 일본전수대 문과에 입학하여 1943년 졸업하였다. 6·25동란이 지난 1955년에 대구의 구남중학교에 미술교사로 재직하며 수채화와 유화에 관심을 가졌다. 첫 개인전은 1957년 대구 미8군 초대로 개인전을 열었다. 계속하여 유화 그림을 이어나가던 중 1960년 대 중반부터 수묵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서예에서는 당나라의 안진경 서체와 청나라 말기의 하소기 서체가 혼합된 투박하고 뭉퉁한 필획으로 자신의 성품을 닮은 서체를 선보였다. 더불어 이러한 필획을 바탕으로 행·초서체를 연구하고 변용하여 자신감 넘치는 문인화의 세계로 나아 갔다.

독학으로 이룬 자신감은 대구 매일화랑, 서울 신문회관, 출판회관 등에서의 개인전으로 이어졌다. 이 무렵에는 폭발적으로 서화의 인구가 급증한 시기였다. 그는 1979년 대구 명덕로터리에 위치한 해남병원 2층 건물에 해정 서화원을 개설하였다. 서화연구실이 생기자 하루 종일 묵향 속에서 서예와 사군자 산수화에 매진하였다. 호리호리한 체구의 해정은 평소에 품고 있던 생각을 글귀로 남겼다. “나는 대자연의 고마움을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일요일은 빼놓지 않고 그 품에 안겨 자연의 무변대함에 마음껏 취해보기도 합니다. (중략) 무수량의 자연풍경을 나의 스케치북에 담아 실사에 옮겨 보기도 합니다.” 라고 하면서 한국의 백두산과 금강산에 가지 못하는 현실이 한스럽다고 했다.

필자는 우연히 해정서화원에 가본 적이 있었고 해정서화전이 열린 전시장에도 직접 관람한 기억이 난다. 전시된 그의 작품을 보며 꾸미지 않은 소박함과 자유롭게 붓을 사용한 독창적 묵법과 필선에 아직도 여운이 남겨져 있다. 계속되어 많은 개인전과 기획전을 가진 후 1983년 가을 향년 68세로 작고하였다. 사후 유가족들은 45점의 서예, 사군자를 DAC대구문화예술회관에 기증하였다. 많은 작품의 수량을 남긴 그의 서예와 사군자가 이후 고미술화랑이나 표구사, 고물상 등에 보이며 싼값에 거래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지방 서화가로서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는 현실에 언젠가는 재조명되어 해정의 대상무형에 관한 세계가 빛을 발하기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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