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섭 경북도립대학교 명예교수

왠지 공허하고 지난날의 후회와 아련한 추억들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정년퇴임 후가 더하고 감정도 눈물도 그렇다. 나이 탓인지 아니면 다시는 못 올 지난날의 회한 때문인지 가을에는 부쩍 심하다. 가을은 참 희한하고 이토록 아름다운지 계절인지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고추밭을 정리하다가 문뜩 가을 하늘을 쳐다본다.

맑고 푸르고 높아 눈물이 핑 돈다. 뭉게구름은 정처 없이 남쪽으로 흘러간다. 구름아! 내 고향 땅 휘침산을 지나갈 때 그리운 내 임(恁)에게 덕분에 잘 있다는 안부와 이번 시제엔 증손자 재범이도 같이 가서 뵙겠다는 약속도 함께 전해 본다.

허전한 마음에 하던 일을 멈추고 집 뒤 삼막골 오솔길을 걷는다. 김대건 신부님의 유해가 지나간 일명 순교자의 길이다. 개울가에는 빨간 낙엽이 소복소복 쌓였고, 흘러간 옛 추억의 그리움도 차곡차곡 함께 쌓이며 뒹군다. 좀 남세스러운 말 같지만 공연히 외로움과 그리움이 몰려온다. 정호승(수선화에게)은 “~외로우니까 사람이다~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고 했다.

그렇다. 어쩌면 우리네 인생사가 ‘외로움과 그리움의 연속’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가을엔 내 곁을 떠나간 누군가가 한정 없이 그립고 보고파도 알량한 체면과 쑥스러움에 말 한마디 못하고 에둘러 표현하면서 살아왔다. 바보처럼 말이다.

작년에 이 길은 추일서정(김광균)을 떠올리면서 걸었다. 망명정부의 지폐, 구겨진 넥타이, 내뿜는 담배연기가 도룬 시(市)의 황폐한 가을 하늘을 떠 올리면서 걷다 보니 당시 정국이 오버랩 되었다. 조국과 정경심, 4+1과 날치기, 광화문과 서초동, 길 잃은 국회는 한 치 앞이 안 보였다. 말로는 ‘국민이 주인이다’고 해놓고 내편 네편 갈라 싸움 붙였고, 결국 내편만 주인이 된 셈이다.

세월은 흘러 또 가을은 소리 없이 깊어만 가고 있다. 작년은 올해에 비하면 속칭 ‘세발의 피’다. 윤미향과 추미애, 세금폭탄과 부동산폭등, 옵티머스와 라임의 권력형 펀드사기 등 차고도 넘친다. ‘이게 나라냐, 나라가 네 거냐’라고 도처에서 외쳐도 안하무인이다.

추미애와 윤석열의 혈투가 8개월째 난리인데도 임명권자인 대통령은 모르쇠로 일관하니 기가 찰 일이다. 오히려 싸움을 즐긴다는 말까지 회자되고 있어 더하다. 촛불정신 운운하면서 ‘나라다운 나라’를 만든다기에 혹시나 했는데 까맣게 속은 것 같아 분하다.

궤변이 진실을 묻어 국론을 분열시키고, 정의니 공정이니 민주를 앞세워 온갖 추잡한 패악을 조장하는 세력이 활개를 치는 서글픈 세상이다. 이쯤 대면 횃불이라도 들어야 하건만 침묵일색이다. 트로트 민족이라서 그런지 나라가 온통 트로트와 먹방 프로에 젖어 나랏일은 포기했는지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목숨 걸고 싸워야 할 야당은 외연 넓힌다며 남행열차 탈 생각뿐이고, 언론도 그 잘난 지식인들도 함구한 지 이미 오래다. ‘집에 불이 났는데도 제비와 참새는 안락에 취해 위험을 모른다’는 연작처당(燕雀妻黨)이나,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라는 아포리아(Aporia)도 이럴 때 쓰는 말 같다. 어쨌든 만추에 느끼는 솔직한 서정은 몹시도 황량하고 내일이 큰 걱정이다.

국가흥망(國歌興亡)은 필부유책(匹夫有責)이라 했다. 필부(국민)들이 각성할 때가 바로 지금이고, 이는 필부의 몫이다. 실기하면 공멸이고, 땅을 치며 후회한들 소용없다. 그래도 가을이다. 희망을 갖고 가을을 노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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