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김제정 작

자동차가 지중해 모텔 앞에 멈춰 섰다. 운전석에서 내리는 남자는 훤칠한 키에 이목구비가 뚜렷하다. 남자가 조수석에 여자를 안아 일으켰다.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수미는 떼쓰는 아이처럼 남자 품을 파고들었다. 발소리를 죽이며 주차장 뒷문을 통해 방으로 들어왔다. 출입문에 달린 종이 울렸다. 하이힐 소리가 로비를 지나 2층 계단으로 이어지다 멀어졌다. 시골집에 다녀온다던 수미가 아들 벌 되는 남자와 부둥켜안고 아쉬운 작별을 나눴다. 혼자된 여자가 남자를 만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어린 남자를 만나도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었다. 나는 불도 켜지 않은 채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려 누울 수가 없었다. 남자에게 업혀 온 여자가 안내 창구 앞에 토를 하지 않았다면 이불 속에서 뒤척이다 잠이 들었을 것이다. 토사물을 치운 쓰레기를 건물 밖 쓰레기통에 버리러 나가지 않았다면 남의 연애 현장을 목격할 일도 없었다.

수미는 사랑에 빠진 여자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내게 사랑이라는 감정은 낯설다. 허릿살이 두툼해지고부터 내 몸은 생활인으로서의 기능만 담당해왔다. 어리기는커녕 또래 남자조차 가까이 한 기억이 희미하다. 젊은 남자의 품에 안기는 기분은 어떤 걸까. 살을 부빌 때마다 느껴지는 단단한 팔과 다리는 어떤 기쁨을 주는 걸까. 수미는 벽에 걸린 시체꽃의 구근을 붙들고 달콤한 감정의 여운을 즐기고 있을 거였다.

이 괴상망측한 건 뭐야? 시체꽃이라는 거야. 무슨 꽃이 이렇게 멋대가리가 없어? 꼭 남자 거시기 같지? 수미가 내 옆구리를 찔렀다. 사진 속 식물의 꽃잎은 붉으죽죽한 것이 탁했으며 구근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그런 것도 같네. 꽃 보기가 하늘에 별 따기라 이 꽃 본 사람한테는 행운이 온대. 그냥 지어낸 말이겠지. 7년 만에 꽃을 피워서 고작 48시간 살다 진대. 얼마나 화끈해. 수미는 흐뭇해하며 사진을 쓸어내렸다. 이 사진 보면 밤에 잠도 안 오겠다. 모르는 소리, 밤새 저 구근을 오르느라 짜릿하다니까. 말하는 수미의 눈이 반짝였다.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는 것은 나만이 아니다. 모니터와 금고와 장부가 놓인 책상과 옷걸이. 접었다 펼 수 있는 상과 작은 냉장고, 작은 벽걸이 TV도 어둠을 뒤집어쓰고 자리를 지키고 있다. 물건들과 나는 같이 늙어가고 있다. 모텔을 리모델링할 때도 이 방은 변기 하나가 겨우 들어가는 화장실을 새로 만들어 넣었을 뿐이다.

유튜브를 켜고 누웠다. 두 남녀가 서로의 목을 감싸 안고 입술을 포갰다. 그들의 손은 서로의 몸을 더듬느라 분주했다. 외로움에 움츠러들었던 세포들이 살아난다. 화면 속 남자를 탐하는 나는 젊고 아름답다. 젊음의 외피를 쓴 나는 격정적이고 과감하다. 영상은 밤새 이어진다. 달뜬 몸과 마음은 상상 속에 머문다. 누추한 방에 혼자 누워 있는 나와 사랑하는 남자 곁에서 화사하게 웃는 내가 구분되지 않는 몽롱한 상태에서 밤이 깊어간다. 드라마 속 세상은 열려 있고 언제든 그곳으로 갈 수 있다. 안전한 그곳에서 나는 행복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남자는 앳되어 보였다. 긴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여자 아이는 더 어려 보였다. 여자 아이가 추가 요금을 내밀었다. 눈이 마주친 여자 아이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시선을 되받아치는 여자 아이의 당돌함에 먼저 눈을 돌렸다. 모텔을 나간 여자 아이가 남자 아이의 팔짱을 끼며 매달렸다. 요새 애들은 뭘 하든 당당하다. 내가 남자와 처음 모텔을 찾았던 때는 어수룩한 티를 숨기지 못했다. 남자 뒤에 서서 바닥만 보며 방까지 걸어가고 아쉬운 작별 인사는 모텔 방을 나서기 전에 나누었다. 사이를 두고 따로따로 모텔 출입문을 나서면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데면데면 굴다 각자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아버지의 눈을 피해 모텔을 드나들던 남자의 얼굴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탄탄한 팔뚝과 넓은 가슴과 깊게 패인 보조개와 부드러운 입매가 꿈결처럼 남아 있을 뿐이었다. 남자에게 약혼자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이 가는 걸 막지 못했다. 남자는 잠시 흔들리다 제자리를 찾았고 나는 등 돌리는 남자를 잡지 않았다. 약혼자에게 돌아간 남자는 행복했을까. 행복한 날은 언제나 짧게 반짝이다 사라진다. 열정 따위는 살아가는데 걸리적거릴 뿐이라는 사실이 남루한 생을 견디게 해준다. 그 뒤에 몇 번의 연애를 했지만 결혼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와 나누었던 한나절의 노곤함과 짜릿하게 조여 오던 긴장과 설렘을 곶감 빼먹듯 떠올리며 연애 감정을 대신한다. 내 욕망은 그의 보조개 속에 박제되었다.

누군가 창구 창문을 두드렸다. 열린 창문으로 수미가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언제 온 거야?

부러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새벽에. 자기 깰까봐 말 안 했어.

수미가 친근한 어투로 말했다.

수미가 출근한다며 모텔을 나갔다. 아직은 남자에 대해서 말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수미는 육 개월 전부터 지중해에 머물고 있다. 전자렌지에 들러붙은 음식찌꺼기에 기분이 상해 오랜 단골 편의점을 나와 찾아간 맞은편 편의점에서 수미가 아는 척을 했다. 여기서 일하세요? 네 사장님도 이제 여기 단골하세요. 말하는 입매가 단정했다. 통유리 너머로 보이는 그녀는 늘 분주했다. 매대 물건을 정리하거나 가게 구석구석을 닦고 빗자루를 들고 파라솔 주변을 쓸곤 했다. 싹싹하게 인사를 건네는 모습에 단골이 늘어났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선이 고운 얼굴의 그녀를 남자들이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또 다른 장기투숙객인 최씨도 수미가 근무하는 시간대에 편의점을 드나들었다. 계산대에 물건을 내려놓고 은근슬쩍 훔쳐보는 모양새가 어지간히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최씨 어때? 자기한테 관심 있던데. 한 둘이어야 말이지. 같이 일하는 황씨 말로는 모아 놓은 돈도 꽤 있는 알짜배기래. 수미는 시큰둥했다. 그러는 자기나 연애 좀 해봐. 수미가 갑자기 내게 바람개비를 날렸다. 내가 무슨. 종일 모텔에서 사는 사람이 남자를 어디 가서 만나. 마음만 있어봐. 모텔 여사장인데 누가 싫대? 아버지랑 노후 보낼 궁리로도 머리가 빠져. 연애 같은 건 꿈도 안 꾼다. 그런 게 어딨어. 죽을 때 죽더라도 사랑은 하고 살아야지. 솔직 담백한 수미가 마음에 들었다. 그 나이에 사랑을 말할 수 있는 용기가 빛나 보였다.

종소리에 출입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가 지팡이로 문을 두드렸다. 문을 당겨 아버지가 들어오도록 자리를 내주었다. 아버지는 월미 공원으로 산책을 다녀오는 길이다. 아버지가 노곤한 몸을 뉘었다. 아버지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도 창구의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바로 눈을 뜬다. 억척스럽게 살아냈던 젊은 시절의 습관이 불편해진 몸에 고스란히 남아 있어서다. 아버지가 모텔을 보는 사이 나는 은행 일을 처리하고 자질구레한 일들을 한다. 은행에서 잔돈을 바꾸고 젓갈류를 사서 집으로 갔다. 냉장고에서 총각김치와 갓김치를 꺼내 후다닥 밥을 먹는다. 세 가족이 다 같이 집에 모인 적은 없었다. 누군가는 모텔에서 밤을 보내야 했고 각자 할당된 시간에는 모텔의 금고를 지켜야 했다. 이제는 혼자 차려 먹는 밥상이 익숙하다. 굳이 손을 대지 않아도 될 만큼 집안은 깔끔했다. 몸이 불편한 아버지는 한시도 쉬지 않는다. 그악스런 부지런함이 생면부지의 타향에서 아버지가 살아남은 비결임을 잘 알고 있다. 엄마는 돈을 탈탈 털어 리모델링한 모텔에서 한 달을 채 살지 못하고 떠났다. 나는 엄마처럼 모텔과 운명을 함께 할 생각이 전혀 없다. 엄마의 삶을 닮아가는 것은 악몽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나도 모텔을 떠날 계획이다. 모텔을 떠나는 날 내 젊음을 장악했던 악몽도 끝이 날 것이다.

아버지는 모텔 앞에 버려진 쓰레기를 줍고 있었다. 몸도 불편한 노인네가 얼쩡거리면 올 손님도 가버린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아버지가 못이기는 척 방으로 들어갔다. 모니터에 방금 퇴실한 룸 번호가 깜박였다. 청소 도구함을 들고 5층으로 올라갔다. 경자씨가 침대 시트를 새로 갈았다. 경자씨는 흑룡강에서 온 조선족이다. 마른 몸에 작은 키가 성에 차지 않아 고용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경자씨는 속내를 알아챘는지 모텔에서 일했던 경험을 늘어놓았다. 손끝이 야무지고 빠릿빠릿한 것이 자신의 장점이라고 했다. 석 달이 넘는 시간 동안 경자씨는 자신의 말을 입증해 보였다. 눈매만큼이나 일처리가 야무졌다. 경자씨를 도와 욕조를 닦았다. 물에 씻겨 내린 때가 하수구로 빨려 들어갔다. 마른 수건으로 욕조의 물기를 닦아냈다. 반들반들하게 윤이 나는 욕조를 보면 잡념이 말끔하게 가시는 것만 같다.

룸을 정리하고 내려오자 아버지가 나갈 준비를 했다. 모텔 문을 열어 아버지가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아버지는 천천히 큰길가로 걸어갔다. 느리지만 흐트러짐 없는 발걸음을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해가 저물 무렵 모텔 골목은 생기가 도는 시간이다. 햇빛에 맥을 못 추던 전구들과 스크린 간판이 제 색깔을 찾아 본색을 드러내고 매끈한 자동차들이 모텔 골목을 찾아들기 시작한다. 크라우드와 궁, 러브러브와 미라클 모텔도 간판의 조명도를 높였다.

젊은 여자 애들 다섯이 지중해로 들어섰다. 두 손에 든 비닐이 묵직해보였다. 추가 인원에 따른 숙박비를 받고 5층 룸 키를 건넸다. 파티를 한답시고 밤새 떠들어대다 술병과 쓰레기만 남겨두고 떠날 이들이었다.



노래방 사장의 전화를 받고 수미가 일하는 편의점으로 갔다. 노래방 사장은 수미가 호프집 사장과 자기 돈을 들고 튀었다고 말했다. 뒤늦게 나타난 횟집 사장도 줄담배를 피워대며 쌍욕을 뱉었다. 지나가던 아주머니가 인도를 막고 서 있는 네 사람을 흘겨보며 도로로 내려섰다. 편의점 앞 파라솔이 치워져 있어 네 사람은 편의점이 접한 인도를 점령한 꼴이 되었다. 편의점은 내부공사로 어수선했다. 머리가 벗겨진 남자 하나가 바쁘게 오가며 여기저기 간섭 중이었다. 새로 바뀌었다는 주인인 것 같았다.

-그 여자가 사라진 걸 몰랐다는 게 말이 됩니까? 한통속으로 짜고 벌인 짓 아니에요?

횟집 사장이 눈을 부라리며 삿대질을 해댔다. 그의 손이 위 아래로 흔들릴 때마다 손가락 사이에 담배 불이 숨바꼭질하듯 눈앞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다른 때 같으면 악다구니를 쓰며 달려들었을 것이다. 대거리라면 진저리가 날 만큼 해봤다.

-얼굴을 보고 말하슈. 넋이 완전히 나갔구만. 지중해 사장님도 당한 거에요.

호프집 사장의 어깨가 한숨과 함께 주저앉았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수미가 사라졌다. 모인 사람들이 하나 같이 수미가 도망쳤다고 말했다. 수미가 고향 친구들과 여행을 간다며 지중해를 나선 것이 이틀 전이었다. 붙박이 몫까지 놀다 오라며 봉투를 준 건 나였다.

-지중해 사장님, 정신 차려요. 나한테 빌려간 오백을 갚는다고 한 날짜가 어제였어요. 편의점 그만둔다는 말 들어봤어요? 횟집 사장님한테 빌려간 돈은 천 만 원이래요. 이 년이 아주 작정을 하고 뒤통수를 친 거라니까.

노래방 사장이 나를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친척이나 어디 갈 만한 데 아는 거 없어요?

호프집 사장이 물었다. 나는 시골에 사신다는 수미 어머니의 이름도 연락처도 모른다. 떠나기 전날 맥주를 마시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다 누가 먼저인지 모르게 잠이 들었다. 전 남편과 사는 아들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훔치다가 이혼하고 만났던 남자 이야기를 하느라 수미의 감정이 급하게 오르내렸다. 욕망이 이끄는 대로 자신을 맡기는 그녀가 나는 신기하기만 했다.

언지라도 주었다면 찬바람이 살을 파고드는 듯한 배신감은 들지 않았을 것이다. 두 달 치 방세를 못 받은 것보다 감쪽같이 속은 것이 더 아팠다. 아이들의 비명과 귀를 찢는 음악 소리가 붕 떠 있던 의식을 깨웠다. 관람차가 느릿느릿 돌았다. 디스코 팡팡과 바이킹이 월미도 명물로 떠오르면서 평일의 대부분은 현장체험학습을 온 아이들 차지였다.

-혹시라도 우리 마누라한테는 아는 척 하지 마쇼.

횟집 사장이 다짐을 두었다. 나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모텔 골목으로 발길을 돌렸다. 중국인 관광객이 탄 버스가 스타 모텔 앞에 섰다. 왁자지껄한 소음이 한꺼번에 쏟아지며 골목이 소란스러워졌다. 크라우드와 러브러브 모텔을 지나 지중해 모텔 문을 밀고 들어섰다. 카운터 앞을 마대로 닦던 경자 씨가 대실 손님이 왔다 그냥 나갔다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열쇠를 찾아들고 202호 방문을 열었다. 수미의 방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비키니 옷장의 옷은 가지런하게 줄을 지어 걸려 있었고 늘 쓰던 컵은 커피포트 옆에 얌전히 놓여 있다. 욕실 수건걸이에 걸린 속옷도 곧 걷어줄 주인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나는 침대 위에 털썩 앉았다. 벽에 걸어놓은 시체꽃 사진이 한눈에 들어왔다. 마침내 만난 행운을 찾으러 떠난 건가. 어떤 행운이었는데 내게 알리지 않았을까. 혹여 행운이 달아날까봐 꼭꼭 숨어버린 건지도 모른다.

침대 머리맡에 그녀가 쓰던 향수와 스킨과 로션이 나란히 서 있다. 로션은 꽤 많은 양이 남았다. 당장 뭘 쓰려고. 나는 쓸데없는 걱정이나 하고 있다. 침대 밑과 테이블 가장자리와 전화기 밑까지 뒤져보았지만 메모지 한 장 보이지 않았다. 한 마디 변명이라도 남겼을 거라는 기대는 어리석었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수미의 번호를 눌렀다. 받을 수 없는 번호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매정했다. 짐은 그대로 남겨두겠다는 메시지를 찍어 전송하고 문을 나왔다.



수미가 사라진 지 일주일이 지났다. 수미에게 연락이 왔는지 확인하려는 노래방 사장의 전화가 이따금 걸려온다. 나는 습관처럼 수미에게 문자를 남겼지만 답장은 없었다.

종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창문 앞에 선 여자는 선글라스로 얼굴의 반 이상을 가렸다. 뒤 따라 들어온 남자는 수미와 있던 남자다. 곱슬머리와 흰 피부에 오똑한 코, 눈길을 끄는 키와 건장한 어깨는 쉽게 잊히지 않는다. 여자의 코는 유난히 뾰족했고 이마는 도톰했다. 선글라스로 가린 눈은 크고 쌍꺼풀이 짙을 것이다. 빨갛게 윤기가 흐르는 트렌치코트는 남자의 팔에 걸려 있고 여자는 민소매 원피스 차림이었다. 늘어진 겨드랑이 살이 원피스 밖으로 삐져나오긴 했지만 드러난 팔과 다리는 군살 하나 없었다. 여자의 몸에서 나이를 짐작할 수 있는 곳은 목이었다. 굵고 가는 주름이 여러 겹 둘러있는 것으로 보아 오십은 족히 넘어 보였다. 여자가 지갑에서 현찰을 꺼내 건네고 남자의 팔짱을 끼고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여자는 만족스러워 보였다. 그녀의 선택을 받은 남자의 얼굴에서도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사람들이 많더구나. 어서 볼 일 봐라. 아버지는 벽에 기대앉으며 말했다. 평소보다 침울한 표정으로 아버지가 창문을 바라보았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미동도 없이 앞만 보고 앉은 아버지를 보니 숨이 막혔다. 은행에 갔다 편의점을 들러 로또 20장을 샀다. 대실이나 숙박 손님 모두 서비스로 나누어 주는 로또를 좋아했다. 오 만 원에 당첨되었다며 부러 지중해를 찾았다는 손님도 있었다. 단장을 마친 편의점은 조금 생소했다. 알바를 하는 젊은 여자 아이가 상냥하게 맞아 준 것이 고마웠다. 여자 아이의 눈이 내 뒤쪽에 꽂혔다. 남자가 담배를 달라고 말했다. 여자 아이는 남자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남자가 말한 담배를 꺼냈다. 남자가 껌 하나를 계산대에 내려놓으며 싱긋 웃었다. 가로등 아래서 보았던 얼굴보다 훨씬 잘생겼어요. 맘속에 품었던 생각이 불쑥 말로 튀어나왔다. 남자와 알바 아이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되도 않는 말을 버벅거리다 편의점을 나왔다.

수미가 김밥집 알바를 하고 온 날, 캔맥주를 마시며 젊은 남자에 대해 물었다. 수미는 놀란 기색 없이 편의점 단골로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보면 만지고 싶고 같이 있고 싶어. 젊은 남자 탐내면 안 되는 거야? 아무렇지도 않게 묻던 수미 얼굴은 어린아이처럼 순진무구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해주지 못했다. 사랑타령을 하려니 촌스러웠고 선뜻 동의할 주변머리도 없었다.

편의점 앞에 남자의 차가 서 있었다. 뒤따라 나온 남자가 담배를 물었다. 아까 지중해 오셨죠? 사장님이시죠? 남자가 나를 알아보자 주책없이 설렜다. 저 혹시 이수미라는 분 아세요? 실은 수미랑 있는 거 본 적 있어요. 남자가 고개를 갸우뚱 거리다 피식 웃어보였다. 남자는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건넸다. M 클럽 로이. 혹시 수미 어디 있는지 아세요? 그 아줌마를 왜 나한테 찾는지 모르겠네요. 얼마 전에도 어떤 아저씨 둘이 찾아와서 묻더니. 돈 받으려고 그러는 거 아니에요. 정말 궁금하고 걱정돼서요. 그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몰라요. 전 함께 있을 때만 충실해요. 그 분은 고객 중 한 분일 뿐이죠. 시간 되시면 한번 놀러오세요. 남자가 차에 올랐다. 그의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 뒤통수가 따가워 돌아보니 알바가 기가 차다는 듯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창구의 작은 창을 닫고 바닥에 누웠다. 텔레비전의 드라마는 혼자 떠들고 나는 로이를 봤다는 문자를 수미에게 보냈다. 수미는 여전히 문자에 답이 없다. 모텔의 밤은 길다. 기다림은 내게 익숙하다. 무작정 손님을 기다려야 했고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려야 했다. 지루한 기다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수미가 편의점에서 돌아오는 이른 저녁이나 김밥집 알바를 마치고 돌아오는 늦은 밤은 기다림이 즐거웠다. 드문드문 창문을 두드리는 이들은 철새처럼 머물다 떠나지만 수미는 일상처럼 내게 스며들었다. 비오는 창밖을 바라보며 같이 커피를 마시고 편의점 창가에 서서 유통기한이 지난 김밥과 도시락을 먹는 일도 즐거웠다. 아버지가 모텔에서 저녁까지 드시는 날은 수미의 방 침대에 나란히 앉아 수다를 떨며 서로 발가락에 패티큐어를 해주었다. 다운받은 영화를 보며 영화관에 온 듯한 분위기를 내고 젊은 시절 짧게 다녀온 해외여행을 레퍼토리로 꺼내들며 떠날 수 없는 현실을 잊었다. 비슷한 추억과 정서를 공유하는 일상은 내게 버팀목이었다. 수미가 사라진 뒤 나의 소소한 일상이 무너졌다. 오지 않는 답장을 기다리며 밤은 더디게 흘러갔고 내 안에는 하고 싶은 말이 쌓여갔다.

복도의 등은 희미하다. 엘리베이터는 5층에 멈춰 있고 굳게 닫힌 방들이 등을 돌리고 서 있는 것만 같다. 발소리를 죽이며 2층으로 올라가 수미의 방을 열었다. 사람의 숨결이 사라진 방은 공기마저 냉랭하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모습 그대로 물건들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물건들은 하나 같이 낡았다. 보풀이 심한 스웨터와 소매 끝이 나달나달한 자켓, 버린다고 했었던 코트까지 쓰레기봉투에 넣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쓸만한 게 없었다. 수미가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이 보고 싶은 대로 보게 만들었나 보다. 매정한 년. 나는 욱하는 감정을 누르며 벽에 걸린 시체꽃 사진을 떼어 가지고 나왔다. 안내 창구 옆벽에 사진을 걸었다. 밋밋한 방에 사진만 툭 불거져 보였다. 누워서 사진을 올려다보았다. 검붉은 꽃잎이 섬뜩했다. 시체꽃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피를 토해낸 것처럼 보였다. 천장까지 닿을 듯한 구근은 불길하기만 했다. 수미는 젊은 남자를 떠올리며 밤새 음탕한 상상을 했을 것이다. 굳이 사진을 가져온 내 안의 진심을 모르겠다. 그녀의 말처럼 눈 먼 행운이라도 바랐던 것인지 혹시 모를 달콤한 꿈에 미련이 있던 것인지 알 수 없다. 등을 돌려 빈 벽을 마주했다. 괜한 생각에 감정을 소모하고 싶지 않다. 흔들리면 버틸 수 없다.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천둥소리와 함께 소나기가 쏟아졌다. 비에 젖어가는 모텔 골목을 둘러보았다. 골목은 온통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네온사인의 붉은 빛이 움푹 패여 고인 물웅덩이를 붉게 물들이고 알록달록한 전구들이 빗줄기 사이로 경박하게 깜박였다. 지중해 맞은편 클라우드 모텔 사장이 주차장 입구에서 담배를 피우며 하품을 해댔다. 곡선을 그리며 떨어진 담배꽁초가 웅덩이에 빠지며 피식 꺼졌다. 담배꽁초가 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시 불을 붙일 수 없는 꽁초가 욕망이 말라버린 나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산을 받쳐 든 아버지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집에 계시지. 갑갑해서 나왔다. 아버지는 전기장판을 켜고 누웠다. 가을이 머물 틈 없이 겨울이 오고 있었다. 아버지가 사진에 대해 물었다. 꽃이래요. 시체꽃이요. 시체가 많이 묻혔다는 거냐. 아니면 시체만 먹고 산다는 거냐. 사람도 잡아먹을 거 같구나. 아버지는 치우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예 허리를 곧추 세우고 앉아 사진을 뚫어질 것처럼 보았다. 아버지와 단 둘이 방안에 있는 것이 불편했다. 텔레비전도 두 사람 사이를 이어주지는 못했다. 나는 경자씨를 불러 수미가 머물던 방으로 갔다. 커다란 쓰레기봉투에 물건들을 담았다. 경자씨는 치우지도 못하게 하던 방에 들어가 남의 물건을 마구 버리는 나를 의아한 듯 보며 말을 아꼈다. 방안의 물건은 봉투를 채우지 못했다. 나는 아직 공간이 남은 쓰레기봉투 입구를 질끈 묶어 주차장 밖 쓰레기통에 버렸다. 봉투는 쏟아지는 비를 속수무책으로 맞았다. 한쪽으로 기운 모습이 몰매를 맞고 쓰러진 것처럼 처량했다.

아버지가 설핏 잠이 들고 나는 복도를 쓸고 있었다. 로이가 여자와 함께 들어왔다. 전에 보았던 여자와는 다르게 살집이 있어 보였다. 여자 뒤에 선 로이가 나를 보고 눈을 찡긋거렸다. 추파를 던지듯 노골적인 시선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사이 나는 계단으로 4층까지 갔다. 로이와 여자가 머무는 방 옆을 열고 들어갔다. 환기를 위해 열어두었던 창문을 닫고 커튼을 내렸다. 침대에 앉아 벽 너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방음이 허술한 벽으로 여자의 교성이 흘러들었다. 나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여자의 교성은 점점 고조되었고 로이의 거친 숨소리에 내 몸이 떨렸다. 나는 두 남녀와 함께 침대에 누워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긴장이 채 가시지 않은 적막이 이어졌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잔잔한 음악 사이로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이어졌다. 여자가 콧소리를 내며 까르르 웃어댔다. 남녀가 침대에서 나눌 법한 스킨십이 상상되었다.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기 아래서 실컷 물을 맞았다. 거울에는 욕정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메마르고 거친 몸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옆방이 조용했다. 그들이 나간 모양이었다. 나는 침대를 정리하고 방을 나왔다. 비는 그쳤지만 하늘은 여전히 어두웠다. 조심스레 계단을 내려왔다. 알바생과 경자씨는 물품보관소에서 쉬고 있을 시간이다. 소리 나지 않게 방문을 열었다. 아버지는 언제 깼는지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와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아 사진을 올려다보았다. 구근이 점점 커지며 내게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구근이 몸속으로 들어오는 환시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버지가 놀라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사진을 떼어내려 했고 아버지는 사진을 그냥 두라고 말했다. 심심한데 잘 됐지. 아버지가 사진 속에서 본 것이 무엇인지 짐작되지 않았다. 나는 모텔 밖으로 나왔다. 갈 곳이 없었다. 모텔은 대부분 가족이 운영하는 경우가 많았고 남편이나 남자 가족을 끼고 일하는 이들 사이에서 늙은 아버지와 일하는 나는 겉돌았다. 매여 있는 내가 짬나는 시간에 갈 수 있는 곳은 수미가 일하는 편의점뿐이었다.

나는 사이다를 사서 파라솔로 나왔다. 처마 아래 빗물이 튀지 않은 의자에 앉았다. 편의점과 접한 4차선 도로 건너 M 클럽 건물이 보였다. 그곳에 가면 로이를 만날 수 있다. 수미는 하루 종일 M 클럽을 바라보며 그곳에 갈 수 있는 방법을 생각했을 것이다.

-점심 드신 게 안 좋으신 가 봐요?

최씨가 컵라면과 도시락을 들고 앞에 섰다. 대답할 겨를도 없이 최씨가 맞은편에 앉았다.

-혼자 먹는 게 익숙하긴 한데 또 상대가 있으면 좋더라구요.

최씨가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눌러쓴 모자와 탁자 위에 올려놓은 빨간 코팅 장갑에 톱밥이 많이 묻어있었다.

-이 시간까지 점심도 못 먹었네요.

나는 동의의 뜻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편의점을 드나들며 수미의 환심을 사고 싶었던 최씨는 닭 쫓던 개가 되었다. 사거리에 편의점만 4군데임에도 굳이 이곳으로 온 걸 보면 최씨도 익숙한 장소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괜찮으세요?

최씨가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물었다. 그의 눈빛이 가슴께를 어루만져 주는 듯 했다. 나는 말없이 웃었고 최씨는 웃음의 의미를 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천천히 드세요.

잠깐 동무가 되어주는 게 대수냐 싶었다. 나는 하는 일에 대해 물었고 최씨는 필요 이상으로 자세하게 말해 주었다. 최씨가 답례로 커피를 사가지고 왔다. 커피를 든 양팔의 근육이 제법 탄탄했다. 커피를 얻어 마시고 최씨와 함께 지중해로 돌아왔다. 최씨는 자기 방에서 소화제까지 챙겨다 주고는 다시 현장으로 나갔다. 나는 그가 준 소화제를 마셨다. 먹을 필요는 없었지만 먹었다고 해가 될 것도 아니었다.



평소에 비해 대실 손님이 없다. 연휴 첫날 교외로 빠져나간 커플이 많은 탓이다. 지중해는 서너 개의 룸만이 손님이 들었다. 유독 파리를 날리는 날이 있다. 소독업체에 맞길 수건을 정리하고 물품 정리를 하고도 할 일이 없었다. 책상 위에 로이가 준 명함을 놓고 들여다보았다. 그에게 갈 용기가 없는 나는 명함이 닳을 때까지 버리지 못할 거였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누웠다. 그가 다시 지중해에 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로이 품에서 나는 만족스럽게 웃고 있었다. 잠이 깨고도 민망함이 가시지 않아 멍하게 앉아 있었다. 은발 신사 커플이 인사를 건네며 나갔다. 오랜 단골인 부부는 가끔씩 모텔에 들렀다. 그들은 항상 같은 룸을 원했고 숙박을 하는 경우는 없었다. 열린 창으로 불쑥 얼굴 하나가 나타났다. 최씨가 웃으며 검은 비닐봉지를 들어보였다.

-현장 근처에 새로 도너츠 가게가 열었는데 맛있어요. 제거 사다가 사장님도 드셔 보라고 몇 개 더 샀어요.

사양할 새도 없이 최씨가 봉지를 창문 안으로 밀어 넣었다. 엉겁결에 받아 봉투 안을 보았다. 크고 도톰한 꽈배기 도너츠가 따끈했다. 최씨가 꾸벅 고개를 숙이더니 방으로 돌아갔다. 꽈배기 하나를 꺼내 베어 물었다. 달콤한 설탕과 촉촉한 속살이 어우러져 입 안 가득 침이 돌았다. 갓 구워낸 빵처럼 부드럽고 기름내도 강하지 않아 두 개를 연달아 먹었다. 남은 도너츠는 아직도 따뜻했다. 믹스 커피를 타서 최씨 방을 두드렸다. 한참 만에 최씨가 문을 열었다. 젖은 머리칼에 민소매 옷을 입은 최씨는 깔끔해보였다. 종이컵을 받아든 최씨가 같이 마시지 않겠냐며 방문을 안쪽으로 당겼다. 최씨가 머무는 방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로비는 조용했다. 출입문에 달린 종이 울렸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재빠르게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 내가 최씨 방에서 나오는 걸 본 사람은 없었다. 엘리베이터는 1층에 멈춰 있었고 경자씨는 저녁을 먹을 시간인데다 알바는 일찍 퇴근을 했다. 최씨의 팔은 단단했다. 투박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손끝이 섬세했다. 방문을 두드렸을 때 두려움이나 설렘은 없었다. 몸은 자극에 솔직하게 반응했다. 팽팽하게 긴장되는 순간은 아찔했고 직설적인 쾌감에 숨통이 트였다. 우리는 조용히 옷을 입었고 나는 말없이 방을 나왔다.

바람과 다르게 로이는 지중해를 자주 들락거렸다. 매번 다른 여자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고 그가 다녀간 날마다 나는 커피를 타서 최씨 방으로 갔다. 침대 위에서 그는 현장 이야기를 했고 나는 아버지 이야기를 했다. 일회성으로 끝나는 이야기는 얽힐 일이 없었고 방을 나오는 순간 우리는 투숙객과 모텔 주인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수미는 무성한 소문을 타고 떠돌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목격했다는 이들이 있었지만 정확히 밝혀진 사실은 없었다. 최씨는 현장이 바뀌면서 지중해를 떠났다. 그가 방을 비워야 한다고 했을 때 크게 서운하지는 않았다. 그와 내게는 탐닉의 순간만 존재했다. 침대 밖에서 따로 만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은 잠버릇 정도였다. 그가 떠나던 날 내게 건넨 비닐봉지에는 생과자와 꽈배기가 들었다. 이별 선물치고는 담백했다. 그가 떠나고 없던 불면증이 생기긴 했지만 내 일상은 고요하게 흘러갔다.

장례식을 다녀온 아버지가 기운이 하나도 없다. 고향 사람이라고 하더니 꽤 친분이 있던 사람인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월미공원 안에 있는 이민사 박물관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섬 끄트머리가 나온 사진 앞에서 아버지는 상념에 빠지곤 한다. 아버지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묻혀 있는 그곳에 묻히기를 바랐다. 아버지의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공원을 가는 이유는 아버지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저 사진 말이다. 기념탑 닮지 않았냐? 저 밑에 묻힌 주검들은 다 잊혀질 거야.

나는 아버지 시선을 따라 시체꽃을 바라보았다. 높게 치솟은 구근이 무엇을 닮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큐에서 커다란 구근이 무너져 내리는 걸 보았다. 무게에 치여 스스로 부러지는 마지막은 허망했다. 구근의 꼭대기를 오르려 했던 수미는 행방을 알 수 없고 나는 꽃잎에 휘감겨 구근의 뱃속으로 떨어질까 두려워 포기했다. 아버지는 구근 끝에 매달려 내려오지 않는다. 아버지의 절망은 늙지도 않고 시간을 먹으며 버티는 중이다.

출입문을 활짝 열었다. 귀가 터지도록 볼륨을 높인 차량이 지중해 앞을 스쳐갔다. 머리칼을 샛노랗게 물들인 남자가 열린 창으로 낱장 광고지를 뿌려댔다. 가슴을 훤히 드러낸 여자들이 핑그르르 회전을 하다 바닥으로 떨어졌다.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찾아 들었다. 골목을 지나가던 남자가 바닥에 여자를 집어 슬쩍 주머니에 넣었다. 문 앞까지 밀려온 광고지를 쓸어 담았다. 모텔 골목은 수많은 시체꽃들이 피고 지는 곳이다. 언젠가 수미가 돌아오는 날 내게도 시체꽃의 행운이 찾아올지 모른다. 나는 매일 다른 오늘을 살아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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