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운과 같이 한다는 절터에는 천년왕조 흔적만이 덩그러니

천룡사 전경.

경주 남산은 금오산(해발 468m)과 고위산(해발 495m)을 합쳐서 부르는 이름이다. 천룡사지는 고위산 아래 해발 400m쯤 되는 중턱에 있다. 틈수골에서 산 정상을 보고 곧장 치고 올라가면 천룡사가 나온다. 틈수골은 길 틈새로 물이 새 나온다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비가 온 지 몇 달이 지났음에도 산으로 가는 도중 산길 곳곳에 비가 새는 천정처럼 물이 배어 나와 신발이 젖었다. 틈수골의 가을은 황락이다. 단풍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는다. 오직 ‘망명국 지폐’같이 빛바랜 갈색 낙엽이 발목까지 차오르며 겨울을 재촉한다. 피폐와 조락, 소멸만이 산을 뒤덮고 있다. 늦가을 바람은 낙엽들에게 만유인력의 법칙을 증명하라고 재촉하는 저승사자이기도 하고 단두대이기도 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칼 맞은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추풍에 낙엽이다.

경주 남산 틈수골에서 천룡사지로 가는 길은 인고의 길이다. 산행이 달갑지 않은 이에게는 그렇다. 산기슭에 조개딱지처럼 붙어 있는 사람의 집들을 지나 와룡못과 와룡계곡, 와룡계곡의 가운데 있는 와룡사를 지나면 지루한 산행이 시작된다. 오죽하면 살아생전에 수없이 이 길을 다녔을 ‘영원한 신라인’ 윤경렬 선생도 “이곳은 150m나 되는 고갯길인데 아무 변화 없는 가파른 언덕이라 뒤를 보지 말고 꾸준히 올라가야 한다. 지루함과 숨 가쁨을 참고 고원 등성 위에 마지막 발을 딛고 올라섰을 때 천상의 별유천지(別有天地)가 눈 앞에 펼쳐지니 이곳이 천룡사지다”라고 했을까.
 

천룡사 삼층석탑 뒤로 보이는 고위산 정상.

△당나라 사신 악붕귀가 천룡사에 온 까닭은?

671년(문무왕 11) 당나라 예부상서 악붕귀(樂鵬龜)가 경주 남산 천룡사에 떴다. 그는 해발 400m나 되는 가파른 길을 올라 천룡사를 둘러 본 뒤 ‘이 절을 파괴하면 나라가 며칠 안에 망할 것이다’라는 예언을 남긴 뒤 산을 내려갔다.『삼국유사』 ‘천룡사’ 조가 그렇게 기록했다.

악붕귀가 경주를 찾아온 때는 나당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시기다. 악붕귀는 왜 전쟁 중에 적국 신라를 방문했으며 산 중턱에 있는 천룡사를 찾은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은 얻으려면 ‘문호왕 법민’조를 읽어야 한다. 그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면 이렇다. 전쟁이 나자 당고종은 당나라에 머물러 있던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을 감옥에 가둔 뒤 군사 50만 명을 동원해 신라를 치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김인문이 당나라에 유학 중인 의상법사를 불러 다급한 상황을 설명했다. 의상이 귀국해 문무왕에게 보고하고 문무왕은 명랑법사를 불러 사천왕사를 짓고 문두루비법을 쓰게 했다. 당나라 군사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오다가 문두루비법에 걸려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모두 죽었다. 671년 당나라는 다시 조헌을 앞세운 5만 군사로 바다를 건너왔는데 역시 풍랑이 일어 배가 침몰하고 모두 죽었다.

천룡사지 가는 길에 있는 와룡사.

당 고종이 이게 무슨 조화인가 싶어 김인문과 함께 감옥에 갇혀 있던 박문준을 심문했다. 박문준은 ‘나라에서 황제의 만수무강을 비는 천왕사를 짓는다는 얘기는 들었으나 다른 사정은 모른다’고 시치미를 뗐다. 황제가 예부시랑 악붕귀를 보내 신라의 속내를 알아보라고 했다.

엄중한 시기에 사찰 임무를 맡은 악붕귀는 신라에 도착하자 말자 사천왕사를 찾아가 분향하겠다고 재촉했다. 사천왕사는 나당전쟁의 전쟁지휘부다. 적의 사찰단장에게 비밀병기 가득한 벙커를 보여줄 수는 없었다. 여차직하면 당나라에 있는 김인문 일행의 목숨이 날아갈 판이고 당나라가 토번에 투입했던 군대를 돌려 신라와의 전쟁에 전력투구할 수도 있을 터였다. 신라는 악붕귀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사천왕사 남쪽에 절을 하나 급조해서 만들었다. 악붕귀는 이 절이 가짜 사천왕사라는 걸 대번 알아차렸다. 다급해진 신라는 악붕귀는 금 1천 냥을 뇌물로 줬다. 악붕귀는 당나라로 돌아가 ‘신라는 천왕사를 지어 황제의 만수무강을 축수하고 있다’라고 허위보고 했다.

천룡사지 석조.

악붕귀는 얼마간 신라에 머물며 이곳저곳을 둘러봤을 것이다. 천룡사도 그중 하나다. 그는 해발 400m 산 중턱에 세워진 엄청난 규모의 절을 보고 잘 가꾸고 보존하라는 뜻으로 덕담을 건넸다. ‘이 절이 파괴되면 나라가 며칠 안에 망할 것이다’. 뇌물을 먹고 밥값을 해야겠다는 조바심이 읽힌다. 악붕귀가 천룡사를 방문했다는 기록은 천룡사가 671년 이전에 건축됐다는 사실과 외국의 주요사절이 방문할 정도로 천룡사의 위상이 높았다는 사실은 증명하는 근거다.
 

중생사 관음보살 입상.

△최제안, 천룡사를 중수하다.

『삼국유사』는 악붕귀의 천룡사 방문 기록 외에 1040년(고려 정종 6)에 쓴 내사시랑 동 내사문하평장사 최제안이 쓴 천룡사 중수기록을 담아 눈길을 끈다. 최제안은 시무28조를 쓴 최승로의 손자로 고려 태조 왕건이 직접 쓴 ‘신서(信書)’를 발견한 인물이다. 신서는 『훈요십조』의 서문에 해당하는 총 96자의 유훈이다. 최승로는 최은함이 늦게 본 아들이다. 최은함은 늦도록 자식이 없었다. 낭산 서쪽 기슭의 중생사 관음보살에게 기도를 해서 아들을 낳았는데 석 달도 못돼 백제의 견훤이 도성을 습격했다. 은함은 갓난아기를 강보에 싸서 관음보살에게 기도했다. 보살님이 주신 자식이니 죽을 자리에서 책임까지 떠맡아달라는 내용이었다. 관음보살 사자좌 밑에 감추고 피난을 갔다. 보름 뒤에 돌아와 보니 아이가 건강하게 살아 있었다. 자라면서 총명하고 슬기로움이 남달랐으며 재상까지 올랐다.

그 최승로의 손자가 최제안이다. 최제안에게는 천녀와 용녀 두 딸이 있었는데 천룡사는 두 딸을 위해 세운 절이다. 딸의 이름을 따 절의 이름을 지었다. 최제안은 중수기에 해당하는 신서(信書)에서 임금의 만수무강과 나라와 백성의 편안, 태평을 원하여 전당과 회랑 방과 주방, 창고를 일으켜 세운 후에 돌로 만든 부처와 흙으로 빚은 부처 몇 구를 갖추어 석가만일도량을 열었다고 적었다. 또 주지의 선발방식과 사찰의 토지관리 방법 등에 대해서도 소상히 적고 있어 고려시대 사찰 운영방식을 엿볼 수 있다.

천룡사는 통일신라에서 1040년 사이에 폐사되거나 크게 훼손됐다가 최제안이 중수한 이후 고려에서 조선시대의 명사들이 방문하는 명승지였다. 조선시대에는 대장경을 보관하고 경전을 제작할 정도로 사세가 높았다. 19세기에 들어 점차 쇠퇴하다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문화재청이 발간한 ‘한국의 사지 현황보고서’에 따르면 다섯 차례 발굴 조사를 통해 신라시대 외에도 고려~조선시대에 걸친 10동의 건물지와 석조불상편 금동불 청동제편 중수 시기가 기록된 명문 막새 등이 출토됐다. 일제강점기 자료는 천룡사지가 100여 년에 폐사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보물 1188호로 지정된 천룡사지삼층석탑.

현재 보물 1188호로 지정된 천룡사지 삼층석탑은 1991년 복원됐다. 삼층석탑 주변에는 석조 석등 맷돌 탑재 등이 흩어져 있다. 삼층석탑에서 고위산 정상이 보이는데 정상에서 산 아래로 길게 뻗은 바위가 천룡바위이다. 최제안이 이 바위를 보고 딸의 이름을 지었는지, 딸의 이름을 짓고 이 바위에 이름을 붙였는지는 모르겠다. 천룡사지와 계곡 하나를 사이에 두고 용장사에 머물고 있던 김시습이 이곳에 와서 ‘천룡사감구(天龍寺感舊)’라는 시를 지었고 이규보가 이곳에 머물면서 시 ‘우거천룡사유작’을 짓기도 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글·사진= 김동완 역사기행 작가
글·사진= 김동완 역사기행 작가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