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전일(前日)의 무리한 장거리 일정 때문에 비몽사몽 초저녁부터 책상 앞에서 졸고 있는데 TV에서 누군가 열변을 토합니다. “일본을 무시하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습니다. 중국은 일본을 싫어하지요(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싶어서 귀를 세워 들어보니 일본의 우키요에(浮世繪) 이야기였습니다. 몇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일본 문화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우키요에는 일본 특유의 판화 이름입니다. 일본 음식점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미인도나 무사도, 후지산 그림 같은 것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외국에서 일본을 표상하는 역할을 하는 그림들입니다. 판화이기 때문에 같은 그림을 여러 장 찍어낼 수 있습니다. 멀리 보이는 후지산을 배경으로 거대한 파도를 동적으로 묘사한 가쓰시카 호쿠사이(葛飾北?)의 그림이 대표적이라 할 것입니다. 특정 지역의 기행기록이나 신문의 삽화, 그림 달력(??) 제작, 그 밖의 상업적 용도로도 많이 이용되었습니다.

젊어서 한때 우키요에의 선명한 색채에 매료된 적이 있었습니다. 우연히 얻게 된 그림들을 책상 앞에 붙여놓고 몇 년을 보낸 적도 있었습니다. 미인도도 한 장 있었는데 여자의 화려한 머리 장식과 부드러운 뒷덜미의 곡선미를 강조한 그림이었습니다. 흐릿하지 않은 확실한 그림체와 대담한 구도, 그림자 표현이 없는 단순하고 선명한 윤곽과 미감을 자극하는 도발적인 채색이 좋았습니다. 그런 표현은 대상의 완벽한 재현이 아니라 주체의 깊은 욕망을 거리낌 없이 묘사해내겠다는 작가의 의지를 담아내는 것이었습니다(인터넷검색). 개인적으로는 그 색감에 많이 도발되었습니다. 그 그림들을 보고 있노라면 생(生)에 대한 과장된 느낌이 전이되어 절로 창작의 영감이 찾아드는 듯했습니다. 그들이 많이 사용한 딥 블루(deep blue)를 위시한 선명한 색채들은 네덜란드의 물감을 수입해 만들어낸 것이었습니다. 18세기 에도 시대에 성행한 우키요에가 19세기 유럽 인상파, 아르누보 화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치면서 자포니즘(Japonism)이란 일본 붐을 일으켰던 것도 이해가 됩니다. 특히 반 고흐의 우키요에 사랑은 유별났다고 하는군요.

‘우키요’(浮世)라는 말은 본디 부박한 세상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키요에는 우리의 단원이나 혜원이 보여준 풍속화의 일본판입니다. 지금의 도쿄에 해당하는 관동의 에도나, 관서의 오사카, 교토 등지의 이곳저곳에 퍼져있던 현대풍의 새로운 문화들을 많이 그리고 있습니다. 혹자는 이 말의 유래가 똑같은 발음의 다른 말인 ‘우키요’(憂き世) - 즉 ‘근심어린 세상’이라는 주장도 펼칩니다. 화려한 그림의 이면에는 불교의 극락정토와 대비되는, 꺼리고 멀리해야 할 근심스럽고 걱정스러운 세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런 의미라면 우키요에는 단순한 풍속화가 아니라 일종의 세속성화(世俗聖畵)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부질없는 속세를 선명하고 아름답게 그리는 것은 일종의 종교적 역설일 수도 있겠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는 너무 일본을 무시합니다. 무시한다는 것은 회피의 다른 말입니다. 오래 전 <일본은 없다>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배경에도 그런 집단적인 회피심리가 있었습니다. 필요 이상의 견강부회식 일본 폄하나 지나친 반일 민족주의도 염려스럽습니다. 일본은 그렇게 만만하게 볼 나라가 아닙니다. 우키요에 하나만 봐도 그렇습니다. 전통도 알고 문화도 있는 나라입니다. 불행한 과거 기억에만 사로잡혀 상대를 회피해서는 안 됩니다. 똑바로 알고 불철주야 노력해서 따라잡고 넘어서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 후손들에게 살 만한 나라를 물려줄 수 있습니다. 때를 놓치면 안 됩니다. 바야흐로 세계는 거대한 전환기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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