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리며 여자의 시선을 피했다. 눈을 감고 자는 체 하는 것보다는 더 자연스러워 보일 것이다. 여자는 뒷좌석으로 가지 않고 나를 한참동안 노려보다가 버스가 속력을 높이자 뭐라고 구시렁거리며 뒷좌석으로 갔다. 나는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젠장! 빈자리가 많았다. 어림잡아 좌석의 절반은 비어있었다. 여자는 중간쯤의 자리에 앉으면서 눈을 부릅뜨고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얼른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살짝 화가 났다.

서른다섯인 내가 운전석 바로 뒤의 노약자석에 앉은 것은 물론 잘못이다. 그러나 여자도 이제 겨우 50대 중반 정도로밖에 안보였다. 노약자석에 앉은 젊은이를 굳이 일으켜 세우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할 나이는 아니었다. 내 자리 옆에 서서 나무라는 듯한 눈빛으로 노려보는 태도는 과했다. 더군다나 나는 지금 누가 보더라도 병색이 완연한 모습이다. 얼굴은 핏기 없이 창백했고, 짧게 깎은 머리칼 사이로 한 뼘 정도의 길이로 꿰맨 자국이 선명했다.

나는 한 달 전, 회사 앞의 건널목을 건너다 빨간불을 무시하고 달려오는 5톤 화물트럭에 치였다. 내 몸은 우지끈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가 아스팔트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곤 줄곧 혼수상태로 있다가 조금 전에 깨어났다. 병실이 너무 깜깜해서 처음에는 한밤중인 줄 알았다. 벽을 더듬어서 문을 찾아 열고 복도로 나갔을 때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복도는 형광등 불빛이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고, 오가는 사람이 없었다. 계단을 올라가서야 내가 지하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병원의 1층 로비에는 사람이 많았고, 벽시계는 오후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잠시 우두커니 서 있다가 내가 처음 입원했던 2층의 병실을 떠올리고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내가 어떻게 그 병실을 알고 있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혼수상태로 있을 때도 나는 병실에서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를 간헐적으로 듣곤 했었는데, 아마 그때 병실의 위치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아내와 의사의 이런 대화를 나는 생생하게 내 귀로 들었다.

의사가 아내에게 내 상태를 설명했다.

“두부 외상으로 운동기능과 의식이 정지된 상태입니다.”

아내가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되나요?”

“대뇌피질은 손상이 되었지만 뇌간은 작동을 하고 있어 호흡 및 소화 기능과 심장 박동 기능은 유지됩니다.”

“회복 가능성은요?”

“10년 이상 무의식 상태로 있다가 깨어나는 사람도 있고, 합병증 등으로 완전한 사망에 이르기도 합니다.”

“제 남편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척추 손상까지 된 경우라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그렇게 희망적이지는 않습니다.”

무의식의 허허벌판을 걸으면서 들려오는 이런 말들이 마치 남의 이야기처럼 들렸다. 기쁨이나 슬픔, 희망이나 절망의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반드시 살아야겠다는 절박감도 없었다. 그저 무작정 걷고 또 걸을 뿐이었다. 걷는 그 자체가 목적인 듯이.

처음 입원했던 병실을 굳이 찾아간 이유는 입원할 때 입었던 옷과 신발이 그곳에 있다는 것이 기억났기 때문이었다. 병실을 옮기면서 아내가 옷과 신발을 못 챙겼다고 하는 말을 어렴풋이 들었었다.

2층의 병실은 4인실이었지만 텅 비어 있었다. 병실을 옮긴 것이 불과 몇 시간이 되지 않아서 병상 위에는 내가 쓰던 수건이나 가습기가 그대로 있었다.

병상에 걸터앉아서 몸의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모든 것이 정상이었다. 손상되었다는 척추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 수술을 한 뇌도 꿰맨 자국이 보기 흉할 뿐 통증은 없었고, 생각하는데도 아무 지장이 없었다. 더 이상 병원에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었다. 병상 옆 사물함을 여니 교통사고를 당할 때 입었던 옷이 그대로 걸려있었다. 그날은 면바지와 점퍼의 캐주얼차림이었는데 다행히 찢어진 데도 없이 깨끗했다. 구두도 병상 밑에 있었다. 나는 환자복을 벗고 사복으로 갈아입고 구두를 신었다. 지갑과 휴대폰 등의 소지품도 주머니에 그대로 들어있었다. 지갑 속의 신용카드와 돈도 그대로였다. 휴대폰은 배터리가 방전이 되어서 먹통이었지만 그거야 충전을 하면 되니 큰 문제는 아니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병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내가 있었던 2층의 병실은 ‘중환자실’이라는 명패가 붙어있었다. 하긴 트럭에 정면으로 부딪혔으니 가벼운 부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적막했던 병실 안과 달리 복도는 분주했다. 링거대를 밀면서 천천히 걸어가는 환자와 바쁜 듯이 종종걸음으로 병실을 드나드는 간호사들. 얼굴 전체를 붕대로 감싼 어린 환자가 누워있는 병상을 남자간호사가 밀면서 지나갔다. 열 살 정도 되는 여자아이는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훌쩍였고, 엄마로 보이는 젊은 여자가 입술을 꼭 깨문 채 그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라갔다. 아이 엄마의 호주머니에서 과자봉지가 툭하고 떨어졌다. 아이가 먹다 남긴 것인 듯 꾸깃꾸깃 뜯겨진 입구로 스낵 몇 조각이 내장처럼 쏟아져 나왔다. 링거대를 지팡이 삼아 걸음을 옮기던 허리가 굽은 노파가 과자 조각들을 밟아 으스러뜨렸다.

나는 과자봉지를 주워서 아이 엄마에게 돌려주려던 것을 포기하고 복도 중간쯤에 있는 간호사 스테이션으로 갔다. 그곳도 분주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진통제를 더 달라며 화를 내는 환자를 달래느라 쩔쩔매는 간호사, 전화기를 들고 뭔가를 열심히 보고하는 간호사. 그중에서 컴퓨터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간호사에게 물었다.

“중환자실에 입원했던 박재욱이라는 환자입니다. 퇴원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간호사가 나를 한번 힐긋 보더니 아무 대답도 없이 다시 컴퓨터로 시선을 돌렸다. 머쓱해진 나는 조금 더 목소리를 높였다.

“간호사님, 퇴원하려고 하는데요.”

간호사가 이번에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화가 나서 하마터면 스테이션에 있는 연필꽂이를 간호사에게 집어 던질 뻔 했다.

“퇴원 수속 어디서 해요?”

20대 초반의 젊은 여자가 내 옆에서 간호사에게 물었다. 플라스틱 컵의 냉커피를 빨대로 쪼르륵 쪼르륵 빨면서.

“1층 수납창구에서 하시면 되요.”

내겐 무표정했던 간호사가 얼굴 가득 웃음을 담고 친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최근 나에게 반복 되던 상황이었다. 모두가 행복해도 나는 행복하지 못하고, 모두가 함께여도 나도 외톨이. 언제부터인가 나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나 혼자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갑자기 의기소침해져서 스테이션에서 몇 발짝 뒤로 물러났다.

냉커피 여자가 긴 머리를 나풀거리며 아래층으로 향했다. 나는 그 여자의 뒤를 따라 갔다. 여자가 1층 퇴원 수속 창구에서 번호표를 뽑아 차례를 기다렸다. 나도 여자의 뒤 번호표를 뽑아서 기다렸다. 이윽고 여자가 차례가 되어 창구에서 퇴원 수속을 밟은 후에 나도 창구로 갔다.

“박재욱 환자, 퇴원 수속을 밟으려고 하는데요.”

창구의 여직원은 나를 한번 힐긋 보더니 컴퓨터로 뭔가를 확인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나를 무시하고 대기자들을 향해 소리쳤다.

“다음 분, 327번. 327번 오세요.”

내 번호표는 326번이었다. 퇴원 수속 창구에서조차 나를 따돌리는 것인가? 어이가 없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그러다가 문득 아내가 미리 수속을 밟았을 가능성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는 가끔 내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와 관련된 일을 처리하곤 했다. 아내에게 물어보려고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다가 배터리가 방전된 것이 생각나서 도로 넣었다. 다른 사람의 휴대폰을 빌리려고 두리번거리다가 하나같이 냉담한 표정에 포기했다. 그리고 창구에서 물러났다. 패배자처럼. 외톨이처럼.

병원은 회사 근처인 양재동에 있었다. 대학병원 부속의 대형 종합병원이어서 환자와 방문객들로 늘 붐볐다. 병원 문을 나설 때까지 수많은 사람들과 마주쳤지만 아는 사람은 없었다. 한 달 만에 혼수상태에서 기적적으로 깨어난 내가 퇴원을 하고 있지만 나는 여전히 사람들의 관심 밖이었다. 씁쓸했다.

병원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회사가 있었다. 아직 퇴근 전이니 직원들이 근무를 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나타나면 어떤 반응들을 보일까? 환호성을 지르며 축하를 해줄까? 아니면 눈이 가로등만큼 커지면서 놀랄까? 놀라기는 하겠지만 축하를 해줄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겉으로야 축하를 하겠지만 진심은 아닐 것이다. 그들은 은근히 내가 교통사고로 죽기를 바랐을지도 몰랐다. 그러면 골치 아픈 문제인 나의 거취가 단번에 해결될 수 있을 테니까. 최근 회사에서의 내 위치가 그만큼 불안했다.

오늘은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첫날이다. 기분을 완전히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회사는 내일 가도 늦지 않다. 오늘은 그냥 나 혼자서라도 생명을 다시 얻은 것을 축하하고 싶었다. 그 환희와 감격을 마음껏 누리고 싶었다.

아내와 내가 동거하는 아파트는 사당동에 있었다. 버스로 30분쯤 걸리는 거리. 나는 승용차를 이용하지 않고 버스를 이용해서 출퇴근을 했다. 혼자서 갇힌 공간에서 운전을 하기 보다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출퇴근을 하고 싶었다. 그렇게 해도 사람들과 긴밀한 관계가 형성되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경우는 외로움과 단절감을 더 크게 느낄 때도 있었다. 하지만 대중교통 이용을 계속했다.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버스가 지하철 방배역 근처의 정류장에서 멈췄을 때 70대 후반의 나이가 들어 보이는 할아버지가 승차했다. 할아버지는 내가 앉은 자리 근처에서 걸음을 멈추고 나를 한참 동안 노려보았다. 둘러보니 다른 노약자석에는 사람들이 모두 앉아 있었다. 그중에는 나보다 젊은 사람도 있었지만 할아버지는 유독 내 자리를 탐냈다. 조금 전에 50대 여자가 내 자리를 노릴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비어있는 다른 노약자석이 없었고, 또 노약자석에 앉을 권리가 있는 노인이었다. 더 이상 버티고 있을 수가 없어서 일어서려고 하는데 할아버지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면서 뒷좌석으로 갔다.

사람들의 시선이 따갑게 뒤통수에 와서 꽂혔다. 할아버지에게 노약자석을 양보할 걸 미적거리다가 기회를 놓쳤다는 자책감이 들었다. 나는 결국 두 정류장이나 앞서서 버스에서 내렸다. 걸어서 집으로 가면서 거리가 마치 혼수상태 때 걷고 또 걸었던 무의식의 벌판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말소리와 차 소리 등 거리의 소음들이 혼수상태에 빠진 나를 두고 의사와 아내가 나누었던 대화처럼 공허하고 아득했다.

사당동의 집은 15층짜리 아파트의 맨 위층이었다. 아파트 문을 열자 무의식의 벌판에 서 있던 나무와 바위처럼 희미한 윤곽의 소파와 탁자, 텔레비전과 장식장이 흠칫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좀 더 분명하게 이곳이 나의 공간임을 확인하려는 의도로 전등의 스위치를 켰다. 실내 전체가 혼수상태에서 깨어나듯 환하게 밝아졌다. 왠지 낯선 느낌이었다. 불과 한 달 사이에 나의 체취가 많이 사라져버렸다. 누군가 나를 노려보면서 자리를 비켜달라고 무언의 압력을 넣고 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속으로 항변했다. 이곳은 명백하게 나의 집이고, 나는 이 집의 주인이다. 나는 병사들을 집합시킨 지휘관처럼 거실을 천천히 둘러보며 구석구석 시선을 묻혀놓았다.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되었다.

나는 거실 전체를 한 번 더 눈으로 훑은 뒤 내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방문을 여는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종이상자 안에 회사에서 쓰던 내 물건들이 고스란히 들어있었던 것이다. 노트, 파일, 필기구에 수건까지. 내가 혼수상태에 빠지자 나를 내쫓으려고 안달이던 회사가 퇴사 처리를 한 모양이었다.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온갖 수모를 참고 일했던 회사인데 이대로 순순히 물러설 수는 없다. 무엇보다, 나는 혼수상태에서 깨어났다. 그러니 다시 회사에 나가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내일 이 종이박스를 그대로 들고 회사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침대에 드러누웠다. 방 안의 모든 것이 한 달 전과 똑 같았다. 휴지통의 덮개가 덜 닫힌 채 비뚜름히 얹혀 있는 것이나 책장의 책 하나가 덜 꽂혀서 툭 튀어나온 것까지. 원래 서재로 쓰던 방에 1인용 침대를 들여놓은 것이라 비좁았지만은 나와의 대화를 거부하지 않는 지구상에서 유일한 나의 공간이었다.

아내와 나는 1년 전부터 각자 다른 방을 쓰고 있었다. 아내는 안방을, 나는 서재방을. 그러니 내가 안방에서 서재로 거처를 옮겼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었다.

아내와 나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동창이었고 고등학교를 건너 뛴 후 같은 대학교를 다녔다. 나는 상대 경제학과였고 아내는 법대 법학과였다. 초등학교 때는 집이 나란히 붙어 있어서 6년간 등하교를 같이한 단짝이었다. 워낙 어릴 때였으니 연애의 감정이 있을 리는 없었지만 곧잘 남자친구, 여자친구라고 서로를 소개하곤 했었다. 그러다가 중학교에 올라가서는 때로는 벤치에 앉아서 손을 꼭 잡고 장래를 약속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서로 다른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에는 특별한 이유도 없이 자연스럽게 멀어졌었다. 그러다가 대학교 1학년 때 교정에서 우연히 만났다. 그 후로 남자사람친구와 여자사람친구로 연인인 듯 친구인 듯 가깝게 지냈다.

아내는 고시원에 처박혀 고시 공부를 했는데 계속 떨어졌다. 내가 군대를 갔다 온 후에도 아내는 여전히 고시 공부에 매달린 채 낙방 횟수를 늘려가고 있었다. 대기업 입사에 실패한 나는 곧바로 목표치를 낮춰 지금 다니고 있는 완구회사에 취직을 했다. 그리고 아내에게 프러포즈를 했다. 고시 낭인의 삶에 지쳐있던 아내는 나의 프러포즈를 받아들였다.

뜨거운 감격은 없었지만 별다른 불만도 없는 결혼생활이었다. 아내의 배웅을 받으며 출근하고, 때로는 마트에서 카트를 같이 밀면서 찬거리를 사서 요리를 해서 먹고, 어깨를 맞댄 채 텔레비전 프로를 보면서 키득거리는 그 시간들이 나는 좋았다. 그러나 아내는 달랐다. 아내에게는 이루지 못한 소망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결혼 2년이 지났을 때, 아내는 고시에 다시 도전했다. 나는 최선을 다해 아내의 공부를 뒷바라지 했다. 결혼 5년차가 되었을 때, 아내는 마침내 사법고시에 합격을 해서 대형로펌에 변호사로 취직을 했다. 그때부터 아내와 나 사이에 크고 작은 갈등과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사실 균열과 갈등은 결혼 초부터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아기였다. 나는 빨리 아기를 갖기를 원했지만 아내를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 문제로 몇 번 다투면서 아내가 고시 공부에 대한 미련 때문에 출산과 육아를 주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시에 합격하면 아기를 가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참았다. 그러나 고시에 합격한 후 아내는 더욱 완강한 태도로 임신을 거부했다. 변호사 활동이 우선이라는 것이었다. 배신감을 느낀 나는 아내를 거친 언사로 비난했고 곧잘 격렬한 싸움으로 번지곤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원래 명랑하고 적극적이었던 아내의 성격은 변호사 활동을 하면서 더욱 사교적이고 외향적으로 변했다. 화려하고 럭셔리한 것을 좋아했다. 마트에서 카트를 밀면서 장을 봐서 음식을 해먹기 보다는 고급 음식점에서 식사하는 것을 선호했다. 반면에 나는 여전히 내성적이고 소박한 성격 그대로였다. 다툼이 잦아지면서 대화가 줄어들었고 같이 보내는 시간이 급감했다. 어느 순간부터 아내는 집에서 음식을 만들지 않았다. 그러다가 식사도 하지 않았다.

결혼 7년차가 되었을 때부터 아내는 ‘사랑이 없는 결혼은 위선이며 죄악’이라는 말을 자주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서로 다른 방을 쓰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위암 말기로 투병 중인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정식으로 이혼을 하자고 ‘통고’를 했다. 아내가 나와의 언쟁을 거부하면서부터 나는 아내와의 관계에서 무기력해지기 시작했다. 화를 내면서 거친 말을 내뱉는 나를 싸늘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돌아서면 나는 주체할 수 없는 패배감을 느끼곤 했다.

처음 몇 번은 그런 아내를 강제로 돌려세우면서 무슨 말이든 해보라고 다그치다가 아내가 경찰에 가정폭력으로 신고를 하는 바람에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강제로 돌려세웠을 뿐이고, 강제로 방으로 들어가지 않게 했을 뿐인데 폭력이라니. 내 말을 들은 경찰은 ‘가정 폭력은 특별히 엄하게 처벌하니 조심하라’는 충고를 하면서 훈방을 했다. 이후로 아내에게 있어서 나는 투명인간이었다.

아내와의 관계가 비틀리면서 다른 모든 관계도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친가 및 처가와의 교류가 뜸해졌고, 각종 동창 모임에 발길을 끊었고, 회사에서도 이런저런 일로 따돌림을 당하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처음에는 내가 남들을 멀리했는데 어느새 남들이 나를 멀리하고 있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얼핏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아내가 귀가하는 소리에 잠이 깼다. 시계는 밤 9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방안은 캄캄했다. 비록 방안에 내가 있는 기척을 내지는 않았지만 현관에 내 신발이 있으니 내가 귀가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병원에서 법적으로는 아직 혼인 관계인 아내에게 나의 퇴원을 알렸을 수도 있다. 어쨌든 현관에 내 신발이 있으니, 내 방의 문을 열어보고 내가 있는지 없는지는 확인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아내는 그대로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한 달 간의 혼수상태에서 깨어나 집에 돌아온 남편의 존재를 확인하지도 않고. 아무리 지금 서로 불편한 사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친구로, 연인으로, 부부로 지내온 사이인데 이럴 수가 있나. 분노가 나를 휘감았다.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당장 아내 방으로 달려가서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고 따질 작정이었다.

방문을 열었을 때 아내의 방에서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실은 불을 켜지 않아서 어두컴컴했다. 아내의 울음소리는 점점 커져갔다. 나는 아내의 방으로 쳐들어가려던 것을 포기했다. 아무리 그래도 우는 사람에게 화를 내면서 비난을 퍼부을 수는 없다.

방문을 닫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아내가 우는 이유를 생각해보았다. 실연을 했나? 피식 헛웃음이 나왔다. 이름뿐이지만 남편이 있는데 실연이라니. 아마 변론을 맡은 사건에서 패소를 했을 가능성이 가장 컸다.

지난해 9월 초, 아내의 생일 때 꽃다발을 들고 아내의 로펌이 입주해있는 서초동의 빌딩 앞으로 간적이 있었다. 어떻게든 아내와의 관계를 회복하려고 노력하던 때였다. 주차장에 아내의 승용차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 정문 옆의 주차장 출입구 앞에서 아내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아내의 차가 나타나면 그 앞을 막고 꽃을 내밀 계획이었다. 그리고 아내의 차를 같이 타고 미리 예약을 해둔 한강변의 근사한 스카이라운지에서 저녁을 먹으며 쌓인 갈등과 오해를 푸는 것이다.

그런데 아내는 주차장이 아니라 빌딩 정문으로 걸어 나왔다.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달랐지만 그래도 꽃을 들고 아내를 향해 걸음을 뗐다. 하지만 이내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 아내는 혼자가 아니었다. 옆에 남자가 있었다. 나도 안면이 있는 대학의 같은 과 3년 선배로 로펌의 선배 변호사였다. 그 선배 변호사는 아내의 어깨를 다정한 손길로 다독이면서 귓속말로 속삭이기도 했다. 아내의 얼굴은 매우 침울했다. 좋지 않은 일을 겪은 아내를 달래주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이 매우 다정해보였다. 보통의 관계가 아닌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몸을 숨긴 채 그들의 뒤를 밟았다. 그들은 근처의 지하 카페로 들어갔다. 마침 그들이 앉은 자리 바로 뒤에 칸막이로 가려진 빈자리가 있어서 그리로 가서 앉았다. 귀를 기울이니 그들이 나누는 대화가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들렸다.

“그 사람들은 무죄가 분명해요. 판사가 유죄로 선고한 건 잘못된 거예요.”

아내의 목소리였다.

“내가 봐도 그래.”

선배 변호사의 목소리였다.

“제 능력이 이것밖에 안되나 회의가 들어요. 선배, 어쩌면 좋아요.”

“항소심에서 이기면 돼. 미영이는 그럴 능력이 충분히 있잖아.”

아내가 변론을 맡은 재판의 1심에서 패소한 모양이었다. 선배 변호사가 상심한 아내를 위로하는 자리였다. 그런데 유 변호사도 아니고 유미영 씨도 아니고 미영이라니. 남자가 아내를 부르는 호칭이 귀에 거슬렸다. 그래서 그들이 나누는 대화에 계속 귀를 기울였다.

술이 취하자 아내는 훌쩍거리며 흐느꼈다. 재판에 진 것을 속상해하면서. 남자가 아내의 옆자리로 가서 아내를 감싸 안으며 위로했다. 나는 당장 그들의 자리로 달려가 고함을 지르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카페를 나왔다. 그날 이후 아내를 대하는 나의 태도도 눈에 띄게 냉랭해졌다.

아내가 흐느끼는 소리가 그날의 불쾌함과 배신감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그만 울어라고 고함이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혼수상태로 병상에 누워있는 것이 나을 뻔 했다. 잠도 오지 않았다. 괴롭고 고통스러운 밤이었다. 도로에 나가서 달리는 차에 다시 치일까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마음속으로 수없이 아내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해가 뜨기 전 새벽 어스름에 사무용품들이 든 종이상자를 들고 집을 나섰다. 아내와 마주치기 싫어서였다. 첫차를 타고 양재동의 회사에 갔다. 이면도로에 있는 아담한 3층 건물의 회사, ‘엔젤완구’는 아직 잠이 덜 깬 모습이었다.

나는 근처의 구조변경 중인 빌딩의 계단에 앉아서 회사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그때 휴대폰이 생각났다. 충전 후 열어보지 않고 아침에 주머니에 넣고 나왔었다. 휴대폰을 꺼내 열어보았다. 첫 화면에 뜬 시간은 아침 7시 5분이었다. 전화와 문자를 확인했다. 혼수상태에 빠진 한 달 동안 전화가 7건, 문자가 12건 와 있었다. 전화는 대출 회사 3건, 신용카드사 고객센터 2건, 휴대폰 판매업체 1건이었다. 문자는 역시 대출 안내 6건, 온라인 쇼핑몰의 상품 안내 4건, 시청의 안전 안내문자 1건, 공연 안내 문자 1건이었다. 개인적으로 의미가 있는 곳에서 온 전화나 문자는 1건도 없었다.

이면도로는 출근하는 사람들이 차츰 많아졌다. 누구도 커다란 종이상자를 들고 건물 계단에 앉아 있는 내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모두 자기 갈 길을 바쁘게 걸어 갈뿐이었다.

7시 20분쯤 되자 경비원이 회사의 문을 열었다. 나는 상자를 들고 회사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 50대 후반의 정문 경비원은 잘 아는 사람이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놀라는 표정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나를 보고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예상대로 바뀐 것은 하나도 없었다. 교통사고를 당하기 전과 똑 같았다.

나는 경비원과 인사를 나누는 것을 포기하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석 달 전부터 나의 사무실이 된 지하 주차장의 물품 보관 창고로. 지하 1층과 2층은 주차장인데 지하1층 구석에 회사의 비품들을 보관하는 3평정도 크기의 창고가 있었다. 회사는 나를 퇴직시키기 위해 갖은 협박과 공작을 하다가 내가 쇠심줄처럼 버티자 창고 관리라는 없었던 보직을 새로 만들어서 지하로 내려 보냈다. 이유 없이 나를 해고하면 노동청에 고발하고, 회사의 잘못을 언론에 알리겠다는 나의 경고에 대한 회사의 대응이었다. 회사는 노동청에 고발하는 것은 별로 겁내지 않았지만 회사의 잘못을 언론에 알리겠다는 대목에서는 겁을 냈다.

엔젤완구는 이천에 제조공장을 갖고 있는 중견 완구제조 회사였다. 유아와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공갈젖꼭지, 모빌에서부터 장난감 자동차, 봉제 인형 등 많은 종류의 장난감을 만들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원가를 절감하기 위해 값싼 중국산 플라스틱과 도료의 재료를 수입하기 시작했는데 이게 문제였다. 중국산 도료에 기준치를 초과하는 납 성분이 들어있었다. 중추신경장애를 유발할 수도 있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또 플라스틱 원료에서는 프탈레이트 가소제, 카드뮴 등이 기준치를 상당히 초과해서 들어있었다. 역시 신장과 호흡기 장애와 내분비계 교란 등의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는 위험 수준이었다. 자체 안전 검사팀의 조사를 통해 밝혀진 사실인데도 회사는 쉬쉬하면서 수입을 계속했다.

검사팀 직원을 통해서 우연히 조사 결과를 입수한 나는 즉각 중국산 재료의 수입 중단을 건의했다. 생산 비용이 조금 더 들더라도 국산 재료를 쓰자고 주장했다. 자재과의 한상문 과장이 이런 나를 주저앉히려고 협박 공갈을 했다. ‘있지도 않은 사실을 떠벌려서 회사에 손해를 끼치지 마라. 그러다 다친다’는 것이 요지였다. 내게 그 사실을 알려준 검사팀의 직원도 ‘그런 조사 결과는 없다’면서 딱 잡아뗐다.

자재과의 직원들뿐만 아니라 다른 부서의 직원들, 심지어는 경비원까지 나와 대화를 하는 것을 피했다. 점심도 같이 먹지 않았다. 나는 회사에서 차츰 고립되어 갔다. 아내와 서로 투명 인간처럼 지내기 시작할 무렵 회사에서도 나는 투명인간 취급을 받았다. 자재과 관련의 어떤 업무도 내게 주어지지 않았다. 눈총을 받으며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 있다가 퇴근하기 일쑤였다.

회사를 떠나면 6개월 치의 월급을 위로금으로 주겠다고 해도 싫다며 버텼다. 그렇다고 완구 재료의 문제점을 당국에 고발하는 것도 왠지 싫었다. 내 자리에서, 내 힘으로 완구 재료의 문제점을 해결하고 싶었다. 그러던 중 회사에서 나를 지하 주차장 창고로 보냈다. 그때부터 나는 진짜 유령인간이 되었다. 출근을 해도 누구 하나 나와 눈을 마주치거나 얘기를 나누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창고의 비품을 정리하면서 내가 맡은 역할을 해내려고 애를 썼다.

그렇게 석 달을 힘겹게 보내다가 회사 앞 횡단보도에서 트럭에 치이는 사고를 당한 것이었다. 회사는 혼수상태에 빠진 내가 당연히 죽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내 짐을 챙겨서 집으로 보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서 다시 출근을 한 나를 보면 얼마나 속이 상하고 골치가 아플까. 무엇보다 나를 무지막지하게 괴롭힌 한상문 과장의 반응이 궁금했다.

오전 9시. 모두 출근했을 시간이다. 나는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하고 2층에 있는 자재과로 향했다. 자재과 사무실을 문을 열고 한걸음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개선장군처럼 우뚝 서서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반가워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놀라기는 할 것이라는 내 기대가 어긋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모두 나를 힐긋 쳐다보고는 교통사고가 나기 전처럼 그냥 무시해버렸다. 정말 너무들 하는군. 비정한 인심이야. 한 달 간이나 혼수상태에 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왔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나는 서류를 검토하고 있는 한상문 과장에게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한 과장은 자기 앞에서 걸음을 멈춘 나를 한번 힐긋 보더니 검토하던 서류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나는 소리쳤다.

“과장님,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한 과장이 대답 대신 서류에서 눈을 떼고 팔짱을 낀 채 나를 보았다.

“저는 아직 엔젤완구 직원입니다. 그동안 회사에 못나온 것은 병가로 처리해주십시오. 그리고 전 계속 근무하겠습니다.”

한 과장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을 하기 싫을 때 하는 한 과장 특유의 행동이었다. 그것은 긍정을 뜻하는 몸짓이었다.

“저는 우리 엔젤완구가 반드시 제대로 된 재료를 쓰게 할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한 과장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직원들이 힐끔힐끔 한 과장과 나를 곁눈질로 보았다. 뭔가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직원들을 노려보다가 자재과를 나와서 다시 지하 1층의 내 사무실로 갔다.

낮 12시. 점심시간. 교통사고를 당하기 전에도 점심시간이 항상 곤혹스러웠다. 점심시간만큼은 나를 투명 인간 취급하는 직원들과 부딪히기 싫었지만 희한하게도 회사 근처의 어느 식당에 가든 엔젤완구 직원들이 반드시 있었다. 그들의 쑥덕거림과 조롱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밥을 먹으면 소화도 잘되지 않았다. 그 불쾌한 감정을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았다.

회사 근처에 있는 작은 공원으로 갔다. 편의점에서 빵과 우유를 사서 먹을까 생각하다가 공원 구석에 라면자판기가 있는 것을 보았다. ‘간편하게 맛있게 먹는 끓인 라면’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라면을 끓여 주는 자판기도 있구나. 참 편리한 세상이야. 나는 자판기에 천원 권 3장을 넣은 후 ‘조리 시작’ 버튼을 눌렀다. 몇 분 후 네모난 알루미늄 호일에 라면이 끓여져서 나왔다. 그것을 들고 공원 구석진 곳에 쪼그리고 앉아서 먹으니 맛이 기가 막혔다. 소풍을 나온 기분이었다. 식당에서 회사 직원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먹는 것보다 훨씬 좋았다. 앞으로 점심은 이 자판기로 해결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면자판기 옆에 있는 커피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들고 회사의 내 자리로 돌아왔다. 여느 때처럼 사무실에는 퇴근시간까지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누가 내게 업무를 지시하지도 않았다. 그냥 투명 인간처럼 조용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무의미한 회사 생활을 해야 하나 고민하면서 의자에서 일어섰다. 잠시 그냥 우두커니 서 있었다. 집에 가도 투명 인간 노릇은 여전하다. 사무실을 문을 열고 거리로 나가고 싶은 마음도 별로 없었다. 물론 회사에 남아 있고 싶은 마음도 없었지만. 그야말로 진퇴양난이다.

그때 아내가 내 휴대폰으로 문자를 보냈다. 흔치 않은 일이었다. 나는 서둘러 아내의 문자를 읽었다.

‘당신이 지금 내 앞에 꽃을 들고 서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얼마나 슬퍼하는지 당신은 모를 거야. 알 수가 없겠지.’

아내는 내가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서 퇴원한 것을 알고 있었다. 어젯밤에 모른척한 것은 쑥스러워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자신이 미워서 그렇게 서럽게 흐느꼈을 것이다.

‘내가 얼마나 슬퍼하는지 당신은 모를 거야. 알 수가 없겠지.’

아냐. 알고 있어. 어젯밤 당신이 흐느끼는 소리를 다 들었어.

‘당신이 지금 내 앞에 꽃을 들고 서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 꽃을 들고 갈게. 지금, 당신의 회사 앞으로. 당신이 집에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싫어. 지금 바로 꽃을 들고 갈게.

나는 근처의 꽃집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꽃을 사서 버스를 타고 아내의 회사 앞으로 갔다. 아내가 퇴근하기를 기다렸다. 예전 아내의 생일 때 꽃을 들고 기다렸듯이.

얼마 후 아내가 나왔다. 예전 그때처럼 주차장이 아니라 빌딩 문을 통해서. 그리고 그때처럼 아내 옆에는 바로 그 선배 변호사가 있었다. 그는 아내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있었다. 이럴 수가! 내게 그런 문자를 보내놓고는 다른 남자와 저렇게 다정한 모습이라니.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꽃을 집어 던지고 그들의 뒤를 쫓았다.

그들이 들어간 곳은 예전의 바로 그 지하 카페였다. 어떻게 이렇게 그때와 똑 같을 수가 있을까. 혹시 아내가 내게 굴욕감을 안겨주기 위해서 그런 문자를 보내놓고 보란 듯이 하는 행동이 아닐까?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아내와 그 변호사는 예전의 그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나도 예전의 그 자리, 그들이 나누는 대화가 들리는 칸막이로 가려진 바로 뒷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떠날 줄은 몰랐어요. 다시 살아날 줄 알았어요.”

아내가 울먹이면서 말했다. 이게 무슨 말인가. 나는 분명이 이렇게 살아있는데. 대체 누구를 대상으로 하는 말인가?

“너무 슬퍼하지 마. 미영이는 최선을 다했어. 한 달 간 회사도 휴직하고 그 친구 간호를 했잖아.”

회사를 휴직하고 나를 간호했다고? 아내가?

“남편이 떠나고 나니 제가 그 사람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겠어요. 그 사람이 그렇게 제게 모질게 대했지만 그것조차도 이젠 그리워요.”

“먼저 다가가지 그랬어.”

“무서웠어요. 그 사람의 차가운 눈빛, 거친 말이 견디기 힘들었어요. 선배 말이 맞아요. 그렇더라도 제가 먼저 다가갔어야 했는데......지금 그게 가장 후회돼요.”

“지난 일은 항상 후회하지.”

“오늘 그 사람 휴대폰으로 문자를 보냈어요. 사랑한다는 말을 쓰고 싶었는데, 그 사람이 하늘나라에서도 노려보는 것 같아서 그 말은 못하고 다른 말을 썼어요.”

“남편이 살아 있었다면 다시 사랑을 회복할 수 있었을까?”

“모르겠어요. 남편이 살아 있었을 때는 일초에도 사랑과 미움이 반복됐어요. 제가 제 감정을 감당하지 못했어요.”

“남편이 죽었기 때문에 사랑을 다시 확인한 셈이네.”

“그 사람이 보고 싶어요. 그 사람의 얼굴을 보면서 사랑한다고 한번이라도 말하고 싶어요.”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아내를 향해서 소리쳤다.

“바보야, 난 죽지 않았어! 네 문자를 받고 꽃을 사왔어!”

그때 누가 내 팔을 잡아당기며 자리에 앉혔다. 검은 양복에 검은 셔츠, 검은 넥타이를 맨 얼굴이 창백한 신사였다.

“당신은 누구요?”

검은 신사가 조용히 말했다.

“당신을 저 세상으로 데려갈 저승사자야. 서류에 착오가 있어서 하루가 늦었어.”

나는 아내에게 보였던 격렬한 반응과 달리 차분한 음성으로 물었다. 어느 정도 짐작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확하게 언제부터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내가 죽은 것이 아닐까? 이 세상에 없는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었었다.

“내가 정말로 죽은 것입니까?”

검은 신사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죽은 게 맞아.”

궁금한 것이 있어서 검은 신사에게 물었다.

“낮에 공원 자판기에서 라면도 사서 먹었는데요?”

“그건 허상이야. 누구나 자기만의 허상의 세계를 갖고 있어.”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자세히 설명을 듣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내 관심은 온통 아내에게로 쏠려 있었다.

“아내가 나를 사랑하고 있는 줄은 까맣게 몰랐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지. 안타까운 일이야.”

“그런데 꼭 저 세상으로 떠나야 합니까? 이런 모습으로 그냥 여기 머물면 안 될까요?”

“왜?”

검은 신사가 갑자기 이유를 물으니까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잠시 머리를 굴렸다.

“죽었다고 하지만 살았을 때와 별 차이가 없잖아요. 살았을 때도 지금처럼 비슷하게 있는 듯 없는 듯 했으니까 굳이 저 세상으로 갈 이유가 없을 것 같아서요.”

“그래서 저 세상으로 안가겠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좀 더 분명한 이유가 있으면 몰라도.”

검은 신사의 말에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흐느끼는 아내를 선배 변호사가 안고서 달래고 있었다. 아내에게 미안하다는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사실 내 목소리를 아내에게 들려줄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말을 진짜로 할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권영갑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졸업
패션저널 제작이사
드라마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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