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윤정 안동대학교 사학과 교수
강윤정 안동대학교 사학과 교수

1919년 그 뜨거웠던 독립의 열망과 결실은 1920년 청산리 전투로 귀결되었다.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결실은 아니었다. 수많은 누군가의 목숨과 노력이었다. 한편 이어지는 간도참변은 새로운 고난의 서막이기도 했다. 역사의 어떤 자락도 종결은 없다. 그저 넘어야 할 산 하나를 넘었을 뿐이었다. 넘는 것은 어렵지만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기도 하다.

여기저기서 찢기고 갈긴 한인사회도, 독립군도, 가야 할 길을 두고 고민하고 갈등하는 시간이었다. 그 사이에서 자신의 선택과는 무관하게 만주로 왔던 소년·소녀들이 성장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지난주에 소개한 이해동과 김정묵이다. 오늘은 또 다른 사람 허은과 이병화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그 밖에도 숱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이는 다음 기회로 남겨두고자 한다.

석주 이상룡의 손자 이병화(李炳華·1906~1952)는 여섯 살 나이로 만주로 왔다. 성장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항일투쟁의 물결 속으로 걸어갔다. 1915년 만주로 온 허은(許銀·1907~1997) 역시 아홉 살 어린 나이였다. 호적에는 1909년생으로 되어 있지만, 망명 당시 실제 나이는 아홉 살이었다. 간도참변 이후 북으로 북으로 이동했던 허은 일가는 1921년 영안현 철령하(지금의 흑룡강성 목단강시 양명구)에 간신히 거처를 마련했다. 이병화 일가는 길림성 화전현으로 옮겨갔다.

가을 무렵부터 두 사람의 혼사가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이때 허은의 나이 겨우 열여섯이었다. 두 집안 사이의 혼인은 처음이 아니었다. 4~5년 전 허은의 재종숙인 허국(왕산 허위의 넷째 아들)이 이후석(이상룡의 손녀)과 혼인하였다. 이들에 이은 두 번째 혼인이었다.

두 사람의 혼인은 여정부터 고난의 시작이었다. 허은의 회고에 따르면 “무려 2천 800여 리 길”이었다. 부산에서 신의주 거리와 맞먹는 거리이다. 기차로 하얼빈까지 와서 장춘으로, 장춘에서 다시 길림으로 이동했다. 마차 타고 걷기를 반복하며 얼어붙은 길을 걷고 또 걸었다. 허은은 그 길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후 그 운명에 맞서 꿋꿋하게 살아갔다.

운명이라는 것이 아마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항일투사 집안에서 태어나 항일투사 집으로 시집간 것도 다 운명이었던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나라의 운명 때문에 한 개인의 운명도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이천팔백리 먼 길은 내 시집가는 길이요, 앞으로 전개될 인생길의 험난함을 예고하는 길이기도 했다. 조국의 운명이 순탄했으면 그리 되었겠는가? - ‘아직도 내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중에서

만주에서 성장하여 독립운동가의 아내가 된 그는 독립운동가의 역할을 기꺼이 수행하였다. 서로군정서 대원들의 의복 제작과 음식 제공, 각종 회의 지원을 도맡았으며,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지원하며, 후방 역할을 담당했다. 이 또한 만주지역 독립운동의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역할이자, 독립운동의 한 부분이었다. 또한 그가 남긴 회고록 ‘아직도 내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는 만주 디아스포라와 여성들의 역할, 그리고 항일투쟁사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기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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