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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가작] 한희주 '말남이'
[소설 가작] 한희주 '말남이'
  • 경북일보
  • 승인 2020년 11월 22일 16시 37분
  • 지면게재일 2020년 11월 23일 월요일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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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첫걸음마를 떼듯 법원 계단을 내려오는 말남의 호흡이 거칠었다. 주름진 오른손에 꼭 쥐고 있는 종이가 걸음에 맞추어 팔랑거렸다. 법원은 죄를 짓지 않은 사람도 마치 죄를 지은 것처럼 초조하게 만드는 묘한 중압감이 있어서, 말남은 내가 몰라서 지은 죄가 있으면 어떡하지 고민하며 몇십 년에 걸친 지난 세월을 반추해보았다. 발목에 추를 단 듯,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거웠다. 종이를 쥐지 않은 손으로는 무릎을 누르며, 남의 다리인 양 건조하게 제 발끝을 응시했다. 마치 짐짝이나 되는 듯 다리를 번갈아 끌어 내리듯 걸었다. 세월은 건조해서 무릎은 자꾸만 뻣뻣해지고 있었다.

말남은 자신의 허리가 굽은 이유는 목에 주렁주렁 달린 것들 때문이라 믿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주머니나 가방에 있어야 할 물건들이 하나둘씩 목으로 자리를 옮겼다. 처음은 휴대전화가, 그다음에는 돋보기안경이 마지막은 교통카드였다. 외출할 때마다 말남은 이것저것 목에 걸기 바빴다. 이내 목에 걸린 물건들이 저들끼리 부딪쳐 요란한 소리를 낼 때쯤엔 제 딸인 옥희를 불러다 앉혀놓고, 내가 무신 개새끼도 아니고 하며 한탄을 했다. 옥희는 별말 없이 조막만 한 교통카드를 다시 사와 선 말남의 휴대전화에 걸어주었다. 결국엔 조삼모사로 이러나저러나 목에 걸린 것은 매한가지였다. 엄마는 그냥 말로 하면 되지, 왜 꼭 화를 내노. 하며 눈을 흘기는 옥희는 못내 섭섭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 말에 말남은 조용히 시선을 옮겼다. 왠지 섭섭한 것은 자기 자신이라 생각했다.

말남은 계단을 두세 개쯤 남기고 더 내려가는 것을 포기하며 주저앉았다. 오늘부터는 더위가 한풀 꺾인다더니 초가을도 드센 햇빛 앞에서는 별수 없는 듯했다. 눈꺼풀이 늘어져 잘 떠지지 않는 눈으로 말남은 법원 앞 작은 공원을 둘러보았다. 등나무 아래 벤치에서는 남자 몇이 모여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담배 연기는 남자들 머리 위에서 이리저리 나풀거리다 흔적없이 날아가 버렸다. 희미하게 자신에게까지 풍겨오는 담배 냄새에 말남은 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봤으나, 주머니에 잡히는 거라고는 자그마한 동전 지갑이 전부였다. 아주 잠시 말남은 담배도 목에 걸고 다녀야 하나, 생각했다. 목에 거는 것에만 집중하니 주머니에 뭔가를 넣어야 한다는 사실을 자꾸 잊어버렸다. 쟁반 위에 재떨이와 놓여있을 담배 생각이 유난히 간절했다.

왼손으로는 햇볕을 가리고, 오른손으로는 종이를 바라보았다. 말남의 얼굴과 닿을 듯이 바짝 갖다 댄 종이에는 개명신청서라고 쓰여 있었다. 말남은 ‘개명신청서’라는 단어를 계속 중얼거리며 머릿속에서 되뇌었다. 실은 이름을 바꾸겠다는 생각은 살아가며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말남은 제 이름에 어떠한 애착도 한도 없었다. 생긴 대로 살아야지 하는 생각이 머릿속 한 귀퉁이에 똬리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그것은 이따금 독사처럼 눈을 치켜뜨고 저를 바라보다가, 허튼 생각이라도 한다 싶으면 대가리를 쳐들고 입질을 해댔다. 깨물린 곳에는 형편이니, 나잇값이니 하는 것들이 들어차 피가 돌 때마다 혈관을 따라 돌았다. 손끝에 열이 몰려도 연필을 잡지 않아도 되는, 갖은 핑계를 댈 수 있는 좋은 구실이었다.

끝 말 자에 아들 남 자를 쓰는 자신의 이름은, 애초부터 제 것이 아니었다. 그 이름의 첫 주인은 태어나지도 않은 상상 속의 아들이었고 두 번째 주인은 태어난 지 며칠 되지 않아 죽어버린 얼굴도 모를 언니의 이름이었다. 노름에 미쳐선 처자식은 죄다 섬에다 두고 육지에만 있던 제 아버지는 말남을 보자마자 첫 끗발이 개 끗발이다. 막걸리를 들이켜며 웃었다고 했다. 말남의 아비는 첫 끗발에 아들을 걸었고, 뒤이어 줄줄이 태어나는 자식들의 이름을 순남이, 해남이, 영남이 같은 이름만 지어주다 생을 마감했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도 말남을 보며 개 끗발, 개 끗발 하다가 이내는 빈 호주머니 대신 말남을 노름에 걸었다. 그때 아비가 무슨 패를 쥐었을지는 모를 일이나, 어쨌든 개 끗발이었으니 남의 집 종살이를 했겠거니 생각했다.

말남은 어째서 자신이 죽은 언니의 이름을 물려받아 살아야 하는지 이유를 묻지 않았다. 어째서 죽어버린 언니의 사망신고를 하지 않았는지도 묻지 않았다.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자신의 삶보다 두 살 더 많이 살았다. 말남이 실로 하고 싶었던 말은, 제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가 아니라 나는 절대 아비처럼 살진 말아야겠다는 다짐이었다. 말남의 인생에는 출석부도 없었고, 그러니 매일같이 이름을 불릴 일도 별로 없었다. 밭에서 호미질하고 있으면 딸램아 하는 소리가 그게 저를 부르는 소리임을 알았다. 처음 보는 아줌마의 손에 이끌려 종살이를 하게 되었을 땐 남아 집에 팔려간 년이라고 폰니라 불렸다. 그 이름이 억울했던 것도 십 년, 이십 년이었다. 세월은 우습게 흐르고 과거에 매달리기엔 언제나 눈을 떠 내일을 맞는 것이 가장 무서운 삶이었다.

개명신청서를 반으로 한 번, 또다시 반으로 한 번, 그리고 한 번 더 접은 후에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반듯하게 접기 위해 움직이는 손은 조금 떨렸으나 또 경건했다. 말남은 계단에서 일어나 주머니 위를 툭툭 쳤다. 종이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허리에 손을 올리고 느리게 남은 계단을 내려왔다. 말남이 사는 고개 마을에서 법원까지는 버스로 한참 걸렸다. 직통으로 가는 버스도 없어, 중간에 한 번 갈아타야 했고 돌아가는 길은 어째 더 버겁게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갈수록 가파른 고개와 좁은 길을 곡예 하듯 넘어가는 버스는 정차할 때마다 한숨 쉬듯 매연을 뿜으며 몹시도 덜컹거렸다. 말남은 느릿하게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다가 법원 입구 옆에 놓인 벤치에 다시 주저앉았다. 방금까지 누가 담배를 피우다 갔는지 은색 쓰레기통에서 뿌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말남은 목에 걸린 폴더폰을 열어 문자 버튼을 눌렀다. 육십 년이 조금 넘는 시간을 까막눈이로 살아오다, 몇 개월 전부터 한글 교실을 다니기 시작했다. 옆 강의실에서는 박수 소리와 함께 트로트가 들리기도 했고, 고개 숙이세요, 고개 젖히세요. 하는 요가 하는 소리도 들렸다. 말남은 저 나이 또래의 사람들과 마주 앉아선 기역, 니은, 디귿, 리을을 소리 높여 따라 했다. 돋보기안경을 끼고서 연필을 움켜쥐어 보았다. 연필 쥐는 법을 제대로 배운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말남이 볼펜을 드는 날은 새해 전 은행에서 받아온 달력에 동그라미를 치는 날 뿐이었다. 남편이 죽고 나서도 버릇처럼 챙기는 시댁 제사들이 여전히 달력 위에 선명했다.

문자를 쓰는 방법도 한글 교실에서 배웠다. 버튼을 누를 때마다 튀어나오는 뜻 모를 글자를 보면 구분할 새도 없이 폴더를 사정없이 닫았다. 그리곤 도로 열고 단축번호만 꾹 눌렀다. 일 번은 언제나 옥희의 자리였다. 달력에 표시되지 않는 유일한 날은 옥희의 생일이었다. 그 날이 되면 달력을 보는 것 대신, 일 번을 꾹 누르고 옥희가 무슨 일이냐 묻기도 전에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말했다. 오늘, 배가 우리하이 아파가 전화했는데 미역국은 끓이 묵었나.

말남을 한글 교실에 보내준 것은 옥희였다. S구에서 단과 학원 강사로 일하고 있는 옥희는 대학교에서 국문학을 전공했다. 딸은 절대 대학에 보내지 않겠다던 남편의 뜻을 굽히고 어렵사리 보낸 대학이었다. 옥희는 대학을 졸업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제 남편을 만났고, 곧장 결혼식을 올렸다. 지금 일하고 있는 단과 학원의 원장이 바로 옥희의 남편이었다. 처음에는 한글도 모르는 말남을 옥희가 직접 가르치려고 했다. 하지만 일주일에 두 번 자신을 찾아와 글을 가르쳐 주기로 한 옥희는 그 약속을 자주 어겼다. 말남이 전화를 걸면 바빠서, 혹은 정신이 없어서 하고 핑계 아닌 핑계를 댔다. 옥희가 오는 것보다 오지 않는 날이 더 잦아지자, 말남은 더 옥희를 재촉하지 않았다. 그리고 약속을 어긴 지 한 달이 조금 더 지나 옥희는 말남을 근처 동사무소에서 운영하는 한글 교실에 데려다주었다. 여기가 엄마에게 더 좋을 거라고 했지만, 말남은 옥희에게 정말 그 이유가 전부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아무래도 문자를 보낼 수 없겠다, 말남은 단정 지었다. 어쩌면 그저 일 번을 꾹 눌러 옥희에게 전화를 걸던 때가 더 좋았었다는 생각을 했다. 말보다 글이 더 편할 때가 많았지만, 말로 할 이야기와 글로 할 이야기를 구분하지 못하던 때가 마음은 더 편하지 않았나 생각했다. 천천히 벤치에서 일어나니 내리쬐는 햇볕 아래 너무 오래 앉아 있었는지 등허리가 축축했다. 말남은 느릿느릿 걸으며 법원 정문을 빠져나왔다.

말남은 정류장에 내려서 아파트 단지 쪽으로 걸어갔다. 말남의 집은 아슬아슬하게 재개발 구역에서 제외되었다. 비좁은 골목길은 이 집 옥상에서 저 집 옥상으로 뛰어갈 수 있을 만큼 붙어있었고, 간밤에 어느 집 양반이 술을 먹고 들어왔는지 알 수 있을 만큼 가까웠다. 아파트 단지 뒤를 살짝 돌아 길을 따라 밑으로 내려가면 세 개의 골목이 따로 시작해 중앙에서 한 번 만났다가, 다시 갈라졌다. 그 아래에 옹기종기 모인 집들도 이번에 재개발 구로 선정되어선 집마다 담벼락엔 온갖 현수막 걸려 휘날리고 있었다. 반대한다는 말도, S구 사람들의 땅 투기를 금지한다는 말도, 보안 씨씨티비가 더 가열 차게 돌아가고 있다는 말도 한 데 모여선 부는 바람에 퍼덕이기만 했다.

골목 제일 위 작은 언덕 아래의 집이 말남의 집이었다. 단층 짜리 작은 주택이지만, 뒤의 자그마한 밭까지 모두 말남의 땅이었다. 말남은 그 밭에서 배추도 키우고, 상추도 키웠다. 가진 땅이 제법이라 재개발되었으면 아마 자신도 S구 근처에 살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와서 우짜노, 아깝긋다 하면 아, 마 내는 여가 젤로 조용해서 좋다 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매일 같이 흙을 만져 거칠어진 손톱은 자꾸 부러지기 일쑤라 말남은 아침마다 매니큐어를 겹겹이 손톱에 발랐다. 손등처럼 바싹 마른 매니큐어 군데군데의 칠이 벗겨져 있었다. 말남은 그 손으로 얼굴을 쓸어냈다.

문을 잠그고 다니지 않아 열쇠를 꺼낼 필요도 없었다. 말남은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갔다. 주방 겸 거실에 방 두 개가 달린 집이었다. 그 중 아직 이불을 개지 않은 오른쪽 방이 말남이 자는 안방이었다. 말남은 제일 먼저 목에 주렁주렁 달고 있는 것들을 죄다 방문에 박힌 못에 걸었다. 아침부터 일어나 정신없이 준비해 밖에 나갈라치면, 자꾸 한 둘을 빼먹는 것이 일쑤였기에 나중엔 눈에 띄는 곳에 아무렇게나 대충 못을 박고는 들고 나가야 할 것들을 죄 걸기 시작했다. 그 뒤엔 펼쳐진 이불 위에 털썩 앉아 머리맡에 둔 쟁반을 끌어당겼다. 재떨이 뚜껑을 열고 담배를 빼내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며 한 모금 크게 빨아 당기며 집에 왔다는 안도감에 크게 숨을 내쉬자, 코와 입으로 담배 연기가 쏟아지듯 퍼졌다. 그러면서도 이제 어떤 버스가 어디로 가는지 누구에게 물어보지 않고, 직접 노선표를 읽고 갈 수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벅차올랐다.

걸어서 삼십 분이면 한 바퀴를 빙 두를 수 있는 섬에서 뭍으로 나온 지 자그마치 오십 년이었다. 그러나 말남의 반경은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집에서 밭으로, 다시 집으로. 가끔은 육지에서 돌아올 때마다 동생을 하나씩 만들고는 사라지는 아비를 보면서 섬 바깥엔 뭐가 그리 재미있는 게 많아서 그렇게 나돌아다니나 궁금해하기도 했다. 깜깜해 아무것도 없는 밤이면 먼 자락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를 들었다. 별로 그리울 것 없던 섬을 떠나오는 길엔 섬 뒤편 바다에 거품처럼 깔린 몽돌을 하나 집어 주머니에 넣고 왔다. 그 돌은 어디 갖다 버렸는지 이젠 찾아낼 수도 없었다. 말남은 하, 하고 작게 웃으며 담뱃재를 털었다.

도시가 이렇게 넓었다. 좁은 길을 두르고 둘러 가는 버스에 실려서 말남은 생각했다. 일부러 개명신청서를 가지러 법원까지 간 것도 그 때문이었다. 말남은 언제나 지하철만 탔다. 딱딱한 의자에 가만히 앉아서는 나오는 안내 음성을 듣고 비릿한 바다 냄새를 맡는 것이 길을 찾는 유일한 방법인 탓이었다. 한글 교실에서 넌지시 개명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제 이야기를 들은 젊은 강사들은 인터넷에서 서류를 뽑아드리겠다고 이야기했지만, 말남은 직접 개명신청서를 가지고 오고 싶었다. 이상하게 그래야만 할 것 같아서였다.

말남은 주머니에 있는 개명신청서를 꺼내 펼치지 않고 그대로 좌식화장대 서랍에 집어넣었다.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엉덩이를 당겨 이불 위에 다시 앉으면서 생각했다. 그대로 누워서 배게 위에 머리를 갖다 대자 기다렸다는 듯 잠이 밀려들었다. 말남은 그대로 누워 이불을 끌어 덮었다. 그러자 어떤 이름으로 개명할지 생각해 둔 게 있냐 묻던 젊은 강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남은 곧장 잠에 빠졌다.

말남이 한글 교실에서 가장 처음 쓴 단어는 옥희였다. 자신의 이름 김말남보다 더 먼저 쓴 글자가 이옥희다. 옥희의 이름은 말남이 처음으로 돈을 주고 지어본 이름이었다. 말남의 이름을 짓는 것에 큰 관심이 없었던 아버지처럼, 말남의 남편 역시도 첫째로 태어난 옥희의 이름은 지어줄 생각도 하지 않았다. 대충 미숙이 아니면 영숙이로 지어 버리라며 화를 내던 남편 몰래 말남은 푼푼이 모아둔 돈으로 철학관에 가서 옥희의 이름을 지었다. 한자도 한글도 읽지 못하는 말남 때문에, 철학관 김도사는 이름에 번호를 매겨 하나하나 발음해주어야 했다. 말남은 그 앞에서 최선을 다해 일 번부터 오 번까지 이름을 외웠으나, 집에 와서 떠오르는 이름은 옥희뿐이었다. 애초에 옥희로 점찍어 두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옥희라는 이름만 생각해서 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옥희가 된 말남의 큰딸은 제법 공부를 잘했다. 말남은 그런 옥희를 여상에 보내지 않겠다고 해서 남편에게 두들겨 맞았고, 옥희는 공장에 취직하지 않겠다고 해서 두들겨 맞았다. 옥희를 대학에 보낸다고 했을 때는 말할 것도 없었다. 벌이도 시원찮은 남편 대신 말남이 일했다. 채소를 내다 팔고, 식당에서 음식을 했다. 그렇게 옥희는 남동생들도 가지 못한 대학을 혼자 나왔다. 그러고는 졸업하자마자 시집을 가게 되었다. 말남은 결혼식장에서 하염없이 울었다. 이상하게도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말남은 옥희에게 늘 기대를 품고 있었다. 옥희의 이름을 거듭 부를 때마다 묘한 감정이 속에 피어올랐다. 그래서 말남은 자주 옥희를 불렀다. 사소한 일부터 모두 옥희에게 묻고, 옥희의 결정을 따랐다. 옥희는 자라고 또 늙어가면서 제 일만으로도 벅찼지만, 자주 전화를 걸어 결정을 기다리는 말남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옥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자주 말남이 귀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옥희가 그런 티를 조금이라도 내면 말남은 소리부터 내질렀다. 옥희의 생각이 곧 자기 생각이라 믿고 살아가는 말남은 옥희가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것을 조금도 두고 보지 못했다.

말남은 잠에서 깨어 이불을 걷고 일어나 앉았다. 눈가가 축축했다. 옥희가 결혼식을 하던 날의 꿈을 꾸었다. 가끔 그 꿈은 기다렸다는 듯 말남을 찾아왔다. 깨어난 말남은 한숨도 쉬지 않고, 욕도 하지 않았다. 그저 주름진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오른쪽 눈꺼풀이 자는 사이에 더 늘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말남은 고개를 들어 시계를 확인했다. 한두 시간 정도 잔 듯했다. 말남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문 앞에 걸린 휴대전화와 돋보기를 내려 가지고 왔다. 말남은 앉고, 일어설 때마다 앓으며 바람 소리를 냈다. 손에 쥔 휴대전화의 폴더를 열어 문자 버튼을 눌렀다. 그리곤 키패드를 하나하나 힘주어 누르며 옥희에게 문자를 보냈다. 쌍자음이나, 특정 모음을 잘 누르지 못한 탓에 엉성한 문자가 만들어졌지만, 대충 알아볼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오늘 집에 오라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옥희는 답장하지 않았다. 처음 십 분은 바쁘겠지, 다음 이십 분은 못 봤겠지, 또 다음 삼십 분은 정신없겠지, 하며 말남은 좋게 생각하려 애썼다. 하지만 시간이 더 흐른 후에도 옥희에게서는 문자도, 전화도 없었다. 말남은 애꿎은 휴대전화만 열었다, 닫았다 반복했다. 한 시간 정도가 흐를 무렵에 말남은 결심한 듯 휴대전화를 열어 단축키 1번을 눌렀다. 전화기는 몇 번의 신호음을 길게 뱉어냈다. 옥희는 늦게 전화를 받았고, 속삭이듯 이야기했다.

“수업 중이야. 나중에 전화할게. 엄마”

다급한 목소리를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말남은 말 한마디 건넬 틈도 없이 끊어져 버린 전화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마치 통화를 하지 않은 것처럼, 휴대전화 화면에는 나비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시계는 오후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말남은 다시 옥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옥희가 수업 중인 것과 또 전화를 받거나, 받지 않는 것은 이제 더는 말남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말남은 너무 쉽게 끊어진 전화를 다시 잇고 싶었다. 옥희에게 할 말이 있었다. 첫 번째 걸었던 전화는 신호음만 길게 이어지다가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갔다. 삐 하는 소리와 함께 말남은 휴대전화를 닫았다. 그리고 다시 휴대전화를 열고 단축키 일 번을 눌렀다. 신호음이 길게 울리다가 또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갔다. 말남은 미동 없이 삐 하는 소리와 함께 휴대전화를 닫고 다시 열었다. 이 동작을 두 번쯤 더 반복했을 때, 옥희는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받았다. 옥희가 화가 난 것이 휴대전화를 넘어 생생하게 들려왔다. 하지만 말남은 나중에 전화하자고 했잖아, 하며 화를 내는 옥희의 말을 무시한 채 방금 옥희가 했던 행동처럼 자신의 말만 빠르게 전달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엄마 이름 바꿀끼다. 네 이름으로”

몇 개월 전 한글학교에 다닐 때부터 쭉 해왔던 생각을 한 번에 말해버린 말남은 휴대전화를 세게 닫아 전화를 끊고는 이불 위로 휴대전화를 던져버렸다. 이불 위에서 휴대전화의 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하지만 말남은 시선조차 두지 않고 그 소리를 무시했다. 전화가 거듭될 때마다 벨 소리는 더 크고 우렁차게 울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말남은 그 소리가 울리는 방안에서, 옥희라는 이름은 철학관에서 이름을 짓는 그 순간부터 자신의 이름이었다고 계속 되뇌었다. 그리고 그 확신은 한글 교실에서 출석을 부를 때 들었다. 이 벨 소리처럼 크고 명확하게 김말남이라고 불렸을 때, 말남은 뭔가 잘못된 것 같았다. 말남이라고 불리지 않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은 말남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폰니가 자기 이름인 것도 아니었다. 누군가의 이름이었고 혹은 별명이었던 것은 자신의 이름이 되지 못했다.

옥희라는 이름을 공책에 힘주어 쓰면서 말남은 출석을 부를 때, 자신이 말남이 아니라 옥희로 불리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가슴속 한구석에서 그것은 욕심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쉽게 그 욕심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남은 인생을 말남이 아닌 옥희라 불리며 살고 싶었다. 말남이 아니라, 폰니가 아니라, 옥희 엄마가 아닌 김옥희로 살고 싶었다. 휴대전화는 이내 조용해져 더는 울리지 않았다. 말남은 깜빡거리는 휴대전화 외부액정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옥희는 초저녁쯤에 자신을 찾아올 것이라고 말남은 예상했다. 말남은 화장대 서랍에 넣어놓은 개명신청서를 꺼내서 방바닥에 펼쳤다. 접힌 자국을 다림질하듯 두터운 손바닥으로 죽죽 밀어대다 화장대 위에 놓인 분홍색 플라스틱 필통을 바닥에 내리고 연필을 꺼냈다. 그리곤 변경하고자 하는 이름 란에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김옥희라고 썼다. 반듯하게 쓰인 글자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옥희가 말남의 집을 찾아왔을 때, 말남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옥희가 집에 들어와 방문을 열자 방 안에 연기가 자욱했다. 말남은 방문을 열고 한숨을 쉬는 옥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옥희 뒤로 손녀인 혜진이 보였다. 혜진이 말남과 눈이 마주치자 묵례를 했다. 말남은 황급히 담뱃불을 끄고 허공을 손으로 휘휘 저었다. 하얀 담배 연기는 조금 흩어지다가 다시 뭉쳐 서서히 천장으로 올라가 둥그렇고 희미하게 고였다. 옥희는 방문을 활짝 열고 들어와 창문을 세게 열고, 방충망까지도 죄다 열었다. 옥희의 손길은 신경질적이었다. 말남은 옥희가 아니라,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천천히 불어 들어오자 천장에 모여있던 담배 연기가 느리게 밀려 나갔다. 창밖은 붉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여름에는 해가 좀처럼 빠르게 넘어가지 않았다.

옥희는 창문을 열고 바닥에 거칠게 핸드백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말남의 맞은편에 앉았다. 혜진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느라 방에 들어오지 않고 문지방 위에 서서 벽에 기대고 있었다. 말남은 문지방 위에 서 있지 마라, 하며 이불 위로 앉으라고 자기 옆을 툭툭 쳤다. 혜진은 힐끔 말남과 이불 위를 보더니 방안에 들어와 방문 옆 벽에 기대앉았다. 좁은 방안에 무거운 공기가 내려앉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내 이름으로 개명을 한다는 게.”

“고마, 니는 좋은 이름 하나 새로 맹글고 니 이름 엄마 주면 안 되겠나?”

“그게 무슨 말이냐니까!”

옥희는 도무지 말남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애초에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듯이 하는 말남이 개명한다는 이야기를 상의도 없이 통보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말남이 자신의 이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딸이라서, 딸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듣게 되는 엄마의 과거가 있었다. 어렸을 때는 뭘 모르니까 자신에게 말하고, 좀 크고 나면 이해해줄 사람은 옥희 하나뿐이라고 또 자신에게 말했다. 옥희는 묻지 않았지만, 알게 되었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관계가 아니라, 말하기 때문에 아는 관계였다.

옥희의 높아져 가는 언성에도 말남은 옥희를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 옥희는 이미 말남이 자신의 이름을 왜 싫어하고, 어째서 개명을 하고 싶어 하는지는 알고 있었지만 왜 하필 그 이름이 자신의 이름인지에 대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그래서 대답 없이 허공을 응시하는 말남을 재촉했다.

“이유를 알려줘야지. 이유를 알아야 할 것 아니야.”

“뭔 이유가 있겠노. 니 이름 지을때부터 그기 내 이름 같았는데.”

한참이나 말없이 있던 말남이 말했다. 옥희는 눈을 질끈 감으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말남은 김옥희라고 눌러 쓴 개명신청서를 옥희에게 건네주었다. 옥희는 종이를 받자마자 맨바닥에 그냥 내려놓고 한참이나 개명신청서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옥희는 머리가 지끈거려서 더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말남과 같은 이름으로 살 수 없다. 그러니 엄마가 개명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다른 이름으로 바꿔 주어야 했다. 옥희라는 이름에 크나큰 미련이 있다거나, 이루어 놓은 것이 거창하다거나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저 오랜 시간 동안 제 이름이라고 굳게 믿은 것을 쉽게 말남의 이름으로 인정하는 것이 힘들었다. 그저 학원 선생으로 살아온 인생이더라도, 이옥희로 살아온 삶들이 있었다. 왠지 이 이름을 말남에게 주는 것이, 인생을 바꾸는 것인 양 크게 느껴졌다.

옥희는 이런 고민을 한순간에 해결할 수 있는 말남의 이유가 필요했다. 꼭 이 이름이어야 한다는 말남의 주장을 억지로 굽힐 생각은 없었다. 다만, 왜 자신의 이름이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밝혀주었으면 하는 것이 옥희의 바람이었다. 하지만 재촉하면 재촉할수록 말남의 얼굴에는 일종의 실망감이 어리기 시작했다. 옥희는 더는 말남을 채근하지 않았다. 말남은 담뱃갑을 들었다가, 혜진을 보고 도로 내려놓았다. 혜진은 오가는 말싸움에도 그저 스마트폰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혜진아. 밥뭇나?”

말남은 혜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옥희는 말남이 일부러 말을 돌리기 위해서 혜진에게 말을 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혜진은 말남을 쳐다보지도 않고 배 안 고파요, 하며 말을 흐렸다. 혜진의 손가락만 분주하게 움직였다. 옥희는 그런 혜진을 나무라기 시작했다.

“할머니 말씀하시는데,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대답할래?”

혜진은 대꾸 없이 여전히 게임에 열중하고 있었다. 옥희는 갑자기 속에서 불덩이가 치미는 기분이 들어 괜히 혜진에게 이것저것 트집을 잡아 화내기 시작했다. 너 문제집은 꼬박꼬박 푸는 거 맞아? 논술 준비는 다 한 거야? 엄마는 너 과고, 외고 보내려고 여기저기 알아본다고 정신이 없는데. 너는 그렇게 태평하게 휴대전화만 들여다보고 있는 거야? 너 그거 살 때 엄마한테 뭐라고 했어. 공부 더 열심히 한다고 했잖아. 네가 지금 한다고 하고 지킨 게 있어……. 옥희는 속사포처럼 잔소리를 쏟아냈다. 혜진은 스마트폰을 든 채로 방을 나가버렸다.

“아, 엄마가 데려와 놓고 왜 나한테 짜증이야!”

혜진을 다른 학원에 데려다주어야 하지만, 옥희는 정신이 없어 혜진을 데리고 말남의 집까지 와버렸다. 하지만 옥희는 분이 삭혀지지 않아 다른 방으로 넘어가는 혜진에게 외쳤다.

“너도 엄마처럼 학원 강사나 하고 살고 싶어? 넌 엄마처럼 안 돼야 할 거 아니야!”

한바탕 소리를 지르고 옥희가 돌아보자, 말남이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옥희는 그 순간 이상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리고는 그 감정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이 문득 무서워졌다. 머릿속으로 말남이 자신을 키워오면서 했던 무수한 말들과 행동들이 스쳐 지나갔다. 옥희는 핸드백을 들고 벌떡 일어났다. 말남은 그런 옥희를 말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옥희는 작게 갈게요, 하더니 혜진을 데리고 쏜살같이 말남의 집을 나가버렸다. 말남은 맨바닥에 있던 개명신청서를 주워 반으로 한번, 다시 또 반으로 한번 접었다.

말남은 소금기가 가득 밴 묵직한 바닷바람을 가로지르며 뛰고 있었다. 구불구불한 흙길을 뛰노는 발걸음이 경쾌했다. 무릎이 아팠던 것은 그저 꿈인 양 했다. 작은 동산 하나를 가뿐히 넘어 환하게 펼쳐진 바다와 마주했다. 미온한 바람에 엉킨 머리칼이 진득하게 뭉쳐져 이마에 달라붙었다. 말남은 맨발로 매끈한 돌 위를 걸었다. 무심코 집어 든 작은 돌멩이를 보다, 그 돌멩이를 집은 손을 바라보았다. 손톱 끝이 몽돌처럼 둥글고 매끈했다. 말남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섬의 끝과 끝이 한눈에 들었다. 반짝이는 물결이 눈부시도록 아름다웠다.

야 이름을 뭐로 지어야겠노.

누군가 말남에게 물었다. 말남은 입을 크게 벌렸다. 소리를 지르려고 했는데,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아 뭍에 나온 물고기처럼 그저 빠끔거렸다.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나 있나.

말남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문득 엄마가 죽었다는 생각을 했다. 섬이 쪼개지듯이 갈라지고 오른편에 엄마의 사진이 보였다. 엄마를 닮고, 또 저를 닮은 딸들이 분주히 뭔가를 들고 움직였다. 상주가 된 것은 애꿎은 사람이었다. 죽은 것은 말남의 엄마인데, 어째서 상주 노릇은 딸들이 아니라 친척이 하고 있는지 말남은 나이가 아무리 들어도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 하고 말남은 입을 열었다. 그 소리와 함께 한꺼번에 늙어버렸다. 맨질한 손톱도, 부드러운 무릎도 온데간데없었다. 말남은 눈을 반짝 떴다. 엄마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꼭 도둑맞은 것만 같았다. 말남은 일어나 좁은 방안을 서성였다. 치매가 왔나, 제 엄마의 이름이 꼭 기억이 날 것 같으면서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저와 비슷한 이름인 것도 같았다. 아니, 전혀 다른 것이기도 했다. 엄마의 이름이 선명했던 것은 언제인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엄마의 장례식뿐이었다. 그러나 그 날 말남은 자꾸만 정신을 잃었다. 아름다운 것 빼고는 아무것도 없었던 그 섬이, 돌아가기 전까지는 아름다운 줄도 몰랐던 그 손바닥만 한 섬에서 엄마는 죽었다. 말남은 느닷없이 숨이 가빠져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헉헉 들이마셨다. 그러다 문득 손을 뻗어 옥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거 할머니 이름이 뭐고.”

“뭐라고?”

“할머니 이름 말이다!”

“갑자기 새벽에 무슨 일이야. 갑자기 할머니 이름은 왜.”

옥희의 말에 말남은 제 가슴을 퍽퍽 때리기 시작했다. 그리곤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니는, 엄마가 기억도 안 나는 이름으로 죽었으면 좋겠나.”

전화기 너머에서는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말남은 더 거세게 가슴을 내리쳤다. 가슴 안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덩어리가 있었다. 이게 들쑥날쑥 뭉쳐선 말뚝처럼 명치를 꽉 내리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까스활명수를 사다 놓고 끼니마다 마셔도 내려가지 않고, 아닌 밤중에 불쑥불쑥 치솟아 올렸다.

“엄마.”

말남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이름을 쓸 날이 없었다. 제 이름을 말할 날이 없었다. 제 이름으로 불릴 날이 없었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흔적조차 없었다. 어쩌면 이름이 없었을지도 몰랐다. 제 엄마도, 저도. 그때 문득 누군가 옥희야, 하는 소리가 들렸다. 말남은 꿈속에서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옥희는 말남이 개명신청서를 가지고 왔던 법원에 있었다. 말남이 힘들게 내려왔던 계단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려오며, 요즘 개명신청은 별로 어렵지 않구나. 생각했다. 어떻게 이 이름을 가지게 되었는지, 왜 바꾸고 싶은지 구구절절하게 설명할 필요 없이 사주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의 항목에 표시하고 개명신청서를 제출했다. 이만 원 남짓한 수수료를 제출하며 옥희는 더는 자신이 옥희가 아니라는 사실이 대수롭지 않게 느껴졌다.

말남의 집을 도망치듯이 나가던 날, 옥희는 밤새 자신이 옥희라는 이름을 바꾸어도 여전히 자신은 그대로라는 사실을 계속 떠올렸다. 새벽만 되면 발작처럼 울리는 전화를 무시하는 대신 받는 쪽을 선택했다. 전화기 너머의 말남은 울다가, 웃다가 화를 내곤 했다. 그리곤 느릿하게 엄마, 하고 부르면 말남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바꾸기로 한 이름은 그다지 특별하지도, 특이하지도 않았다. 지난날 제 이름을 지었던 말남과 같이 철학관에 찾아가 좋은 이름 몇 개를 받았다. 아마 개 중에는 제 이름이 될 뻔했던 글자가 있을 수도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옥희와 먼 발음의 이름을 골랐다. 김말남이 아니라 김옥희가 될 엄마를 상상하면 이상하게도 웃음이 나왔다. 말남의 입에서 말버릇처럼 흘러나오던 옥희라는 단어를 다시 듣지 못할 거라 생각하면 가슴 한쪽에 바람이 드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옥희는 곧장 학교를 마치는 혜진을 데리러 가야 했다. 그건 어제도, 그저께도 한 달 전에도 했던 반복된 일상 중 하나였다. 하지만 어째서 엄마인 말남은 그렇게 될 수가 없는지 옥희는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 이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동그란 돌멩이가 잡히는 듯도 했다.

한희주마산 합포고등학교 졸업동아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한희주마산 합포고등학교 졸업동아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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