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신라 흥덕왕릉은 경주 외곽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찾아가는 길이 그리 좋지 않습니다. 볼 때마다 성가신 몇 채의 냄새나는 우사(牛舍)와 마치 실타래처럼 풀어져 미로처럼 누워있는 좁은 농로(農路)를 거쳐야만 닿을 수 있습니다. 왕릉은 뭇 시선들을 피해 우거진 솔숲 안에 들어 있습니다. 애써 찾는 자들에게만 자신의 자태를 드러냅니다. 훤하고 편안한 들판을 앞세우고 넓은 주차장까지 둔 보문동의 진평왕릉과는 참 대조적입니다. 무열왕릉이나 김유신장군묘(흥무왕릉)와도 많이 다릅니다. 김유신 장군을 흥무대왕으로 추봉한 이가 흥덕왕인지라 서로 통할 것도 같은데 왕릉의 품새가 사뭇 다릅니다. 그렇게라도 자기 삶을 은밀하고 온전하게 지켜내고 싶다는 사자(死者)의 의지를 보는 듯합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왜 이리도 멀리 떨어져 있을까?”라는 초행길에서의 의문이 어느 정도 해소가 됩니다. 왕은 살아서 꽤나 풍진 세월을 보냈을 겁니다. 죽어서나마 고즈넉하게 자기만의 삶을 편안히 누리고 싶었던 겁니다. 그런 염원이 그렇게 공간에 반영되었을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습니다.

흥덕왕릉은 종종 예술사진의 피사체가 되곤 하는 울울한 도래솔과 함께 ‘반전이 있는 공간’으로 즐겨 회자되곤 합니다. 능역 안으로 들어가 보면 누구나 알게 되는 사실이지만 그만한 아름다운 왕릉도 없습니다. 여름에 가면 가족 나들이 장소로도 애용됩니다. 돗자리를 깔고 앉아 조용한 야유회를 벌이는 젊은 가족들도 종종 봅니다. 그만큼 사람을 편안하게 감싸는 곳입니다. 주변 환경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석물을 위시한 왕릉에 부속된 여러 기물들의 보전 상태도 좋습니다. 특히 무신상(武臣像)이 서역인의 모습인 것이 재미있습니다. 흥덕왕릉만큼 주인이 확실하고, 능의 주위가 튼실하고, 공간이 아름다운 신라 왕릉도 없을 것 같습니다. 태종 무열왕릉 정도가 비견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왕릉의 주인공 흥덕왕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들은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습니다. 흥덕왕의 치세와 슬픈 부부연(夫婦緣)에 얽힌 사연이 그렇습니다. 무능한 조카를 왕위에서 몰아내고, 장보고를 시켜 청해진을 설치케 하고, 당나라 사신으로 갔던 대렴공(大廉公)을 시켜 지리산에 차를 심게 하고, 질녀였던 아내 장화부인의 때 이른 죽음을 절절히 애도해 내내 독수공방으로 일관하고, 합장을 유언하고, 시름시름 앓다가 재위 11년 만에 죽은, 후사를 두지 못해 귀족 간의 잦은 왕위 찬탈의 빌미를 제공하여 왕국의 멸망을 재촉한 인물이 흥덕왕입니다. 이를테면 비운의 왕이었던 셈입니다. 그 내용을 알고 나서야 비로소 그의 음택이 왜 이리 안온한가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외곽의 후미진 곳에 홀로 머물며, 풍진으로 얼룩진 살아서의 세월들을 천년에 걸쳐 조금씩이나마 씻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묘한 수천 그루의 도래솔이 장관(壯觀)인 송림 한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왕릉은 서역 무사 두 사람이 지키고 있습니다. 천년의 세월을 호위하는 그들은 천년의 햇빛과 천년의 바람과 천년의 비를 견딘 자들입니다. 제게는 잘 보존된 왕릉보다도, 기기묘묘한 솔숲보다도, 이방에서의 그 긴 세월을 묵묵히 견디고 있는 이 돌로 된 무인석들이 더 볼 만했습니다. 오직 지키는 일 하나로 천년을 마주 보고 서 있는 그들의 모습이 대견스럽고 애절하기까지 합니다. 그들을 보며 ‘지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언제부턴가 지키는 게 서로 다른 사람들과는 뜸하게 지냅니다. 천년의 세월은 아니지만, 나이가 들어 보니 딱히 그럴 일도 아니란 걸 알겠습니다. 서로 달라도 지키는 게 있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진정으로 지키는 자는 무엇을 지키는가를 따지지 않습니다. 오직 지켜서 아름다울 뿐입니다. 천년의 세월을 지켜온 흥덕왕릉의 무인석이 그렇게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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