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윤정 안동대학교 사학과 교수
강윤정 안동대학교 사학과 교수

1920년 들어 만주망명 2세대는 새로운 지도자로 성장했다. 안동의 김동삼·이광민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여성 활동가도 성장하였다. 그 가운데 경북 여성으로 두드러진 인물이 남자현(南慈賢·영양)이다. 1919년 망명 직후 남자현은 여느 여성들처럼 서로군정서를 중심으로 후방에서 활약하였다. 그러나 점차 남성들과 어깨를 견주며 독립운동 현장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22년 조직된 통의부와 1924년 조직된 정의부를 중심으로 활약하였으며, 1927년을 전후로 의열투쟁으로 전환하여 활동을 이어갔다. 이 때문에 남자현은 여성 의열투쟁가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그러나 1920년대 그의 활동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교육을 통한 여성계몽이다. 이러한 남자현의 모습은 지복영의 회고에도 잘 드러난다. 1924년 어머니를 따라 만주로 간 지복영은 1925년 여섯 살에 액목현 황지강자의 검성중학 부속학교인 소학교에 입학하였다. 검성중학은 경북인의 역할이 적지 않았던 신흥무관학교의 후신으로 알려져 있다.

그때 그곳에는 우리 독립운동사에도 빛나는 남자현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그분은 여걸(女傑)이었다. 그는 경상도 사람으로 일찍이 그의 남편이 의병으로 죽자 남편의 원수를 갚겠다고 어린 유복자를 시부모에게 맡기고 독립전선에 뛰어들었다고 사람들은 말했다. 일함에 있어 매우 열성적이어서 짚신감발로 추운 날 더운 날을 가리지 않고 동분서주했는데 황띠깡즈(荒地崗子)에서는 특히 여성계몽에 정열을 쏟았다. 몸 소 이집 저 집 찾아다니며 개별적으로 계몽하기도 하였지만, 더 적극적으로 부녀자들을 한 곳에 모아서 그들을 계도하였다. (민들레의 비상-여성한국광복군 지복영 회고록)

이 글은 남자현이 여성교육에 얼마나 헌신적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집집마다 찾아다니기도 하고, 또 모아서 교육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성들의 호응을 얻어 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교육회 모임은 “회라니 무슨 회요? 생선회요? 육회요?”라며 조롱당하기 일쑤였다. 이에 굴하지 않고 남자현은 여성들에게 식민지 현실을 자각시키며, 여성들도 독립운동에 참여해야 한다고 설득하였다. 이러한 교육활동은 1928년까지 계속되고 있음이 자료에서 확인된다. 남자현의 교육에 대한 인식은 순국 직전의 유언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마지막 순간 “독립은 정신이다”, “손자를 찾아 교육시켜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한다. 교육이 바로 정신의 근간을 이루고 있음을 드러내는 유훈이었다.

만주라는 공간에서 여성들이 남성들과 대등하게 활동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남자현은 1919년부터 만주에서 활약했지만, 이름이 처음 확인되는 시기는 1927년이다. 조선혁명자후원회 발기인에 참여하고, 중앙위원의 직책을 맡았다는 내용이다. 이는 만주에서 활동을 시작한 지 꼬박 8년 만의 일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남성들이 중심이 된 정의부에서 활약하며, 간부로 이름을 올리게 된 것이다. 정의부에서 여성이 간부가 되어 ‘이름’이 기록된 예는 극히 드물었다. 이에 대해서는 정의부 내에서도 비판이 있을 정도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자현이 자신의 소신을 꺾지 않고 꿋꿋이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어린시절 아버지에게 배운 글공부가 한몫 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남자현은 1920년대 여성들의 계몽에 전념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