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혁 학강미술관장
김진혁 학강미술관장

지난 과거가 되살아난다. 1974년 3월, 필자는 대건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첫 미술시간이 되었다. 미술을 지도하는 선생님이 어떤 분인지 궁금하기도 하여 기다려지고 있었다.

종이 울리고 50대 초반의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칠판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강우문.

첫 수업은 기초 소묘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빛과 명암, 그림자, 역광 등으로 시작된 수업이었다. 변화된 왼쪽 손가락의 형태를 그리는 스케치 수업이 다음 시간에 이어졌다. 미술실 한쪽의 준비실에 가보니 강우문 선생이 제작하던 인물화의 큰 그림이 이젤에 세워져 있었다. 국전에 추천작가로 출품한다고 누군가 얘기했다. 그 작품이 가을 국전에 추천작가상을 받게 되어 전국의 언론에 크게 보도되었다.

당시는 국전의 위상이 절대적이라 이것을 계기로 학교를 그만두고 도불기념 개인전을 대구백화점 화랑에서 펼쳤다. 강우문 화가의 전성기 시절이었다. 그 후 경북대학교에 미술학과가 개설되면서 교수로 초빙되었고 바로 예술대학 학장으로 예술대학을 이끌었다. 1980년대 중반, 학장실에서 만나본 적이 있다. 자신에 찬 기운의 굵직한 목소리로 지역미술계와 미술교육에 관하여 일갈하여 말씀하신 것이 생각난다.

강우문 자화상(1976)

구상화단의 대가인 강우문 화백은 1923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그 시대의 다른 예술가들처럼 독학으로 그림그리기를 좋아하였다. 일제강점기 시대 한국 서양화단의 귀재인 이인성 양화연구소에서 몇 달 간 수학하였다. 얼마 후 이인성이 서울로 이사를 가자 홀로 양화를 연구하며 향토성 깊은 서정적 형상으로 나아갔다. 광복이 되고 지역에서 조직된 대구화우회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6·25동란 후 초기 국전시절부터 꾸준히 출품하여 한국의 대표 국전작가로 알려지게 되었다. 초기의 몇몇 작품을 보면 어두운 무채색과 혼합색들이 겹쳐진 깊이감을 드러내 보인다. 이러한 풍경과 인물화는 경상도 특유의 질박한 향토성을 가진 형상과 색으로 풀어내어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내었다.

아들 중에는 화가 강정영이 아버지의 화맥을 이어 다채로운 감각의 리얼리즘을 시도하였다. 허나 중견작가로서 꽃을 피우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나 강우문 화백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경북대를 정년퇴직하고 조금의 여유로운 환경에서도 가족들의 뒷바라지로 인하여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말년에 힘들게 일상을 보냈다 한다. 그즈음 필자는 남구 대명동에 위치한 화실을 방문하였다.

화실에는 평생을 그려온 작품들은 거의 없이 벽에 걸린 초기의 몇 작품만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조금은 작아 보이는 화실에서 그림에만 집중하여 그리는 노후의 지친 대가의 모습에 아쉬움이 더했다.

2006년 2월의 작업 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행복한 것 같다. 돈은 없지만 밥은 굶지 않고 따뜻한 방에 잠을 잘 수 있으며 그림만을 생각하고 그려도 되는 이 시간! (중략) 내 삶의 무욕에서 오는 나의 시간을 사랑한다” 라고 서글픈 심정을 담고 있다. 대구에서 시작하여 국전을 통하여 전국적으로 명성을 알렸다. 작업도 꾸준하게 성실히 이어지면서 상업 화랑을 통하여 일반인에게까지 알려졌지만 여러 가지 복합적인 상황으로 인한 어려운 작가의 심정을 피력한 것으로 생각된다.

요사이 생각해보면 경북대학교 미술관에 적어도 강우문 스페이스와 오종욱 스페이스를 만들어 지역문화예술에 기여한 공적에 조금이라도 보상하는 것이 필자의 욕심일까? 하고 느껴지는 12월의 초겨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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