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2세기 압독국 시절부터 형성된 비옥한 평야 마을

조영동 고분

임당동은 경산 시내에서 하양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영남대 정문 맞은편에 보이는 나지막한 구릉 위로 빼곡히 들어선 원룸촌의 절반이 임당동이다. 원룸촌은 임당동에서 조영동을 거쳐 압량읍 부적리, 신대리까지 이어진다. 행정동으로 북부동 3~5통, 15, 16, 24통이 해당하며 대구도시철도 2호선 임당역에서 북쪽으로 오목천에 닿는 지역으로 임당들을 끼고 있다.

임당동은 현재 2576세대에 인구는 3589명이다. 이웃 조영동과 비슷한 규모이며 대학생 청년층이 많이 거주해 평균 연령 40세에 평균세대원 1.4명이다. 이는 대부분 원룸촌의 공통된 현상이지만, 임당동은 특이하게 여성 100명당 남성이 175명으로 주변보다 성비가 매우 높다.

임당동 원룸촌에는 확실히 청년 대학생들만 보인다. 그러나 동네를 자세히 돌아보면 원룸 건물 사이로 단층주택들이 드문드문 있고 언덕 너머까지 들어가 보면 빛바랜 옛집들이 한데 모여 있는 전통마을을 볼 수 있다. 400년 이상 농사지으며 조상 대대로 살아온 임당동의 원래 주민들이다.

전통마을은 정림마을 궁당마을 장림마을, 3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마을의 역사를 보면, 1600년경 전주 이씨가 정림마을에 들어와 자리잡았고 궁당마을에는 경주 최씨 진주 강씨가 많이 살고 있다. 이들은 임당동 전체 주민의 10%에 불과하지만 연령은 평균 55세로 원룸촌과 뚜렷이 구별된다.

마위지근린공원

1945년 4월 개교한 임당초등학교, 마을의 능선에 자리한 장림사라는 절 외에 임당동에는 이렇다 할 문화시설은 없지만 마을의 역사는 압독국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압독국은 기원전 2세기부터 약 500년간 실체로서 존재했고, 757년 장산군으로 공식 명칭이 바뀌기까지는 이름으로 존재한 삼한소국의 하나다. 1982년부터 30년에 걸친 임당동 조영동 부적리 고분군을 발굴한 결과 이곳이 압독국의 중심지임이 밝혀졌다. 임당동은 압독국 시절부터 마을이 이루어졌으며 당시에도 장림 혹은 궁당으로 불렸다. 마을이 처음 생긴 뒤로 장림사라는 절이 생기고 이 때 활을 쏘는 장소가 있었다고 하여 궁당으로 불렸다고 한다.

정림마을은 북부동 3통, 흔히 임당1동으로 부르는 마을이다. 뒤로는 야산이 북풍을 막아주고 앞으로는 궁당천이 흐르는 배산임수의 입지를 하고 있으며 마을 앞으로는 광활한 임당들이 펼쳐져 있다. 남천 오목천 금호강 3하천의 본류가 만나면서 만들어낸 비옥한 충적평야이다.

임당1동 이춘갑 노인회장은 좋았던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임당 하면 큰 들을 끼고 있어서 인근에서는 다들 부자마을로 알아줬지. 영남대 들어오기 전에는 궁당천이 1급수로 온갖 물고기가 다 있었어.”

궁당마을(임당2동) 최상길 노인회장도 “땅이 좋아 채소가 잘 되었고 시장에 많이 내다 팔았지. 우리 어릴 때는 사과밭이 많았고 그 뒤로도 포도 복숭아 대추 뭐든 다 잘 되었어. 이웃 금구리는 홍수 때 오목천 물이 자주 넘치고 했지만 우리 마을은 1959년 사라호 태풍 때, 그 2년 뒤 말고는 아직까지 침수 한 번 없었어.”

주민들도 다들 열심히 살았다. 이 회장님은 마을에 대한 자부심이 넘친다. “새마을운동 발상지를 어디 어디라고 하지만 그 전에 우리는 새마을운동이라 할 만한 실질적인 일을 다 했어요. 야학하고 문맹 퇴치하고 다리도 놓고 구호단체가 와서 먹고사는 방법을 지도해주면 시범부락’으로 성공하여 정부 표창도 받았지요.”

그런 마을 분위기 탓인지 집집마다 맏이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시로 나가지 않고 가업인 농사일을 이어갔다고 한다. 지금까지 마을 전통을 지키며 내부 응집력을 유지하고 살아온 데는 이들의 선택이 한몫했던 것 같다.

영남대학교 전경

마을에 큰 변화가 시작된 것은 영남대학교가 이전해 오면서부터였다. 영남대학교는 경산에 105만여평 학교 부지를 마련하고 1972년 대학교 본부 및 전체 기구를 경산 캠퍼스로 이전한다. “영남대 이전으로 우리 마을이 좋아진 건 별로 없어요. 대동 조영동은 혜택을 보았겠지만 임당동은 한 골목 떨어져서 혜택이 없었다”고 이 회장은 말했다. 영남대 정문 앞 바로 건너편은 대동, 조영동이다.

영남대 정문

영남대가 들어오면서 고분군이 영남대 박물관 사람들 시야에 들어오게 된다. 마침 1982년 도굴 기사가 크게 나고 그게 계기가 되어 고분 발굴작업이 시작되었는데 1986년 임당 택지개발 사업의 시작에 맞춰 본격적인 발굴을 진행하게 된다. “숲이 우거지고 나무도 있고 해서 마을 사람들은 그냥 야산에 공동묘지로만 알았지요. 임당지구 택지개발을 옥산1지구보다 3년 먼저 시작했는데 12년 걸립니다. 옥산2지구보다 2년 뒤에 끝나요. 고분 발굴로 묶어놓은 재산권 피해가 컸다”라고 이 회장은 회상한다.

임당동 무덤들은 4~6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옛 문헌에 전하는 압독국 지배자들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고분은 독무덤, 돌무지덧널무덤, 굴식돌방무덤 등 다양한 무덤 형식과 순장풍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금은제 장신구와 고리자루큰칼, 철기류, 오리모형 토기, 상어뼈 등 압독인들의 생활양식을 알게 해주는 수많은 유물들이 발굴됐다.

임당유적은 고총고분군과 토성으로 대표되는 생활유적이 복합된 유적으로 기원전 2세기부터 약 천 년에 가까운 고대 경산 사람들의 생활문화가 간직되어 있다. 신라와 가야 양식, 독자적인 양식이 혼재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이처럼 장기간에 걸쳐 분묘가 이어지며 축조된 유적은 이곳이 유일하다고 한다.

구릉지대에 넓게 분포한 원룸촌은 1998년 임당 택지개발사업이 마무리되면서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한 것들이다. 현재 임당동 주변은 경산시에서 원룸이 가장 많은 곳으로 시 전체는 2천동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경산 대학촌에 원룸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은 94년쯤. 하양읍에서 몇채의 원룸이 건축된 이후 90년대 중반 영남대 앞 대동 등으로 확대됐다.

고분군 앞 원룸촌

지난 1970년대까지만 해도 대학생들은 하숙 아니면 자취가 대부분이던 것이 80년대에는 방 따로 식사 따로의 매식(買食) 형태로 바뀌더니 90년대 중반 이후는 원룸이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소줏잔을 기울이며 정을 나눴던 하숙집 입방식, 때로는 ‘의식화 학습’을 위한 토론장이던 예전 하숙집의 추억은 아버지 세대의 전설이 되어 이제는 찾아보기 어렵다.

임당동(영남대 앞) 원룸거리

원룸촌에는 각종 주차공간이나 문화시설 등 기반시설이 부족하고 주로 술집과 식당 등 소비 향락적인 곳은 수두룩하다. 서점이나 영화관, 공연장, 스포츠센터 등의 문화시설은 거의 없다. 1년 내내 동네에서 무슨 행사가 있어도 원룸 사람들은 아예 나오지도 않는다고 최 회장은 말한다. 원룸촌은 쓰레기 주차 방범 등 세가지 난제가 있고 미화원들 사이에도 격무지로 알려져 기피하는 곳이다.

임당동(영남대 앞) 원룸거리

임당 마을은 원룸촌이 들어오면서 옛 풍경은 지워져 가고 있지만 그런 가운데에도 그런대로 정체성을 지켜가려고 애쓰고 있다.

예전에는 부모상이나 혼사 같은 큰일에 십시일반 부조를 많이 했다. 묵 감자 계란 등을 내었다. 바쁜 농사철에는 품앗이를 으레 했지만 요즘은 기계화 되어서 옛날 같이 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원룸이 많이 들어오면서 생각이 자꾸 바뀐다고 최 회장은 말한다. 남의 얘기를 잘 안 하게 되고 친하더라도 될 수 있으면 개인사에는 서로 개입하지 않는다.

그래도 아직 마을의 자랑이라면 동민 간 우애 화합하고 시기하지 않고 옛날 풍속을 어느 정도 유지하는 점이다. “우리 20대 때는 설날 같은 명절에 집집마다 마을 어른을 찾아 인사드렸는데 그게 불편하다고 생각해서 20년 전쯤부터는 공동세배를 하고 있다. 마을회관에 어른들이 모여 있으면 젊은이들이 와서 세배하고 덕담을 나누고 간다. 이런 전통이 유지되어 다행스럽다.”

임당동은 또 한 번의 큰 변화를 앞두고 있다. 임당들 165만㎠(50만평)에 2025년까지 2만3000명이 입주하는 경산 대임 공공주택지구 조성사업이 그것이다. 임당 2, 3동 사람들은 금구리 쪽에 농지가 많아서 큰 영향은 없다고 보지만 1동 사람들은 일터를 잃고 마을마저 어찌될지 걱정이다.

거기에 더해 압독국 문화유산 체계적 정비사업, 청년 희망도시 기반 조성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임당동고분군과 조영동고분군 사이에 있는 임당동 632번지에 임당유적 전시관이 2025년까지 들어설 예정이며 이곳을 연결점으로 전체 압독국 유적은 하나의 관광지로 거듭날 것이다.
 

김윤섭 기자
김윤섭 기자 yskim@kyongbuk.com

경산 담당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