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욱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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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주 이상용(石洲 李相龍) 선생은 나라가 망하던 이듬해 1월 일가 50여 가구를 이끌고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로 갔다. 살을 에는 칼바람을 맞으며 “차라리 내 머리가 잘릴지언정, 어찌 내 무릎을 꿇어 그들의 종이 될까 보냐”라는 시를 읊었다.

선생은 안동을 떠나기 전 집에서 부리던 노비들을 다 해방시켰다. 선생은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2000여 명의 장교를 배출했다. 이렇게 배출한 장교들이 각 독립군에 배속돼 지휘봉을 잡아 청산리대첩이 가능했다. 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내다가 곧 그만두고 실질적인 무장투쟁을 이끌었다.

일제가 만주까지 점령하던 1932년 6월 선생은 아들 준형에게 “국토가 회복되기 전에는 내 해골을 고국에 싣고 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유언을 남기고 74세로 세상을 떠났다. 준형도 “일제 치하에서 하루를 더 사는 것은 하루의 수치를 더하는 것”이라며 손목동맥을 끊어 순국했다. 부전자전,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다. 선생의 손자 병화도 애국 계몽운동에 뛰어들어 형무소 드나들기를 일삼았다.

집안에 한 사람만 독립운동을 해도 3대가 망한다고 했다. 도망 다니고 자금을 대느라 교육도, 장사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생의 가문은 아들 손자대까지 내리 3대가 독립운동을 했다. 이 뿐 아니다. 선생의 당숙 이승화, 아우 상동·봉희, 조카 상동의 아들 운형·형국, 봉희의 아들 광민, 손부 허은 등 고성이씨 집안에 모두 11명이 독립유공자 훈장을 추서 받았다.

일제는 1942년 2월 보복이라도 하듯 독립운동의 산실인 임청각 앞마당을 가로질러 철도를 놓았다. 중앙선 복선전철화로 16일 오후 7시 36분, 마지막 무궁화호 열차가 임청각 앞을 지나갔다. 철도 운행선을 바꿔 철도가 걷어지게 된 것이다. 이제 임청각이 원래 모습을 되찾게 됐다. 임청각이 석주 선생의 애국 정신을 기리고 본받을 국가 기념공간으로 새단장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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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욱 논설주간 donlee@kyongbu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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