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수경 포항지역위원회 위원.포항문화원 사무국장
안수경 포항지역위원회 위원. 포항문화원 사무국장

관례적 새해맞이는 ‘해맞이’가 아닐까?

어제 해와 오늘의 해는 같건만 유독 신년 1월 1일에 떠오르는‘태양 맞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천리 길을 마다하지 않게 만든다. 그만큼 새해 ‘맹세 빨’이 한 해의 좋은 기운을 다 모으는 듯하다.

한반도 최동단 호미곶도 마찬가지이다. 아마 올해로 호미곶 해맞이 축전이 22회를 자랑하니 이제는 연륜이 쌓여 대한민국 대표 축제장들 중 한 곳임은 분명한 듯싶다. 몇 해 전 나는 이 축제의 한 부분인 대동한마당 놀이를 진행하기 위해 태양 맞이 백리 길에 합류했다. 놀이는 월월이청청(月月而淸淸)이다. 월월이청청은 동해안에 전래되는 아낙네들의 놀이로써 서해안과 남해안에 전승하는 강강수월래와 비슷하다. 공연은 0시 10여분부터 30분까지 진행되는데 시작은 해넘이와 새해가 딱 마주하는 시간이다.

영상에 비친 전 세계인들과 함께 우렁찬 함성이 호미곶에 울려 퍼지면 칠흙 같은 어둠 사이로 불꽃이 연발한다. 불꽃 하늘 눈길 머문 곳에 보고픈 그 얼굴을 그리며 소망을 빌어본다. 그러나 그도 잠깐, 자욱한 연기 여운이 흩어지기도 전, 무대 한 쪽에서 월월이청청 가락이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한복 입은 공연자들이 관객 속으로 파고들며 ‘월월이청청, 월월이청청’을 외친다. 곧이어 호미곶 광장에 모인 사람들의 손과 손을 실꾸리 엮듯 맞잡아 그 자리에서 출연자로 변신시킨다. 한바탕 놀고 나면 전신에 베인 땀이 한겨울 추위도 무색하다. 그러나 해맞이 전야 행사 후 동트기까지 남겨 진 다섯 시간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파도 소리이고 오는 칼칼한 바람과 맞서야 한다. 힘겨운 시름이다. 그러나 자연 속에 던져져 작아진 자아를 직시하며 고단한 일상을 떠난 침묵이 다가온다. 그래서일까 새해 아침 떠오르는 태양은 고된 인고(忍苦)의 결정판이요, 조양(朝陽)의 염력은 더욱 크게 느껴진다.

호미곶(虎尾串)은 조선시대 아홉 마리 용이 서로 뒤엉켜 승천(昇天)하는 땅의 생김으로 구룡(九龍)반도라 불리었다. 또한 행정구역이 장기면과 맞닿아 있어 일제강점기에는 가늘며 길게 뻗어진 모습이 말의 등 갈퀴처럼 구불구불하여 장기곶(長?串)으로도 일컬었다. 곡선 하나 없이 매끈히 뻗어 있는 동해안 해안선에 유일하게 툭 튀어나온 땅, 서쪽은 영일만, 북동쪽은 망망대해 동해와 마주하고 있다. 얼마나 많은 파도와 바람이 치솟았을까. 잔잔한 날은 손꼽힌다. 그러나 바람과 파도로 깎여진 해안 단구의 절경은 굽이굽이 숨은 이야기를 안고 있다. 바닷물이 너무 맑아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했다는 하선대, 이들을 호위하는 독수리 바위, 파도 소리가 ‘차르륵, 차르륵’ 노래처럼 들리는 숲실바다까지 아무튼 호미반도는 한반도의 축소판이다.

나의 퇴근길은 항상 영일대 해안도로를 향해 있다. 바다 노을에 물든 새끼반도가 너무 예쁘기 때문이다. 실제 호미반도를 표현한 저 많은 지명(地名)들의 답을 얻으려면 영일대 해수욕장에서 바라보는 게 제격이다. 아홉 마리 용의 뒤틀림이나 구불구불한 말 갈퀴 형상들을 한 눈에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해안도로를 끼고 호미반도와 평행선처럼 달리다 보면 그 끝이 바다를 향해 정결히 쏙 빠져버리는 땅 모습도 알게 된다. 그 끝자락이 호미곶면 구만리(九萬里), 더 이상 걸을 땅이 없다는 ‘그만마을’이다.

2010년 이전까지 호미곶면은 대천과 보천 두 내(川)의 첫 글자를 합쳐 대보면(大甫面)으로 불리었다. 면에는 구만마을을 포함해 강사리, 대보리, 대동배리 네개 마을이 모여 있다. 얼마나 바람 많고 추우면 대동배(大冬背)마을이라고 명명했을까? 한자를 그대로 풀이해 보면 ‘한 겨울 등 짊어 진 땅’이다. 이 등진 땅을 걸어 올라가면 한반도 지도에서 툭 튀어나온 꼭지점에 구만 마을이 위치한다. 포항 사람들에게는 이곳의 바람과 관련된 특별한 속담이 있다.

“내 밥 묵고 구만리 바람 안 맞니더.”이다.

해맞이 행사장 호미바람보다 더 마주하고 싶지 않은 바람, 따뜻한 내 밥 먹고는 구만리 바람맞으러 쓸데없이 갈 일이 없다는 뜻이다. 실제 구만리에 서 있으면 오직 눈앞에 펼쳐지는 풍광은 출렁이는 파도에 실린 해풍뿐이다. 그러나 이뿐만이 아니다. 남쪽은 200미터 남짓한 관망산(觀望山)에서 내리치는 육풍이 이곳을 향해 모인다. 오죽하겠는가? 몸이 날린다. 살이 시리다. 시린 이 땅끝에 한 여인이 서 있다. 등에는 주인 나리 애기씨를 몰래 숨긴 물동이를 지고……. 나는 이 여인이 맞았을 모진 바람이 세월이 된 생각에 스르르 눈이 감긴다. 구만마을이‘그만마을’이 된 사연에는 충심(忠心)을 다한 계집종 단량 이야기가 전해진다.

1453년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일으킨 계유정난(癸酉靖難)은 태종의 왕자 난 만큼이나 조선 역사를 뒤흔든 사건이었다. 이때 연루된 사람들은 이백 오십년이 지난 숙종 때가 되어 비로소 일부 신원이 복원된다. 그때까지 역적인 이들은 숨죽이며 살았을 터. 서슬 퍼런 왕조의 칼날에 한(恨)을 달래고 남긴 당시 글과 문집들이 지금도 전설처럼 진실을 전한다. 오백 오십년이 흐른 오늘 그 사건과는 아무 연관이 없을 것 같은 구석진 땅, 동해 끝 마을에도 그 이야기가 회자되고 있다면 역사의 죄는 얼마나 무서운가?

명(命)이 짧았던 문종의 유언을 받들어 단종을 지킨 고명(顧命)신하 김종서, 황보인은 정란의 신호탄으로 삼족이 멸해졌다. 집안이 쑥대밭이 되는 와중에 황보인(皇甫仁) 집안 안방에서는 갓 태어난 손자 단(湍)을 살리기 위한 필사의 노력이 꾸며진다. 계집종 단량에게 목숨을 잇게 해 달라는 마님의 마지막 부탁이었다. 신분제 사회 조선에서 노비는 재산 목록이며 매매 대상이다. 그러나 단량은 어머니의 마음을 품었던 모양이다. 항상 하던 일인 물동이에 아기를 넣어 매고는 걸었다. 한양을 무사히 벗어나고, 마님의 친정 봉화에 도착했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발각되면 다 죽임을 당할 일이니 걷고 또 걸었다. 물동이가 내 뱃속인 양 아기가 살아 있기에 무섭지 않았으리라. 더 이상 육지가 보이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한양에서 목숨 건 탈출을 시도한 종과 영의정의 손자인 사실을 알지 못했으리라. 인적은 드물었고 설령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을지라도 삶이 척박하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세상 끝자락에서 그녀가 택한 피난처, 그만마을 짚신골 골짜기였다.

세월이 흘러 손자 단이 장성하자, 단량은 가문 내력과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말라버렸다고 생각했던 눈물이 흘러내렸으리라. 그 후 황보 가문은 외진 짚신골을 떠나 구룡포 성동리에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루었다. 지금 짚신골은 세월에 사연을 깊이 잠겨두려는 듯 저수지로 바뀌었으며 성동리 문중에서는 광남서원을 만들어 무참히 죽임 당한 황보인과 그의 아들들을 모셔 향을 피웠다. 그리고 그 곁에는 단량의 은혜를 기리기 위해 ‘충비단량지비(忠婢丹良之碑)’를 세워 길손을 멈추게 한다. 충의(忠義)사상이 옅어진 현대에 한 여종이 실천한 길이 시사하는 바가 크지 않을 수 없다. 두 발로 밟을 수 없는 세상의 끝자락에 마침내 도달한 곳. 생명을 담보한 바다가 열리는 곳에서 솟구치는 욕망을 인내하며 살아 온 삶이다. 유배지로도 될 수 없었던 무인지(無人地)는 두 사람의 명(命)을 잇게 했으니 “내 밥 묵고 구만 바람 안 맞니더” 속담이 살린 셈이다.

오늘날 구만리는 호미곶 둘레길이 개발되면서 청정해안과 아름다운 경치를 지닌 관광지로 변모하고 있다. 전염병 안심 지역이다. 또한 해마다 새해의 영험한 기원과 포항 여인네들이 지신을 밟으며 뛰어노는 대동자리 이다.

빨리 밥 먹고 구만바람 만나러 가야겠다. 그리고 그 바람 속에 숨은 단량의 숨결과 서슴없이 자신을 내던진 기개를 느끼고 싶다. 한반도 동쪽 땅끝 마을,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굴하지 않은 인간 정신력이 오롯이 살아 숨 쉬는 곳, 노대바람이 바램이 되어 단단한 각오가 딴딴한 삶을 만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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