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자기애(自己愛)로 번역되는 나르시시즘(narcissism)은 정신분석학에서는 ‘스스로 리비도(성적 충동)의 대상이 되는 현상’을 의미합니다. 다 아시다시피 이 용어는 그리스신화의 나르키소스에서 나왔습니다.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반하여 그것만 바라보다 죽어(벌 받아) 물가 꽃(수선화)이 된 미소년의 이름을 따서 독일의 정신과 의사 네케가 1899년에 만든 말입니다. 자기의 육체를 이성의 육체를 보듯 하고, 또는 스스로 애무함으로써 쾌감을 느끼는 증상을 설명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이 널리 알려진 것은 프로이트가 이를 정신분석 용어로 본격적으로 도입한 뒤부터입니다. 그에 의하면 자기의 육체, 자아, 자기의 정신적 특징이 리비도의 대상이 되는 것, 즉 자기 자신의 관심(애정) 대상이 오직 자기뿐인 정신과적 증상이 나르시시즘입니다.(두산백과 참조)

보통 유아기 때는 리비도가 자기 자신에게 쏠려 있게 됩니다(1차적 나르시시즘). 사춘기를 지나면서 리비도가 타자를 향하게 되는데 그 분리과정이 원만치 못하면 2차적 나르시시즘의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자라면서 외부의 대상과 적절한 심리적, 사회적 거리를 둔 사랑을 하여야 하는데 그 과업을 성수(成遂)하지 못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증세는 ‘나와 타자(욕망)의 경계’가 없어지는 것입니다(자동차나 화장품 광고가 이 점을 가장 많이 활용합니다). 워낙 센 놈이라서 “나르시시스트 치유법은 없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나르시시즘이 늘 질병인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반기는 영역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곳이 예술 영역과 정치 영역입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자기 잘난 맛에 하는 일’들은 모두 나르시시즘을 어여삐 여깁니다. 자기비하를 일삼거나 냉철하게 이해타산만을 따지는 사람들은 예술이나 정치를 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도 해서 황홀하고, 하는 일마다 희생이고 공헌이라는 착각을 밥 먹듯이 해야 예술도 하고 정치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때 필요한 나르시시즘은 곯아터진 나르시시즘이 아니라 향기롭게 발효된 나르시시즘입니다.

제 전공 영역이 글쓰기인 고로 그쪽 이야기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모든 작가는 나르시시스트입니다. 다만 두 가지 부류의 나르시시스트가 있습니다. 하나는 ‘주제에 휘둘리는 나르시시스트’이고 다른 하나는 ‘주제를 능숙하게 다루는 나르시시스트’입니다. 보통 습작기 시절에는 전자일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후자로 진입하게 될 때 인정을 받고 등단을 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남들에게 심사받을 일이 없어질 때 다시 전자로 회귀하는 작가들도 꽤 있습니다. 일부 팬덤(fandom, 특정한 인물이나 분야를 열성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들의 환호에 의지해 ’하나의 증세‘가 되는 글쓰기를 일삼게 됩니다. 시대착오적인 글쓰기에 나서거나(역사의 발전을 대놓고 가로막거나), 죄의식 없이 표절을 하거나(내로남불, 자기가 하면 다 괜찮다고 여기거나) 허위전환을 통한 거짓 위안의 글쓰기에 매진합니다(부끄러운 줄 모르고 저급한 매문(賣文)을 자행합니다).

제목은 ‘나르시시즘 권력’이라고 붙여놓고 왜 엉뚱한 말만 늘어놓느냐고 나무라실지 모르겠습니다. ‘제목을 이기는 글쓰기’로 들어가겠습니다. 제 생각에 대표적인 나르시시즘 권력은 혁명 권력과 사법 권력인 것 같습니다. 박사 논문을 쓸 때 나르시시즘 공부를 좀 했고, 혁명아들이나 판검사들과도 이런저런 인연이 있어 그 실체를 좀 보고 있습니다. 나르시시즘 권력들이 서로 ‘향기’를 다툴 때는 나라가 매사 편안합니다. 그러나 어느 한쪽이 ‘악취’를 향기라고 우기며 권세를 독점하거나 기득권에 집착하면 나라가 어지럽게 됩니다. 악취에는 반드시 특권을 나누려는 동조세력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검찰개혁을 둘러싸고 두 나르시시즘 권력이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그 결과가 병실(病室)이 아니라 예술이 되기를 고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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