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버리고 실리를 택한 젊은 왕 통일신라 전성기를 열다

경주시 조양동에 있는 성덕왕릉.

신라 제33대 성덕왕(재위 702∼737)은 신문왕의 둘째 아들이며 효소왕의 동생이다. 효소왕이 16살에 죽었으므로 성덕왕 역시 10대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최완수씨는 ‘최완수의 우리문화 바로보기’에서 이때 성덕왕의 나이를 13살 정도로 추정했다.

성덕왕의 즉위는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겼다. 태자 책봉과정을 거치지 않았던 사실이 의혹을 증폭시켰다. 『삼국사기』는 ‘국인의 추대’에 의해 왕이 되었다고 했다. 『삼국유사』는 이 문제를 다른 시각으로 보고 있다. ‘대산오만진신(臺山五萬眞身)’조와 ‘명주오대산보질도태자전기(溟州五臺山寶叱徒太子傳記)’조는 정신태자 보질도와 효명태자가 1000명을 거느리고 오대산에 숨었는데 사람들이 효명태자 앞에서 만세를 불렀다고 전한다. 또 보질도태자는 눈물을 흘리며 돌아가지 않으므로 효명태자만 서울로 와 왕위에 올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신태자는 효소왕, 효명태자는 성덕왕이라는 설이다. 효소왕과 성덕왕 형제 사이에 왕위를 놓고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해석될 여지를 남겼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김융기와 이융기, 신라와 당나라의 태평성대를 열다

성덕왕 11년(712년), 당현종(재위 712~756)이 즉위했다. 현종은 주나라를 세운 측천무후의 15년 집권을 깨고 국호를 다시 당나라로 돌려놓았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를 황제(예종)로 등극시켰다. 예종은 재위 7년 만에 아들에게 황제자리를 물려줬다. 새로운 황제가 현종 이융기(李隆基)다. 쿠데타를 통해 할머니(측천무후)에게서 권력을 뺏고 큰어머니 위황후 세력을 축출한 실세다. 현종은 요숭 송경 장열 장구령 같은 명신들의 도움을 받아 태평성세를 펼쳐나갔다. 이 시대를 개원치지(開元之治)라 불렀다. 당 태종의 태평성세를 정관치지(貞觀之治)라 하는데 현종의 개원치지를 보태 ‘정관지치 개원성세’로 불렀다. 송나라 문인 손수(1031~1079)는 “장안성 근교에 사는 백성들은 모두 근심 걱정이 없었다. 사람들은 길에 물건이 떨어져도 주워가지 않았다. 여행자들은 양식을 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어느 곳에서나 식사를 해결할 수 있었다. 장정들은 무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다”고 적었다.

현종은 등극하자마자 사람을 신라에 보내 성덕왕의 이름을 바꿀 것을 요구했다. 성덕왕의 이름이 김융기(金隆基)로 당 현종과 이름이 같았던 것이다. 이것을 피휘(避諱)라도 한다. 당나라는 이미 신문왕 때 태종무열왕의 묘호가 당 태종의 묘호와 같다며 바꾸라고 요구했다가 거절당한 적이 있어 작정하고 요구를 했던 것 같다. 태종 묘호 때처럼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지 않겠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를 일이었다. 성덕왕은 쾌히 ‘융기’를 버리고 ‘흥광(興光)’으로 개명했다. 왕은 명분보다 실리를 택했다. 성덕왕은 발해와 일본을 멀리하는 대신 중국과의 교류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 시작이 ‘사융기득흥광(융기를 버리고 흥광을 얻음)’이다.

왕의 개명은 나당 전쟁 이후 막혔던 당나라와의 교류의 물꼬를 텄다. 성덕왕은 ‘외교의 시대’를 열었다. 재위기간 36년 동안 무려 46차례나 당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신문왕과 효소왕이 각각 1차례씩 사신을 보낸 것과 대조적이다. 기존의 상문사를 통문박사로 고쳐 외교문서작성을 전담토록 했다. 빠짐없이 공물을 보냈고 2명의 미인까지 진상했다. 당나라가 발해의 남쪽 지역을 공격해달라고 할 때도 이에 응했다. 신라의 병사가 진군 도중 얼어 죽었다. 전쟁이 끝난 뒤 당 현종은 패강(대동강)이남 지역을 신라의 영토로 돌려주었다.

성덕왕 30년. 당 현종이 신년에 성덕왕을 만나 보고 싶어 했던 모양이다. 왕이 병을 핑계로 김지량을 보내 신년하례를 했다. 그러자 현종이 긴 편지를 보내왔다.

“나는 매양 새벽에 일어나 우두커니 생각에 잠기고 어두운 밤에도 옷을 차려입고 어진 이를 기다려서 그 사람을 만나면 환하게 비추어 가르침을 받게 될 것을 생각했다. 그대를 만나면 나의 품은 뜻이 들어맞으리라고 여겼더니 지금 사신이 와서야 그대가 병고에 걸려 명령을 감당하지 못하게 된 것을 알았다, 멀리 떨어져서 생각으로만 걱정을 더할 뿐이다. 차츰 기후가 따뜻하고 화창해지면 병은 나으리라 생각한다”라고 하며 무늬 넣은 비단 500필과 비단 2500필을 보내 왔다.

만파식적은 근심도 전쟁도 없는 태평성대를 여는 치세의 도구다. 성덕왕은 신라땅에서 만파식적의 이상향을 펼쳐보였고 당 현종은 당나라에서 개원치세를 열었다. 그러나 성덕왕이 36년 치세를 안정적으로 이끌어 명군으로 기록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당 현종은 양귀비와 여자에 빠져 호색한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두 사람의 ‘융기’는 이렇게 막판에 평가가 갈렸다.
 

봉황대.

△굶주린 백성에게 곡식을 주고 죄인을 사면하다

『삼국사기』가 성덕왕의 36년 치세를 방대한 분량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삼국유사』의 기록은 초라하다 할 정도로 소략하다.

“제33대 성덕왕 신룡 2년 병오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의 굶주림이 심하였다. 정미 정월 초하루부터 7월 30일까지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곡식을 나누어 주었는데 한 사람에 하루 3승으로 하였다. 일을 마치고 계산해보니 모두 30만500석이었다. 왕이 태종대왕을 위해 봉덕사를 창건하고 인왕도량을 7일 동안 열어 크게 사면하였다. 이때부터 비로소 시중의 직을 두었다.” 이 기사가 ‘성덕왕’조의 전부다. 역대 왕이 가난하고 배고픈 백성을 구휼한 기사는 『삼국사기』에도 넘친다. 남해왕도 탈해왕도 미추왕도 많은 왕들이 창고를 열어 기근에 허덕이는 백성들을 구제했다. 그런데 이 기사처럼 구체적으로 곡식을 얼마나 줬는지를 자세하게 기록한 것은 없다. 이 기사에서 언급한 ‘3승’은 ‘3되’다. 무려 7개월 동안 한 사람당 하루 3되의 벼를 지급했으며 그 총량이 30만 500석이었다는 것이다. 삼국통일의 과실이 백성들에게 넘쳐간 것이다. 삼국사기는 성덕왕이 수차례 백성들을 구휼했으며 수시로 죄인들을 사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세를 감해주고 노인들을 불러 밥을 먹고 위로 했다. 성군이 나와 태평성대를 이어간 것이다. 통일신라의 전성기는 성덕왕에서 경덕왕까지 이어진다.

황복사지 3층 석탑. 석탑의 홤금사리함에서 성덕왕의 만수무강을 비는 기도문이 나왔다.

성덕왕의 자취는 낭산 동북쪽 끝자락 황복사지 삼층석탑에 남아 있다. 이 석탑에서 발견된 ‘황복사석탑금동사리함기’에서 “융기대왕의 생명이 산과 강처럼 길고 위상이 알천과 같이 크기를 바랍니다. 천명의 자손들은 무엇하나 빠짐없이 두루 갖추어 칠보의 상서로움을 천하에 드러내기를 바랍니다” 는 기도문이 나왔다. 황복사는 효소왕이 왕위에 오른 그해, 아버지인 신문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건립한 왕실 원찰이다. 말 그대로 황실의 번영을 비는 기도처인 것이다. 이 기도문은 효소왕에 이어 즉위한 성덕왕이 706년(성덕왕 5) 사리와 불상 등을 다시 탑 안에 넣을 때 함께 들어간 것이다.

성덕왕릉 귀부. 비신과 이수는 없어졌고 거북의 목을 부러졌다.
성덕왕릉 문인석. 사람과 짐승, 능비를 갖춘 최초의 능묘다.

성덕왕릉은 경주시 조양동에 있다. 왕릉은 화려하다. 네 마리의 사자가 왕릉 주변을 둘러싸 호위하고 있고 문인석과 무인석을 세웠다. 무덤의 판석 사이에는 탱주를 끼워 고정하고 삼각형 석재 사이에 환조의 십이지신상이 배치됐다. 석인 석수 능비를 갖춘 신라 최초의 형식이다.

성덕대왕신종. 아들인 경덕왕이 아버지의 공덕을 기려 제작했으나 혜공왕때 완성됐다.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성덕대왕신종은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의 공덕을 알리기 위해 제작에 들어갔다가 혜공왕 때 완성됐다. ‘에밀레종’이라 불리고 ‘봉덕사신종’으로 불린다. 봉덕사에 있던 이 종은 절이 폐사된 뒤 영묘사로 옮겼다가 봉황대 종각으로 옮겼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글·사진= 김동완 역사기행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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