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영어영재라는 말이 가당키나 해요?” 구내식당에서 누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젊은 동료의 아들이 모모한 대학의 ‘영어영재반’에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나온 뒤끝이었습니다. 그러자 다른 이가 한마디 거들었습니다. “언어영재는 확실히 있지요.” 그러면서 슬쩍 제 쪽을 쳐다보았습니다. 제가 ‘언어영재 지도교사 연수’를 담당하고 있는 것을 아는 분이었습니다. 그런 원론적인 대화에 일일이 참여하지 않은지가 좀 되어서 저는 묵묵히 밥만 먹었습니다. 저는 오직 “영재교육은 공동체의 이익에 복무할 때만 실시해야 한다”는 것만 주장할 뿐입니다. 개인의 행복을 위한 특별 교육은 각자가 알아서 해야 된다는 것이 저의 교육관입니다. 사실, 언어영재 지도교사 연수도 광역교육청 단위에서 위탁이 들어와서 하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언어영재라는 말을 쓰기는 하지만 그 말은 사실 좀 애매한 말입니다. 넓게 보면 수학, 과학, 정보영재들도 언어영재의 일원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언어가 일상 언어와 조금 다를 뿐이지요. 그러므로 언어영재만을 따로 떼어서 특별한 교육 방법을 모색한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보통은 문예 창작에 치우치기 쉬운데 그것 또한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문학은 성숙한 자기 인식을 바탕으로 언어가 꽃을 피우는 것인데 인격의 향기가 묻어나지 않는 화려한 수사에 몰두하다 보면 자칫 겉멋이 들어 정작 문학에 입문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청소년기 ‘학원 문단’을 누비던 친구들이 종내 문학적 성취를 내지 못하고 사라지는 경우를 우리는 많이 봅니다. 우리가 ‘머리 좋은 아이’로 부르는 아이들 모두가 언어 영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과론적으로 본다면, 어려운 고시공부를 거쳐서 판검사, 변호사가 되는 이들이나 소설가나 시인이 되는 이들이 언어 영재의 양극단일 것이라는 것 정도만 확인됩니다. 원론적으로는 이야기를 만드는 힘(서사 능력)과 유추를 통해 이해하는 힘(비유 능력), 전체를 보는 통찰 능력 등이 언어영재의 필수 요소입니다. 어쨌든 언어영재라는 이름으로 어린 아이들에게 문예창작을 가르치는 것은 항상 주의할 일입니다.


서론이 길어졌습니다. 오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영재의 사회적 책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제 전공이 소설창작과 문학교육이니 그쪽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언젠가 수업 중에 학생들에게 한 번 질문을 던진 적이 있습니다.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소설을 읽고 ‘정말이지 소설이라는 게 대단한 거구나!’라고 느낀 적이 언제 있었느냐?”라고 물었습니다. 60여명의 학생이 있었습니다만 아쉽게도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재차 물어도 묵묵부답이었습니다. 그런 독서 경험이 전무하다는 것입니다. 그 반응에 제가 좀 당황했습니다. 1,2년 뒤에는 모두 학교 선생님들이 될 사람들이었습니다. 제가 그때만 해도 좀 젊었을 때라 “그런 경험도 없이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지?”라는 말이 불쑥 튀어나왔습니다. 잠시 어색한 시간이 흘렀습니다. 영재들의 언어 표현에 대한 ‘감동의 경험’하나도 없는 선생님에게 어떻게 아이들을 맡길 수가 있을 것인가라는 걱정부터 앞섰습니다. 이 비정상적인 상황이 출세만능주의 배금주의 사회환경이 만들어낸 입시위주교육의 불가피한 결과라는 것을 인정한 것은 잠시 뒤의 일입니다. “늦지 않았으니 지금이라도 ‘감동’을 찾아서 독서여행을 떠나 보세요.”라고 마무리했습니다. 영재는 공공재입니다. 영재가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합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체육 각 영역에서 우리의 삶을 격려하고 선도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에게 특혜를 주고 존경심을 표합니다. 그들 영재들이 ‘인간의 향기’를 지닌 진정한 인격체로 자라날 수 있는 사회 환경과 제반 제도의 개선이 시급한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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