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혁 학강미술관장
김진혁 학강미술관장

이번 ‘I love 미술’ 마지막 칼럼에 석재 서병오(1862~1936)와 관련된 글을 적어본다. 올해가 지나는 현재,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2020서병오 특별전인 ‘석재를 바라보다-수묵의 확장’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어릴 때부터 서병오 선생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랐다. 필자의 외가 쪽 일송 신석우 큰할아버지와 서병오 선생은 함께 일본에도 같이 여행할 정도의 친분을 가졌다. 오죽하면 어머니와 외삼촌의 이름을 선생께서 지어 주셨다고 했다. 초등학교 시절, 소아과 의사이며 서예가인 우송 신대식 당숙댁을 방문하면 항상 서병오 선생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셨다.

“석재 선생은 조선의 천재이며 팔능거사로 못하는 것이 없는 분이지. 서예와 문인화는 모름지기 기와 운이 생동하는 필력을 담아야 된다고 하였다. 형상을 단정하게 다듬어서는 안 되고 대교약졸(大巧若拙)한 힘이 넘치는 획으로 불계공졸(不計工拙)의 경지를 알아야 된다”고 피력하였다. 아마도 서병오 선생의 문하에서 배움을 청할 때 익힌 서화에 관한 기본적 수묵정신의 핵심을 말씀해주셨다.

2020석재기념사업회 특별전(12.23~01.03)대구문화예술회관

서병오 선생은 어릴 때부터 동화사에 머물며 팔하 서석지에게 기초 글씨공부를 하였다. 한학은 13세 무렵부터 선산의 허훈과 달성의 곽종석에게 배우며 남다른 지도를 받았다. 18세 때는 운현궁에 머물던 대원군 이하응을 만나며 ‘석재(石齋)’라는 아호를 받았다. 추사 김정희의 제자인 대원군에게 영향을 직접 받으며 청년 시절의 글씨는 추사체와 대원군의 난법에 핍진했다. 청년시절 한양의 민씨 사대부들과 사귀었고 오원 장승업이 그림 그리는 것을 보면서 테크닉이 뛰어나지만 문자향이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40대에 중국 대륙을 주유하면서 상해의 해상파 작가들의 영향을 받았다. 포화, 오창석, 제백석 등과도 교류하면서 사군자를 포함한 대범한 먹의 농담을 받아들였고 대구경북에 소개도 하였다.

요즈음으로 치면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급의 국제적 수묵작가였다. 1922년 조선미술전람회가 생기자 서예와 사군자부에 심사위원이 되어 심사를 주도하였다. 석재 대나무와 난초는 일제강점기 최고의 인기 문인화 작품이었다. 그렇다보니 당시부터 방품이 나오기 시작했다. 최근에 많은 수 의 석재 문인화와 서예를 살펴보니 당시에 제자들 중에서 모작을 시도하여 판매하였다. 타도시의 근대서화가들 중에서도 서병오의 호방한 문인화를 흉내 내었다고 전한다.

서병오 작품은 초기, 중기, 말기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것을 모르는 일반 애호가들은 방작을 진품으로 잘못 알기도 했다. 올해 국립현대미술관이 개관한 지 50주년이 되었다. 개관 특별전으로 덕수궁 현대미술관에서 ‘미술관에 서(書)’라는 타이틀로 진행되었다.

출품된 많은 근대서예가들의 작품 중 첫 시작의 대표작가로 대구경북의 석재 서병오로부터 출발한다고 명실공히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인정하였다. 필자가 소장한 서병오 선생의 작품 중 행서작품을 빌려주어서 3개월간 전시하였다. 한국근대서예사에서 선생의 위상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이러한 한국을 대표하고 국제적으로 명성을 떨친 대가의 이름에 걸맞은 미술관이 고향인 대구에 마련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내년 봄부터 대구간송미술관이 착공에 들어간다고 하니 이참에 민족미술의 자존을 지킨 서병오 미술관도 계획되어야 할 것이다. 앞으로 서병오 미술관 건립을 위하여 석재기념사업회가 전면에 나서서 이루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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