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에 지친 길들은 허기에 시달렸다
굶주린 내장을 말려가며 버티는 동안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바람이
자궁 속에서 양수가 되어 주었다
출구 하나 없는 작은 방에서
바깥세상이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던 길들은
눈도 뜨지 못한 채 기약 없는 겨울잠에 빠져들었다
다행히 그해 겨울은 춥지 않아
익명의 손에 잡혀 기나긴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독방을 헤매다 쓰러져버린 길들은 전신 마취가 되어
한 방향으로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꼬일 대로 꼬여 뭉쳐 있는 기억들을
끓는 물속에 통째로 집어넣으니
엉킨 길들이 서서히 몸을 풀며
숨겨두었던 슬픔을 놓아주고 먼 길을 떠난다
텅 빈 뱃속을 채우는 뜨거운 밀물이 되어
좁은 바닷길을 헤치며 소리 없이 사라지는
한 끼의 애처로운 날들
미로 찾기 게임이 끝났다
길들이 사라지자 눈이 밝아졌다


<감상> 학생 시절 자취방에는 라면 박스만 있어도 든든한 적이 있었다. 겨우내 골방은 늘 연탄불을 피우지 않았다. 내 몸과 꿈들은 라면처럼 꼬일 대로 꼬여 있었다. 주인집 아줌마가 몰래 지핀 연탄불에 내 몸이 풀리듯, 희한하게 라면은 끓는 물 속에선 잘 풀렸다. 엉켜 있던 길들이 풀리면서 슬픔도 조금씩 풀리고, 캄캄한 내 꿈들도 밝아져 오곤 했다. 골방을 떠나 삼시세끼를 먹으면서 라면의 나날들은, 허기의 간주곡은 나를 기억해 주었다. <시인 손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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