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코로나 시대의 필수 과제가 ‘작은 나만의 행복 찾기’입니다. 힘센 역병에 맞서서 튼실하게 내 삶의 건강성을 지켜내려면 ‘소확행(小確幸)’ 하나씩은 꼭 있어야 합니다. 혼자 있어도 그것을 보며(행하며) 충만한 존재감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그런 자기 충만감은 밖에서부터 찾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안에서 차근차근 쌓아 올려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이 쉽지 않습니다. 살아 보면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참 많습니다. 실패를 무릅쓰고 자갈밭을 가는 황소처럼(올해가 소의 해군요) 꾸준하게 밀고 나가야 합니다.

제가 그렇게 ‘나만의 작은 행복’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있는 것은 글쓰기와 운동(검도)입니다. 행한 시간으로 보면 글쓰기는 40년, 운동은 30년을 넘고 있습니다. 두 경우 모두 ‘재능보다는 노력’으로 몸에 붙인 것들입니다. 그걸 어떻게 믿느냐고 반문하실 분이 계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특히 저의 지금 모습만 보고 계신 분들은 더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증거가 있습니다. 제 노력의 결과가 주변 사람들을 다 놀라게 했다는 것입니다. 소설가가 되었을 때도 그랬고 검도사범이 되었을 때도 그랬습니다. 모든 이들이 “저 사람이?”라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동안 제가 기울인 노력을 몰랐기 때문이었고 저의 재능 없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늘이 내려준 대로 살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내려 받은 것’과 ‘남에게 내려 준 것’ 사이에서 불평지기(不平之氣)를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 비교하는 마음에 휘둘리면 불행하게 됩니다. 기본적인 생계만 마련되면 그다음부터는 남의 것에는 눈을 돌리지 않아야 합니다. 내가 밀고 나갈 일을 분명히 정하고 그것에만 매진해야 합니다. 그 안에서 만족을 찾아야 합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걸 두고 속물 보수주의자의 발상이라고 나무라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절대 그런 것은 아니라는 걸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사회적 불평등이나 불공정을 용납하라는 말이 절대 아닙니다. 그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져야 하는 필수적인 ‘자기 충만감’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원래 자기만족에는 객관적인 기준이 없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작은 나만의 행복’이 특히 중하다는 말씀을 드릴 뿐입니다.

저는 그 ‘자기 충만감 추구’를 제 글쓰기의 최우선 목표로 삼습니다. 그것에 방해가 되는. 정치적, 사회적 여러 불평지기들은 가급적 쓰지 않습니다. 저라고 왜 불평지기가 없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것들은 저보다 훨씬 더 정확하고 분명하고 설득적으로 표현해내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의 재능과 노력으로 그분들을 따라갈 수 없음을 압니다. 그래서 그쪽은 열심히 ‘좋아요’만 누르는 것으로 대신합니다. 저의 그런 글쓰기에 간혹 ‘재미있고 유익하다’라는 화답이 올 때도 있습니다. 요즘 제 행복감의 팔 할은 거기서 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운동을 마음껏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더 한 것 같습니다.

오늘, 한 책을 읽다 보니 ‘자기애로서의 자화상 그리기’라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책의 설명에 따르면, 자화상이 본격적인 미술 장르로 나타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한 존중감을 예술 세계 안으로 가지고 들어온 연후에야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자화상이라는 것이 나타난 이후로 인간은 줄곧 그 ‘자기 얼굴 그리기’에 모종의, 불순한, 이상화된, 허상(虛像)을 가미해왔다는 것입니다. 책에서는 그것이 르네상스기의 휴머니즘, 즉 인간중심주의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인간은 자화상이 아니더라도 늘 그렇게 ‘허상’을 쫓으며 살아갑니다. ‘작은 나만의 행복’은 그런 ‘자기만의 허상’ 하나를 벗기는 즐거움이기도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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