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 대둔사 경장·상주 남장사 연산회 괘불도·문경 봉암사 마애여래좌상

상주 남장사 영산회 괘불도-동경과 복장낭
문화재청이 상주 남장사 영산회 괘불도 및 복장유물과 구미 대둔사 경장을 보물로 각각 지정 예고하고 문경 봉암사 마애여래좌상 등 조선 시대 불교문화재 3건을 보물로 지정했다.

이번에 지정 예고된 구미 대둔사 경장(龜尾 大芚寺 經欌)은 1630년(인조 8)에 조성된 경장(불교경전을 보관한 장)으로, 조선 시대 불교 목공예품 중 명문을 통해 제작 시기가 명확하게 파악된 매우 희소한 사례다. 경장으로서는 국보 제328호 ‘예천 용문사 대장전과 윤장대(醴泉 龍門寺 大藏殿과 輪藏臺)’을 제외하면 처음으로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 예고되는 것이다.

조선 후기 불교 목공예품으로 경장을 비롯해 목어(木魚), 불연(불연, 의식용 가마), 촛대, 업경대(業鏡臺, 생전에 지은 죄를 비추는 거울), 대좌(臺座, 불보살이 앉은 자리), 불단(佛壇) 등 다양한 종류가 제작됐으나, ‘구미 대둔사 경장’처럼 제작 연대와 제작자를 알 수 있는 작품은 매우 드물다. 이러한 점에서 ‘구미 대둔사 경장’은 왼쪽 경장의 뒷면과 밑면에 제작 시기와 제작자, 용도 등을 두루 알려주는 기록이 남아 있어 조선 후기 목공예를 연구에 있어 중요한 기준이 된다.

전체적인 형태는 장식성이 강한 화려한 기법 보다는 단순하고 소박한 모습이며, 좌우 정면에 큰 연꽃과 모란을 배치해 조각과 회화적인 요소가 잘 어우러져 있다.

이 경장은 좌우 경장의 문짝 안쪽에 각각 2구씩 그려진 사천왕상을 배치해 원래부터 한 쌍으로 제작돼 대웅전의 불단 좌우에 놓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일부 수리된 부분이 있지만, 제작 당시의 문양과 채색 기법을 상실하지 않고 대부분 간직하고 있어 17세기 채색기법 연구와 선묘불화(線描佛畵)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특히, 사천왕도는 17세기 선묘불화의 유일한 사례로 주목된다.

명문을 통해 제작시기와 제작 장인을 명확히 알 수 있어 학술ㆍ공예사 면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 아울러 규모가 크고 조형적으로 우수해 조선 후기 불교목공예의 편년과 도상연구의 기준이 될 수 있으므로, 보물로 지정해 보존할 가치가 충분하다.
상주 남장사 영산회 괘불도(1776년)
상주 남장사 영산회 괘불도 및 복장유물(尙州 南長寺 靈山會 掛佛圖 및 腹藏遺物)은 높이 11m에 이르는 대형 불화 1폭과 각종 복장물을 넣은 복장낭(腹藏囊), 복장낭을 보관한 함을 포함한 복장유물로 구성됐다. 이처럼 불화와 함께 복장유물을 놓은 복장낭이 온전하게 일괄로 남아 있는 사례는 매우 드물다.

이 괘불도는 1776년(정조 1) 조선 후기 대표적 수화승 유성(有誠)을 비롯한 경상도 지역에서 활약한 화승 23여명이 참여해 제작한 18세기 후반기 불화의 기준이 되는 작품이다. 또한, 조선 17,18세기 제작 괘불이 여러 번 보수를 거치는 동안 원래의 모습을 상실한 것과 달리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다는 점은 이 괘불만의 독보적인 가치로 꼽을 수 있다.

화면 중앙에 압도적인 크기로 배치된 건장한 체구의 석가여래는 마치 앞으로 걸어 나오는 듯 다른 존상들보다 돋보이게 표현했고, 옷 주름은 명암과 아기자기한 문양을 넣어 입체적이다. 좌우, 위아래에 배치된 보살과 사천왕, 용왕과 용녀 등의 모습 또한 권위적이지 않은 친근한 얼굴에 존격(尊格)에 따라 신체의 색을 달리해 강약을 조절한 점 등 작자의 재치와 개성을 발휘해 예술성이 높은 작품으로, 18세기 불교회화 연구에 중요한 참고가 된다.

또한, 지정예고와 더불어 불교문화재 3건도 보물로 지정됐다.
보물 제2108호 문경 봉암사 마애미륵여래좌상-정면
보물 제2108호 문경 봉암사 마애미륵여래좌상(聞慶 鳳巖寺 磨崖彌勒如來坐像)은 1663년(현종 4)에 제작된 마애불로서, 경북 봉암사 옥석대(백운대라고도 함)에 위치해 있다. 제작 시기와 주관자, 존상(尊像) 명칭은 풍계 명찰(楓溪 明察, 1640~1708)의 문집 풍계집(楓溪集)에 수록된 환적당대사 행장(幻寂堂大師 行狀)을 통해 확인된다. 명찰은 17세기 승려 환적당 의천(幻寂堂 義天)의 제자로, 이 책에 의천이 발원해 마애불을 조성한 사실이 기록돼 있다.

환적당 의천은 1603년(선조 36) 경북 구미에서 태어나 11세에 출가해 88세 되던 1690년에 해인사 백련암에서 입적. 환적당이 봉암사에서 처음 수행한 것은 60세(1662년)부터 61세까지로, 행장에 의하면 백운대에 이 마애미륵여래좌상을 조성하고, 사적비를 세웠으며 환적암(幻寂庵)을 지었다고 한다.
보물 제2108호 문경 봉암사 마애미륵여래좌상과 백운대
좌상은 높이가 539.6cm, 너비가 502.6cm 정도이며 머리 주변을 깊게 파서 광배 형상을 만들고, 위는 깊고 아래쪽으로 내려오면서 점차 얕은 부조(浮彫)로 처리됐다. 둥글고 갸름한 얼굴에 오뚝한 콧날, 부드러운 눈매, 단정히 다문 입 등이 자비롭고 인자한 인상을 풍긴다. 특히, 얼굴과 자세, 착의법 등 세부표현에서 나주 죽림사 세존괘불탱(1622), 구례 화엄사 영산회괘불탱(1653년) 과 같은 17세기 괘불(掛佛) 표현요소를 찾아 볼 수 있어 불화와 상관관계를 엿볼 수 있다.

이 불상의 수인(手印, 불보살을 상징하는 손모양)은 미륵불의 수인 중 하나인 용화수인(龍華手印)으로, 두 손으로 긴 다발형의 꽃가지를 쥐고 있는 모양이다. 1663년이라는 뚜렷한 제작연대를 염두에 둘 때 마애불 도상이 확인된 기준작으로 중요한 의의가 있다.

문헌을 통해 제작 시기와 제작 동기, 주관자, 도상 등에 대해 고증이 가능한 몇 안 되는 마애불이라는 점, 조선 후기 마애불 연구뿐만 아니라 미륵불상의 도상 연구에 있어서도 절대적인 자료라는 점에서 역사·학술 가치가 높다. 또한, 사실적인 조각수법과 당대 불화와 연관성이 있는 창의적 표현 등 예술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되므로, 보물로 지정해 보존할 가치가 충분하다.

곽성일 기자
곽성일 기자 kwak@kyongbuk.com

행정사회부 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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