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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이야기] 17. 김천 봉산면 봉계마을
[우리동네 이야기] 17. 김천 봉산면 봉계마을
  • 김부신 기자
  • 승인 2021년 01월 10일 18시 43분
  • 지면게재일 2021년 01월 11일 월요일
  • 13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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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 간 마을 이름삼아 '인의예지신' 지켜온 '충효의 고장'
봉계마을(인의리, 예지리, 신리)

유교에서 사람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 기본적인 도리이자 덕목을 일컬어 오상(五常) 또는 오륜(五倫)이라 하는 데 곧,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다.

김천시 봉산면에는 이를 본받고 지키기 위해 이를 마을 이름으로 삼아 500년 전통을 이어온 봉계마을로 통칭되는 인의리, 예지리, 신리가 있다.

이들 마을은 난함산(卵含山)에서 발원한 봉계천을 사이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데 행정상 인의, 예지, 신리로 나누어져 있으나 봉계대동회라는 조직이 오래전부터 이어져 올만치 한 마을이나 마찬가지로 정겹게 살고 있다.

봉계라는 지명은 마을을 개척할 당시에 일대 지형이 봉황새와 같고 하천이 맑아 봉황새 봉(鳳)자에 시내 계(溪)자를 따서 봉계(鳳溪)라 했다고 전해진다.

마을의 형성은 서산부원군 정윤홍(鄭允弘)이 조선의 개국에 반대하며 김천으로 낙향해 이곳에 터를 잡고 살면서 유교의 근본을 잃지 않겠다는 뜻으로 마을 이름을 인의예지신으로 삼은 것이라고 한다.

서산정씨가 처음 터를 잡은 후 차례로 창녕조씨, 영일정씨가 입향하면서 집성촌이 형성됐고 많은 학자와 충신, 효자, 열녀를 배출하며 봉계는 김천의 대표적인 반촌(班村)으로 자리매김하며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87호로 지정된 영천이씨 정려각과 절의천(節義泉)으로 불리는 예스러운 우물이 길손을 맞는다. 영천이씨 부인은 1598년 정유재란 때 난함산으로 피난을 갔다가 왜병에게 붙잡히게 되자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자결했고 지역유림의 상소로 1633년 (인조11)에 나라에서 정려가 내린 열녀이다. 사람들은 정려각 앞에 우물을 파 이름을 절의천이라 해 부인의 갸륵한 정신을 기렸다.
 

영천이씨정려각과 절의천

 

영천이씨 정려각에서 봉계천 맞은편에는 조선시대 말 효자로 이름난 창녕조씨 조응방의 정려각이 있는데 조응방(曺應邦)은 부친의 병을 고치기 위해 단지주혈(斷指注血)을 하는 등 지극정성으로 봉양하고 부친상을 당하자 3년간 시묘살이를 해 1875년(고종 12년) 지역유림의 청원으로 정려가 내렸다.

 

 

 

 

조응방 정려각

 

봉계로 속한 마을중 마을입구에는 주로 영일정씨가 집성을 이루었는데 입향조는 세조 때 홍문관교리를 지낸 정이교(鄭以僑)로 이후부터 봉계는 영일정씨교리공파 집성촌을 형성하게 된다.

정이교의 봉계 입향은 단종복위사건과 관련이 있는데 금성대군과 단종복위운동을 주도한 순흥부사 이보흠의 외가친족인 정이교는 연좌(連坐)를 피해 부친과 친분이 있던 김천의 절제사 최한백(崔漢伯)의 집에 몸을 의탁했다가 사위가 되면서 처향에 터를 잡게 됐던 것이다.

이후 이 집안에서 많은 인물이 배출됐는데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정유번(鄭惟藩)과 영천이씨 정려각의 주인공인 부인의 남편 정유한(鄭維翰)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의병장으로서 큰 공을 세웠다.

근세에 들어 정완영은 시조시인협회장으로서 우리나라 시조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겼고,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정승화는 1979년 12·12사태 때 계엄사령관으로서 신군부에 의해 이등병으로 강등되는 수모를 겪었다가 영예를 회복하고 성우회장을 지냈다. 마을 입구에는 정완영 시인과 정승화 장군의 추모비가 세워져 마을의 위상을 상징하고 있다.

마을 중앙에는 봉암서당(鳳巖書堂)이 있는데 1540년(중종 35년)에 영일정씨 문중에서 자제교육을 위해 건립한 유서 깊은 서당이다.

 

 

 

 

봉암서당

 

이 서당은 원래 봉계마을 입구에 세우고 도장서당(道藏書堂)이라 했는데 수해로 침수되어 1757년(영조 32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기고 봉암서당으로 고쳤다고 한다.

마을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국가등록문화재 제775호로 지정된 황산댁(黃山宅)이 오랜 풍상 속에서도 꼿꼿이 서 있다.

 

 

 

 

황산댁

 

황산댁의 택호(宅號)인 황산(黃山)은 조한규(曺翰奎)의 부인 친정이 거창신씨 집성촌인 경남 거창군 위천면 황산마을인데서 연유가 됐다. 사랑채 대들보에 ‘上元五十八年辛酉八月拾參日未時立柱上樑’ 이라고 기록된 것으로 미루어 1801년(순조 1년) 이조참의 조언명(曺彦明)이 건립한 것으로 보인다.

가옥은 문간채와 사랑채, 안채, 곳간채로 이루어졌으며 사랑채와 안채를 구분 짓는 내외문이 별도로 나 있으며 안채에서 텃밭으로 연결되는 쪽문이 남아있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600석의 쌀을 저장했다는 곳간채는 김천지역 고택에서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으로서 대대로 천석꾼으로 불린 이 이 집안의 재력을 상징이기도 하다.

황산댁은 우리나라 대중가요를 크게 부흥시킨 작사가 조경환(예명 고려성)과 작곡가 조광환(예명 나화랑) 형제가 나고 자란 생가로 더욱 유명해졌다. 고려성은 나그네 설움, 삼각산손님, 선창의 블루스, 제물포 아가씨 등을 작사했으며 나화랑은 열아홉 순정, 무너진 사랑탑, 청포도 사랑, 뽕따러 가세, 울산 큰 애기 등 주옥같은 명곡을 작곡했다. 수 년 전부터 사랑채 앞에서 야간고택음악회가 열려 황산댁의 역사와 형제음악가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마을 북쪽 극락산 자락에는 서산정씨 입향조인 부성부원군 정윤홍(鄭允弘)의 묘와 관련한 분통골전설이 전해진다.

정윤홍은 다섯 아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며 승승장구하자 유언으로 자신의 묘터를 잡으면서 관을 11개 묻으라고 당부했다는 것이다.

이를 가볍게 들은 자손들이 한 개쯤 덜 묻으면 어떠랴하고 10개의 관만 묻었는데 이후 서산정씨 가문은 번창하게 됐고 이를 경계한 조정에서 그 전후사정을 알아보니 부성부원군의 묘자리가 명당인데서 비롯됐다 해 관을 파보게 했다.

 

해마다 개최되는 매계백일장

묘를 파헤쳐 보니 연이어 아홉 개의 빈 관이 나왔고 지친 관리들이 포기하려다 마지막 한 개만 더 파서 10개를 채우자며 10개째 관을 열어보니 뽀오얀 김이 서리며 학 한 마리가 날아 나왔다는 것이다.

이후 서산정씨 집안이 차츰 쇠락해졌다고 하는데 정윤홍의 유언한 대로 11개의 관을 모두 묻었더라면 진짜 관은 보존되고 명당의 음덕을 입은 집안도 계속 번창했을 것이라며 한 개의 관을 더 묻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분통이 터진다 해 이 골짜기를 분통골이라 부른다고 전해진다.

서산정씨 이후에 창녕조씨 조심(曺深)이 입향해 창녕조씨 집성촌을 이루었는데 조위(曺偉), 조신(曺伸) 등 당대의 걸출한 문장가를 배출했다.

분통골로부터 멀지 않은 거리에는 율수재(聿修齋)라는 유서 깊은 재실이 있다.

율수재

율수재는 조위와 조신이 태어난 옛 집터로 조위는 뛰어난 문장으로 성종의 총애를 받으며 도승지와 성균관 대사성을 지냈다. 동생인 적암 조신은 서얼 출신의 이름난 역관으로 문장가로서도 이름이 높아 효강공(孝康公)이란 시호가 내렸다.

특히 영남 사림의 지도자로 추앙받던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은 아버지 김숙자가 개령현감을 지낸 인연으로 봉계 창녕조씨 문중의 매계 누나와 결혼해 처남매부지간이 된다.

무오사화, 갑자사화 때 점필재가 화를 입으면서 매계를 비롯한 봉계의 창녕조씨 문중도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조위는 당나라 두보(杜甫)의 시를 최초로 언해한 ‘두시언해(杜詩諺解)’와 최초의 유배가사인 ‘만분가(萬憤歌)’를 집필한 조선 전기의 명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는데 김천문화원에서는 1980년부터 매년 매계백일장을 개최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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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신 기자 kbs@kyongbu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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