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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광장] 적(敵)과의 동침(同寢)
[아침광장] 적(敵)과의 동침(同寢)
  • 원태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 승인 2021년 01월 20일 16시 23분
  • 지면게재일 2021년 01월 21일 목요일
  • 19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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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태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원태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1929년 10월, 금본위제와 저금리 및 시장 방임주의가 뒷받침하였던 미국 전간기(戰間期)의 호황은 월가의 붕괴(Wall Street Crash)로 그 종말을 고하였다. 1918년에 종결된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대규모 생산력과 현대적 산업 경영 방식을 갖춘 미국 기업들은 라디오와 자동차와 같은 재화를 쏟아내었고, 이를 소비하는 데에 정신이 없었던 미국인들은 호황이 영원할 것이라는 장밋빛 환상에 빠져 은행에서 마구잡이로 돈을 빌려 주식시장에 미친 듯이 투자하였다. 이로 인해 1921부터 1929년까지 미국 주식시장의 주가는 무려 4배 이상 증가하였다. 그러나 미국 산업의 과잉설비상태와 미국 정부의 긴축통화정책으로 인해 경제에 적신호가 켜졌음을 일찍 눈치챈 투자자들이 주식을 1929년에 대거 매도하기 시작하자, 패닉에 빠진 일반인들 또한 주식을 마구 팔아버리면서 시장은 폭락하였다. 이에 투자자들에게 빌려준 돈을 회수하지 못하게 된 미국 은행들이 상당수 문을 닫고 미국인들의 소비가 급격하게 위축되면서 1929년에 3%에 머물렀던 미국의 실업률이 1933년에 25%까지 치솟는 대공황이 발생하였다.

경제 활성화를 위해 미국으로의 수출 등에 크게 의존하고 있던 영국 또한 대공황의 타격을 피할 수 없었다. 이미 1929년 중반에 100만 명을 기록했던 영국의 실업자 수가 1년 후인 1930년 말에 250만 명으로 급증하자 1929년 6월 이래 집권하고 있던 램지 맥도날드(Ramsay MacDonald) 총리의 노동당 정부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실업자의 수가 크게 증가하면서 이들에게 지급되었던 실업수당 또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수 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1932년 4월이 되면 재정 적자가 무려 1억2천백만 파운드에 이를 것이라는 정부보고서가 1931년 7월에 출간되자 런던 금융시장 투자자들은 크게 불안해하였다. 이에 맥도날드는 재정 적자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 공공부문의 임금인하 및 실업수당의 대폭삭감을 단행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노동계층의 권익보호라는 기치를 내세운 노동당 정부가 어찌 실업수당을 삭감할 수 있느냐며 이를 밀어붙일 경우 국무위원 20명 중 9명이 정부에서 사임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날림으로써 맥도날드는 심각한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당내 분열로 인해 사실상 통치 불능 상태에 빠지게 된 맥도날드는 내각 총사퇴를 추진하였다. 당시 제1야당이었던 보수당의 당수 스탠리 볼드윈(Stanley Baldwin)에게는 이러한 노동당 정부의 위기야말로 보수당이 정권을 잡고 자신이 총리직에 오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임이 분명하였다. 그러나 좌파 지도자가 공공지출 삭감을 주도해야만 영국 경제 위기의 심각성을 국민이 제대로 공감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볼드윈은 자신이 아닌 맥도날드가 총리직을 맡는 보수당 중심의 연립 정부 구성을 제안하였다. 이에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의 정책이 꼭 필요하다고 믿었던 맥도날드와 그를 지지한 노동당 의원 몇 명이 제안을 수락하고 노동당을 탈당하면서 1931년 8월에 ‘거국 내각’이 구성될 수 있었고, 결국 국민의 이해와 지지를 얻는 데에 성공한 이 연립 정부는 조각(組閣)한 지 두 달 만인 1931년 10월의 총선에서 노동당을 누르고 압승을 거둘 수 있었다.

지금의 대한민국 야권은 현 정부를 제대로 견제하고 균형 잡힌 민주주의를 복원하기 위해 다 같이 힘을 모아도 크게 부족할 판이다. 그러나 일신의 영달과 당파적 이해관계라는 편협한 이기주의로 인해 재보궐선거라는 국민의 준엄한 심판을 앞두고 또 한번 실망스러운 분열 양상을 보이고 있다. 맥도날드와 볼드윈처럼 대의를 위하여 ‘적과의 동침’을 하지는 못할지언정, 같은 편끼리도 마음을 맞추지 못하면서 국민에게 정권을 심판할 기회를 달라고 요구한다면 그 뻔뻔함에 국민이 혀를 내두를 것이다. 자신들이 잘하고 있기 때문에 지지율이 올라갔다는 착각에서 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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