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식 포항지역위원회 위원·시인
이상식 포항지역위원회 위원·시인

사람은 토포필리아를 추구하는 존재다. 희랍어인 장소를 뜻하는 ‘토포스’와 사랑을 나타내는 ‘필리아’를 합성한 개념. 요컨대 물리적 영역에 인간의 감정이 투사된 의미 공간이 장소인 셈이다. 인류가 살았던 땅에는 어디든 토포필리아 흔적이 남았다.

장소에 이름을 짓는 행위는 나와의 관계를 맺는 첫 단추다. 예컨대 ‘북위 37도 동경 129도’라는 방위는 별다른 감각이 없으나, 정동진이란 명칭이 부여되는 순간 감흥이 떠오른다. 새해 일출과 모래시계와 고현정이 연상된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란 작품은 이를 절묘하게 묘사한다.

대부분 도시는 나름의 상징을 가졌다. 주로 스토리를 가진 인물이나 특별한 동식물이 주인공. 동물들 가운데 소도 등장 빈도가 높은 편이다. 한국의 경우 소와 연계된 지명은 용과 말에 이어 세 번째로 흔하다.

러시아 문화 예술의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 보름간 머물렀던 명소라 추억이 적잖다. 그곳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는 대제로 칭하는 표트르 1세가 건설했다. 에르미타주 미술관인 겨울궁전 뒤쪽의 네바 강변에 우뚝하다. 곳곳에 토끼 조형물이 보인다. 토끼를 가리키는 자야치 섬에 지은 탓이다.

카를로비 바리는 체코의 3대 온천지로 꼽힌다. 온천욕이 아니라 온천수를 마시는 것이 주목적. 도처에 사슴 동상이 놓였다. 14세기 무렵 카를 4세의 사슴과 맺어진 얘기가 전하기 때문이다. 작은 분수대처럼 생긴 ‘콜로나다’에서 마시는 물은 엄청 뜨겁다.

소는 이미지가 좋은 영물이다. 과묵·성실·뚝심 그리고 의로움의 표상. 더불어 사는 하인처럼 대접해 생구라 부르기도 한다. 깨달음의 과정을 그린 불교 설화인 십우도가 있고, 승려 출신 독립운동가 한용운의 자택은 심우장으로 불린다. 게다가 황소는 숭고함이란 관념을 불러일으킨다.

알랭 드 보통의 에세이 ‘여행의 기술’은 거세된 수소와 그렇지 않은 황소의 비유로 숭고한 감정을 표현한다. 이는 대자연 앞에서 인간이 만나는 한계 혹은 나약함에 다름 아니다. 수컷 건우는 힘이 강한 짐승이나 유순해서 웅장하진 않다. 반면 거세되지 않은 황소는 거칠면서 야성미가 넘친다.

그런 까닭일까. 황소상은 기억에 남는 조형물. 그중에 맨해튼 월스트리트 심벌인 ‘돌진하는 황소상’은 무척 강렬했다. 대지를 박차는 흑갈색 뒤태의 근육이 실감나는 동상. 중국 윈난 성의 쿤밍역 광장 황소상은 그 배후에 붙은 현수막이 한층 두드러진다. 민주·공정·법치 같은 사회주의 핵심 가치관이 적힌 시뻘건 구호들. 또한 상하이 와이탄 황소상은 긴 뿔의 못생긴 형태다.

지난해 마지막 주의 EBS 프로 ‘한국기행’은 소를 주제로 방영됐다. 미장원을 운영하면서 싸움소 두 마리를 키우는 우리 지역 청도의 중년 여성. 마치 자식처럼 돌보는 애정은 각별한 인연을 떠올린다. 동요 ‘송아지 송아지 얼룩송아지’가 칡소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고구려 벽화에도 나온다고.

국토지리정보원 집계에 의하면 전국의 소와 관련된 지명은 모두 731개라고 한다. 경북은 94곳을 가졌고 대구엔 한 군데가 있었다. 내가 사는 동네 이름은 포항의 우현동. 역시 소와 연관된 사연을 품었다. ‘소가 있는 고개’라는 한자어. 대략 일만 년 전쯤 중동에서 가축화된 소는 인류와 고락을 함께한 동반자다. 올해는 소띠들 해이다. 각자의 희원을 소처럼 뚜벅뚜벅 이루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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