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개 문중 경쟁하며 꽃피운 숭조·강학·유교 문화유산의 보고
문경시 산북면 내화리(內化里) 마을은 숫돌봉(595.3m)아래 금천(錦川)을 끼고 곳곳에 마을 사람들이 공유하고 이용하는 각종 영조물(營造物)이 배치돼 있다.
59번 국도가 남북으로 놓여있고 마을 안길은 이 국도에서 동서로 연결돼 100가구 내외가 살고 있다. 문경시청에서 16.5㎞ 동북쪽에 있으며, 국도가 동로면 마광리와 접한다.
이곳 마을주민 장사원(69) 전 문경시의회 의원은 “얘부터 이곳은 ‘금당맛질 반 서울이요, 화장 칡들 살기 좋다’고 이름난 곳으로 조선 성종 7년(1475) 인동장씨·반남박씨·예안김씨·영월엄씨 등이 차례로 세거하면서 문과(대과)급제 3인(장씨 1명·김씨 2명), 진사(소과)6명 등이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또한 근세에는 박사 9명, 교수 5명, 사·행시, 지방의원 등이 배출되는 등 4대 문중이 현재까지 한 번의 소송도 없이 화장 8경과 화장구곡을 노래하면서 비교적 풍요롭게 지내는 전통 유교마을이라고 소개했다.
특히 재실·정자·종택·묘우·사당·유허비 등이 문경시 자연부락 중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것은 물론 전국에서도 드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같이 이 마을에는 문경시보호문화유산 제3호인 선성김씨 종택과 사당, 당산목, 성황당 등 일반적인 전통마을들의 영조물 외에 인동장씨, 반남박씨, 선성김씨, 영월 엄씨 네 문중이 경쟁하듯이 세운 숭조(崇祖), 강학(講學) 문화유산이 즐비하다.
내화리는 본래 예천군 소속으로 1895년(고종 32년) 11개 마을을 엮어 화장면(花庄面)이 되면서 면 소재지였다. 그 후 1906년 1월 19일 상주군 산북면에 편입됐고, 그해 9월 24일 문경군 산북면으로 이관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양천허씨(陽川許氏)가 처음으로 이주 정착해 수년 전까지 그 후손이 두 집 살았으나, 지금은 없고, 조선조 성종 8년(1477년) 예조참판에서 물러나 1482년 이곳으로 입향한 인동장씨 장말손(張末孫)의 후손들이 번성하게 살았다.
그러나 인동장씨도 입향 100여 년 후 손자 언상(1529~1609)이 종가 송설헌(松雪軒)을 영주시 장수면 꽃계마을로 옮겼으며, 그 후 하나둘 떠나기 시작해 현재는 다섯 집만 남았다.
오히려 20여 년 뒤 연산군 때 이 마을로 입향한 장말손(張末孫)의 사위 반남(潘南) 박인양(朴寅亮)의 후손과 이보다 100년 뒤 입향한 선성김씨(宣城金氏) 후손, 또 이보다 100년 뒤에 입향한 영월엄씨(寧越嚴氏)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마을 이름 화장(花庄)은 인근에 폐사된 화장사(華藏寺)에서 유래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고, 이 폐사지는 ‘탑들’로 지금도 불리고 있으며, 여기에 남아 있는 3층 석탑은 1963년 보물 제51호로 지정돼 있다.
이 마을 동북쪽 동로 방면 1㎞쯤에는 노루목고개가 있으며, 이곳에는 6·25 직전인 1949년 9월 16일 이른 아침 무장공비에게 속아 동로로 출동하던 문경경찰서 이무옥 서장 등 경찰과 민간인 15명이 전사한 ‘경찰전공비’가 있어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단면을 증언하고 있다.
조선시대 전통 마을을 뛰어넘어 6개의 정각(亭閣)과 4개의 재사(齋舍), 1개의 종택, 1개의 보물, 지금은 없어진 많은 정재당헌(亭齋堂軒) 등 유별난 마을이다.
△마을 내력과 연복군(延福君) 장말손(張末孫).
이 마을의 입구에는 2019년 11월 16일에 세운 연복군 송설헌 장말손 선생의 유허비가 있어 마을 내력 일부분을 알 수 있다. 이 유허비에는 연복군이 1482년에 이곳으로 입향했다고 기록돼 있다. 지금으로부터 538년 전이다. 그 이전에 양천허씨가 살았다고 하니, 이 마을은 최소한 조선시대 초 이전에 개척된 것임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연복군의 맏사위 반남박씨(潘南朴氏) 인량(寅亮)은 연복군 입향 20여 년 뒤 이 마을로 입향했고, 연복군은 세조 하사품 중 옥피리를 이 맏딸에게 전하고, 그 맏딸은 또 맏딸에게 대대로 전해 이를 매개로 다른 문중과 공유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는 그리 오래 전하지 못하고, 외외손(外外孫)인 예천권씨(醴泉權氏) 문중에 전한 후 지금까지 보관해 오고 있다.
이는 외외손녀가 아들만 두고 딸을 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연복군이 받은 하사 품 중 패도(佩刀)는 보물이 되었고, 최근 예천권씨 문중은 자신들이 보관하고 있는 옥피리를 보물로 지정받기 위해 절차를 밟고 있는 것으로 알려 졌다.
△문경 내화리 삼층석탑(聞慶 內化里 三層石塔).
문경 내화리 삼층석탑(聞慶 內化里 三層石塔)은 통일신라시대 삼층석탑이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51호로 지정됐다.
높이 4.26m. 이곳에 화장사(華藏寺)가 있었고, 약 100년 전에 불탄 것으로 전해진다. 불상 등은 인근 대승사(大乘寺)로 옮겨가고 이 탑만 남아 있다. 단층 기단(基壇)에 4매의 지대석(地臺石)으로 구성했고, 중석(中石)도 4매의 판석(板石)으로 구성했다. 옥신(屋身), 옥개(屋蓋) 돌은 각각 하나로 구성했고, 옥신석에는 층마다 우주가 모각돼 있다.
△ 선성김씨(宣城金氏) 종택(宗宅).
1646년 입향조 김단(1610~1680)의 장인인 사고처사 권극해(權克諧)가 건축했다고 전한다. 사랑채는 대체로 원형을 유지하고 있고, 안채는 5대 주손 김낙룡(金樂龍, 1790~1870)이 개축했다. 종택 가까이 사당(祠堂)이 있고, 사랑채 앞에 산수정(山水亭)이 있다. 문경시 보호문화유산 제3호다.
△화장산성(化庄山城).
숫돌봉 8부 능선에 있다. 높이 1.2m, 너비 1m, 길이 240m 정도의 돌로 쌓은 성이다. 남서쪽으로 100여m의 흙으로 쌓은 성이 연결돼 있다. 임진왜란 때 용궁현감 우복룡이 이곳에서 적의 진로를 막고 적을 사로잡았다는 기록이 성재(省齋) 고상증(高相曾)의 ‘용사실기’에 있다. 또 동학란(1894~1985) 때 예천 동학교도들이 이곳에서 농성했다는 말이 전한다.
△ 경찰순직위령비(경찰전공비).
1949년 9월 16일 오전 7시 내화리 노루목고개에서 공비의 습격으로 경찰관 12명이 사망하고, 3명이 부상했으며, 민간인 3명이 사망한 것을 위무하기 위해 세웠다.
이 사건은 전날 밤 11시 동로지서에서 경비 근무 중이던 경찰특공대원 2명과 민간인 1명이 공비들의 습격으로 사망했고, 이날 새벽 보고를 받은 문경경찰서 이무옥 서장 등 28명의 경찰관과 민보단이 지프와 트럭을 타고 출동하다가 이곳에 매복한 공비들에게 습격당한 것이다.
원래 이 비석은 1954년 12월 25일 사건 현장에 ‘순직경찰관기념비’를 세웠던 것으로, 1981년 8월 2일 현재 이곳에 ‘경찰전공비’로 세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