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집돌이인 저에게 지치지 않고 한결같이 일용할 양식을 공급하는 아내가 가끔씩 아침을 빵으로 주십니다. 먹여 살리는 일의 거룩함을 모르지 않는 아내는 그때마다 저의 동의를 구합니다. “빵도 괜찮죠?”, 그렇게 은근한 목소리로 묻습니다. 저는 즉시 “물론이죠!”라고 답합니다. 순종하는 것 또한 부부 사이의 거룩한 일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순간 인간의 혀로 토를 단다면(“어제도 빵을 먹었잖아요?”, “오늘 아침은 속이 달아서 이팝에 소고기국을 먹고 싶은데요.”) 저는 인간 이하의 존재가 됩니다. 즉각적인 동의와 함께 진정 고마운 마음으로 “그럼요, 괜찮죠! 내가 원래 빵을 좋아하잖아요!”라고 해야 합니다. 그래야 (믿고 사는)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도 저는 빵을 좋아합니다. 동네 빵 가게 아가씨들은 제가 가면 아주 반색을 합니다. 수십 년 변치 않는 단골손님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다 믿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자명합니다. 제가 그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빵’이 완벽하게 해결된 이후 제겐 아무런 고민이 없습니다. 간혹 꿈자리가 뒤숭숭할 때가 있는 것 빼고는 사는데 아무런 불편함이 없습니다. ‘빵’으로 해결 안 되는 게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도 아무도 볼 수 없는, 저만 잠깐 볼 수 있는(꿈은 곧 기억에서 사라집니다) 제 꿈 안에서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저의 꿈자리가 늘 불행한 것만도 아닙니다. 그 반대도 가끔씩 있습니다. 10년에 한 번은 황홀한 꿈을 꿀 때도 있습니다. 어제 잠깐 낮잠을 청했을 때도 오랜만에 행복한 꿈자리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어린 시절 하루하루의 ‘빵’ 때문에 시도 때도 없이 좌불안석이던 때가 있었습니다. 결혼할 때 아내가 한 말이 생각납니다. “없어도 어떻게 이렇게 없을 수가 있어요?”라고 빵 없는 우리집 사정을 동정했습니다. 그때의 불안(不安)이 다시 찾아온 것입니다. 순간 불안했지만 곧 꿈이려니 하는 초인지가 작동했고 이내 큰 안도감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잠깐이나마 꿈자리가 마냥 행복했습니다. 더 이상 부러울 것이 없다. 이 정도의 누리는 삶만으로도 내 인생은 대성공이다. 항상 기뻐하고 감사할 일이다. 그런 내면의 대화가 오고갔습니다. 그러자 마음은 잔잔한 호수처럼 맑고 고요해졌습니다. 꿈이려니 하면서도 마냥 행복했습니다.


저의 ‘빵 사랑’이 너무 세속적이지 않은가라는 의심이 듭니다. 명색이 식자(識者)라면서 너무 물질적인 것에 매달리는 것은 아닌가 라는 반성도 듭니다. 그래서 ‘빵’의 개념을 좀 더 확장해 보면 어떻겠는가라는 생각도 가끔 해봅니다. 마침 참고가 될 만한 글을 하나 찾았습니다.

“오늘날 육체는 더 이상 생소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알고 있다. 가슴 속에서 고동치는 것이 심장이고, 코는 허파에 산소를 공급하기 위해 육체에서 밖으로 돌출한 호스의 끝이라는 것을. 사람의 얼굴은 소화시키고, 보고 듣고 숨 쉬고 생각하는 육체의 모든 기능이 집결되어 있는 일종의 계기판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인간이 자기 육체에 붙어 있는 모든 것을 명명할 수 있게 된 이래 육체는 인간을 덜 불안케 한다. 또한 우리는 영혼이란 것이 회색빛 덩어리의 뇌 활동 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정신은 물질이 운동 중에 보여주는 어떤 존재 형식이거나 그림자와 같은 것이라는 것, 존경받기도 하고 비난받기도 하는 우리의 성격, 재능, 감각들조차도 운동하고 변화하는 물질의 상태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라는 말이 오래 기억되는 것도 역설적으로 인간에게는 ‘빵’이 전부이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다 살아보지 못해서 모르겠지만 어쨌든 (현재까지는) 저는 빵으로 사는 인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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