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립아트코리아 제공
클립아트코리아 제공

 

가볍다를 가엽다로 읽는다

허공에서 길 잃은 구름처럼 새처럼 가여운 것이 있을까, 하고

창을 열면
늦여름의 주름진 햇살이 고꾸라지듯 밀려든다 참 가엽게도

플라타너스의 바랜 옷자락을 붙들고 선 저 잎새는
어제보다 오늘 더 가엽고
초록의 실연을 훔쳐보던 사람들의 눈빛도 덩달아 가엽다

가여운 저녁의 발걸음으로
슈퍼에 가 수박을 한 덩이 산다
크고 단단한 그것을 껴안고 콘크리트 계단을 오르는 기분이란

조금도 가엽지 않은 것,
가엽다를 자꾸만 가볍다로 읽어야 한다

위층에서 걸어내려오는 너의 인사는 깃털 같다
내게서 황급히 멀어지는 네가
나는 가볍다


<감상> 시 창작은 사물을 가엽게 바라보는 데서 출발한다. 무겁고 딱딱한 사물을 가볍고 몰랑하게 만들어야 시적 순간을 만날 수 있다. 그러니 가볍다와 가엽다는 일맥상통의 결론에 도달한다. 길 잃은 새처럼, 주름진 햇살처럼, 마지막 잎새처럼 덩달아 가볍고 가여워진다. 그런데 실연의 아픔은 크고 단단한 수박처럼 조금도 가볍지 않다. 내 아픈 마음이 너무 무거워서 형식적인 네 인사가 아주 가볍게 느껴진다. 주름진 계단을 올라가는 내 발걸음은 무겁고, 황급히 멀어지는 너는 너무 가볍다. 견딜 수 없을 만큼 가벼운 나의 존재여!<시인 손창기>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