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립아트코리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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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 없이 한 계절 보낸 뒤
아들을 만나 초밥을 먹는다.
생선살로 싼 밥을 고추냉이와 간장에 찍어 먹는다.
매콤한 공기가 콧속을 흔들자
오래 묵은 눈물이 스며 나온다.
내가 갔던 독일은 너무 멀고
내가 머물다 떠난 너의 마음도 너무 멀고
내가 애써 지우려 한 사람까지의 거리도 너무 멀다.
밥알에는 적당한 온기와 물기가 섞여
끼리끼리 착 달라붙어 있다
입안에서 우물우물 잘게 흩어진다.
몸을 잃은 생선도 제 살점이 씹히는 걸 마냥 지켜보고 있다.
우리가 잠시 나눈 의례와 기록도
언젠가 이렇게 산산이 부서져 내릴 것이다.
이 시간은 엷어졌다 언제 또 무의식으로 떠오를지
모른다,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어느새 접시가 다 비고, 나는 나의 길로
아들은 아들의 길로
밥은 밥의 길로, 생선은 생선의 길로
각자 제 살 곳을 향해 말없이 흩어진다.
겨울 접히고 봄이 펼쳐진다.


<감상>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소원(疏遠)해야만 하는가. 내 아버지의 아버지 세대가 그러했고, 나와 아들의 관계도 그러한가. 오래 아들에게 머물렀던 내 마음은 서서히 떠나고, 일찌감치 떠난 아들의 마음은 너무 멀다. 하물며 사랑했던 사람을 애써 지우려 하지만, 그 거리는 이미 멀어져 있었다. 부자지간이라도 밥알처럼 잠시 온기가 합쳐질 수는 없는 것인가. 바쁘게 각자도생으로 흩어져야 하므로 의례적인 의무감과 기록도 곧 사라질 것이다. 자식을 떠난 보낸 부모의 자리에 먼 훗날, 자식이 그 자리에 그 모습대로 서 있지 말기를. 겨울 접히고 봄이 오듯 그렇게 우리네 인생도 돌고 도는 것인가. <시인 손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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