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김승옥 소설 「무진기행」(1964, 사상계)은 진정한 의미의 ‘최초의 근대소설’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우리 소설이 그만큼 한 개인 삶을 소름 끼칠 정도로 깊이 들여다본 것이 그때가 처음이라는 이야기겠지요. 「무진기행」하면 누구나 떠올리는 대목이 있습니다. 무진의 명물 안개 묘사 부분이 그것입니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빙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있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恨)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 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는 그것을 헤쳐 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김승옥 「무진기행」)


작가는 무진의 안개를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 놓은 입김’으로 묘사했습니다. 언제 봐도 맛깔스런 표현입니다. 그 부분에서 ‘전율’을 느꼈다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대다수의 소설 작법 책에서 이 부분을 잘된 묘사의 예시로 사용합니다. 일종의 배경적 요소에 불과한 것이 주제의 영역까지 침범한 예로 인용됩니다. 문제는 이 대목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 이 소설이 정작 강조하고 싶었던 진짜 ‘안개’의 비중과 가치가 훼손을 많이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진정한 ‘안개’의 얼굴은 남주인공 윤희중과 여주인공 하인숙의 ‘출구를 알 수 없는 비인간(非人間)의 인생행로’였습니다. 그 두 사람은 마치 우로보로스(자기 꼬리를 물고 있는 뱀)처럼 서로를 물고 있습니다. 윤희중에게 하인숙은 돌아보기 싫은 자신의 과거이고 하인숙에게는 윤희중이 간절히 기대하는 미래입니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시작도 끝도 없는 무간(無間)의 삶을 반복합니다.


...여자는 아까보다 좀 더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 오빠라고 부를 테니까 절 서울로 데려가 주시겠어요?” “서울에 가고 싶으신가요?” “네.” “무진이 싫은가요?” “미칠 것 같아요. 금방 미칠 것 같아요. 서울엔 제 대학동창들도 많고…. 아이, 서울로 가고 싶어 죽겠어요.” 여자는 잠깐 내 팔을 잡았다가 얼른 놓았다. 나는 갑자기 흥분되었다. 나는 이마를 찡그렸다. 찡그리고 찡그리고 또 찡그렸다. 그러자 흥분이 가셨다.(김승옥 「무진기행」)


소설의 두 주인공 윤희중과 하인숙은 서로 ‘절박함’을 공유하는 쌍둥이 인물입니다. 자신의 속물적 삶을 고통스럽게 투시(透視)하는 두 사람은 각자의 ‘출구’를 찾아 안갯속을 헤맵니다. 그들이 만나는 곳이 무진(霧津, 안개(갯)마을)인 것은 어쩌면 필연입니다. 하인숙은 세속 도시 서울로 가고자 하고 윤희중은 서울에서의 세속적 삶에 지쳐 옛날의 안개(무의식의 위로)를 찾습니다. 동거하던 여인을 떠나보내고 돈 많은 과부에게 장가든 제약회사 상무 윤희중과 무진을 탈출하기 위해 무슨 일이든 다 하겠다는 음악교사 하인숙의 앙상블이 우리 현대소설의 출발이라는 게 서글픕니다. 너무 생생해서 더 그렇습니다. 오늘도 무진에는 안개가 짙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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