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극원 대구대 법학부 교수·전 한국헌법학회장
정극원 대구대 법학부 교수·전 한국헌법학회장

멈춤이 없기에 굳이 잡으려 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이 시간인 것입니다.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가오는 것이기도 합니다. 다가오기에 희망도 꿈도 품는 것입니다. 시간은 강산을 변화시킵니다. 강은 물을 흘려보내지만 산과 들을 풍성하게 합니다. 산은 풍성하여진 숲을 통하여 또다시 강에 마르지 않는 물을 공급하는 것입니다.

흰 눈이 내려 산하를 덮습니다. 밤새 소리 없이 내린 눈입니다. 눈송이에는 작은 숨구멍이 있어 소리를 삼키기 때문에 눈이 내릴 때에는 세상의 소리가 다 빨려 들어가 적막이 됩니다. 눈이 빗방울처럼 소리를 내면서 내리면 너무 신이 난 아이들이 잠을 이루지 못할까 봐 배려를 하는 것입니다. 곤하게 잠을 자야 키가 크는 아이들을 그렇게 보살펴 주는 것입니다.

쌓인 눈 때문에 소나무가 휘청거립니다. 아이들이 막대기로 소나무를 툭툭 칩니다. 아이들의 장난기가 소나무의 눈을 털어내고 가벼움을 선사합니다. 쌓인 눈을 조금이라도 내려놓았으니 그만큼이나 가벼워진 것입니다. 눈이 내리는 날에는 누구라도 한 번 쯤은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얼마나 더 많은 눈이 내릴 것인지, 그렇게 예측하려고 습관처럼 올려다보는 것입니다. 올려다보게 하였으니 하늘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만든 눈입니다. 경청하는 것, 그것은 경외심과 통합니다. 쏟아내는 말을 들어준다 하여 고민이 다 풀리는 것은 아니지만 들어주는 누군가가 있어 후련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건드려서 소나무는 비록 조금의 눈만 내려놓는 것이지만 그것은 누군가가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어 가벼워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아이들과 눈은 서로 통합니다. 눈은 산과 강을 덮어서 천지를 하얗게 만듭니다. 흰 세상이니 탁함이 없어진 것입니다. 아이들이 눈을 좋아하는 이유는 하얀 눈과 같이 아직 탁함을 모르는 천성 때문입니다. 설사 잃는 것이 있고 또 용기가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대의가 먼저인 세상이 되어야 하는데, 당장 눈앞의 얕은 이익에 더 치중하는 세상이 되고 있습니다. 나의 것은 조그마한 것도 내려놓지 못하면서 상대의 것은 빼앗아 와서라도 더 가지려고 아등바등 다투는 세상이 되고 있습니다. 곳곳에 만연하고 있는 분열과 갈등은 그렇게 출발하는 것입니다. 주먹을 움켜쥐면 물이 다 세어나가게 됩니다. 손을 펴놓으면 물은 세어나가지 않고 머물게 됩니다. 얕음을 움켜쥐려다 나중에 얻을 더 큰 결실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순수함은 만능열쇠입니다. 순수함으로 임하면 세상의 모든 난제들도 쉽게 풀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얕은 이익을 얻기 위하여 누군가를 속이는 것도 서슴지 않은 세상입니다. 몰라서 속는 것도 있겠지만 알고서도 그냥 넘어가 주는 것입니다. 얕음에 취하면 나중에 큰일을 도모할 때에 고립무원을 만듭니다. 순수함을 쌓아서 얻게 되는 평판은 나중에 더 큰 일을 이루게 하는 천군만마가 되는 것입니다. 마치 덮고 있는 구름이 물러나면 밝게 빛을 밝히는 달빛처럼 순수성은 언제라도 그 가치가 빛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혹한의 남극이라면 모를까 녹지 않는 눈은 없는 것입니다. 지나가지 않는 세상사의 난관은 없는 것입니다. 녹아 없어지는 눈처럼 세상의 그 어떤 역경도 다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하니 얕음을 내세워 무엇인가 얻을 생각은 갖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살면서 혹여 힘겨운 것이 가로막는다 하여도, 행여 고립무원의 혼자인 듯 외롭다 하여도 눈 내린 날의 설렘으로 폴짝폴짝 뛰던 어린 동심으로 돌아가면 답이 있습니다. 흰 눈이 소복하게 쌓인 하얀 바탕에는 그 어떤 희망도 꿈도 다 그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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