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태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원태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1888년 6월, 29세의 나이로 독일제국의 황제 자리에 오른 빌헬름 2세(Wilhelm II)가 가장 망신스럽게 여긴 것은 다름 아닌 대제국의 부재(不在)였다. 빌헬름의 외조모였던 영국의 빅토리아(Victoria) 여왕은 전 지구 육지 면적의 4분의 1에 4억 명의 신민(臣民)이 사는 최강의 제국을 통치하였으나, 빌헬름의 독일의 경우에는 식민지 확충보다 국가의 안보 확보에 더 관심이 많았던 재상 비스마르크(von Bismarck)의 정책으로 인해 그렇다 할만한 제국을 보유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나라인 영국을 크게 동경하면서도 뛰어넘고자 했던 욕구가 강했던 빌헬름은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비스마르크를 해임하고 본격적인 해군 증강에 돌입하였다. 빌헬름은 또한 독일제국의 힘을 과시하고자 1905년 3월, 프랑스의 영향권이었던 모로코의 탕헤르를 방문하여 술탄의 주권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는 등 도발적이고 위협적인 외교행보도 서슴지 않았다.

기존의 국제체제를 향해 독일이 명백한 도전장을 내밀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영국의 자유당 정부 내에는 이러한 독일의 움직임을 애써 외면하려는 세력이 존재하였다. 우선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프랑스보다는 독일이 영국의 ‘자연스러운 동맹세력’이 아니냐는 관념이 아직도 많은 영국인들의 뇌리에 강하게 박혀 있었다. 또한 전쟁이야말로 국가가 개인에 대한 통제를 극대화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이라는 점에서, 다른 정부도 아닌 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우선시한다는 기치를 내세운 자유당 정부가 전쟁을 수행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원칙론자들이 내각에 대거 포진해있었다. 이에 독일과의 전쟁 가능성을 검토해야 한다고 생각한 소수의 국무위원들은 이를 감히 대놓고 공론화할 엄두를 내지 못했고, 영국군 수뇌부와 프랑스군 수뇌부가 의회와 내각에 공식 통보하지 않은 채 극비리에 회동하여 잠재적 군사계획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수준의 사전 준비만이 허락되었다.

이렇듯 국가적 초위기가 코앞에 닥쳤음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계속 미적거리기만 하는 행태에 당시 외무부 서유럽과장이었던 에어 크로우(Eyre Crowe)는 크게 분노하였다. 무책임한 정치인들의 결단을 손놓고 기다릴 수만은 없다고 판단한 크로우는 1907년에 ‘영국과 프랑스 및 독일 간의 관계에 대한 외교보고서’를 작성하여 외무장관이었던 그레이(Edward Grey)에게 제출하였다. 이 보고서에서 크로우는 독일이 영제국을 무너뜨리고 유럽 대륙을 제패(制?)하겠다는 외교적 목표를 세웠기에 독일과의 전쟁은 피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이에 독일과 동맹관계 또는 신뢰관계를 구축하려고 해서는 안 되고, 프랑스와의 관계를 포기해서도 안 되며, 영국은 자국의 이해관계를 단호하게 방어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대독(對獨) 정책 수립을 두고 갈등하던 그레이는 크로우의 보고서에 깊은 인상을 받아 이를 내각에 올렸고, 이로 인해 결국 자유당 수뇌부가 독일에 대한 견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굳히면서 제1차 세계 대전 승리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훗날 영국 총리 스탠리 볼드윈(Stanley Baldwin)은 크로우를 ‘가장 뛰어났던 국민의 종복’이라고 칭송하였다.

우리의 정치인들은 소위 ‘영혼 없는’ 공무원들의 절대복종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 헌법이 공무원들의 신분을 보장하고 그들의 정치적 중립을 요구하는 이유가 결국 그들이 섬겨야 하는 진정한 대상이 정치인들의 이해관계가 아닌 바로 국민의 권익(權益)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지지율이라는 바람에 휘날리는 갈대와 같은 정치인들과 달리, 공무원들은 긴 안목과 넓은 시각으로 국가의 앞날을 바라보고 용기 있게 할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대한민국의 모든 공무원들이 국가의 운명이 자신들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명감으로 크로우와 같은 ‘뛰어난 국민의 종복’이 되어주기를 진심으로 당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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