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식 포항지역위원회 위원·시인
이상식 포항지역위원회 위원·시인

소와 예술,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느릿한 덩치와 날렵한 상상력, 야성미와 절제미, 우유부단과 재기발랄의 부조화 탓이다. 한데 의외로 예능 속의 우공은 멋진 소재로 인상적 활약을 펼친다. 심지어 난국에 처한 국가를 구하는 제물이자 인생 역전의 종잣돈이 되기도 한다.

사마천의 ‘사기’엔 현고호사 얘기가 나온다. 약소국 정나라 상인인 현고가 소 열두 마리로 조국을 구했다는 고사성어. 또한 한국 기업사 거인인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도 소를 팔은 돈을 들고 야반도주해 성공을 일궜다. 우리 정치사 감동적 장면의 하나로 그의 소떼 방북을 꼽는다. 1998년 서산 농장에서 사육한 소 500마리를 끌고 판문점을 넘는 차량 행렬은 장관이었다.

소가 최고의 대접을 받는 곳은 인도와 이집트가 아닌가 싶다. 언젠가 인도의 유명 배우가 팬들에게 영상을 올렸다. 신작 영화 포스터에 우유를 뿌려 달라는 간청. 이는 힌두교 의식에서 유래한 것으로 우유는 정화의 힘을 갖는 신성한 음료로 여긴다. 물론 이를 생산하는 소도 존엄한 존재다.

고대 이집트 신화에서 ‘바트’는 암소 여신으로 종교적 역할을 수행한다. 그녀는 암소의 귀와 뿔이 달린 여성의 얼굴로 그려진다. 이집트 왕을 칭찬할 경우 ‘그의 어머니의 황소’라는 존칭을 썼다. 요컨대 암소는 파라오의 창조주로 불렸다.

영웅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애마는 ‘부케팔로스’이다. ‘소의 머리’라는 의미라고 한다. 말을 소에 비유해 이름을 짓다니 의외다. 짐작컨대 거침없는 황소의 저돌성에 경외감을 갖지 않았을까. 대전투 와중에 녀석을 잃은 정복자는 격전지에 ‘부케팔리아’라는 도시를 건설해 추모했다.

소를 묘사한 선사 시대 그림으로 알타미라 동굴 벽화가 유명하다. 발굴 현장에 있던 땅 주인의 아홉 살짜리 딸이 발견했다. 19세기 위대한 고고학 성취를 이룬 역사적 순간, 동혈 안에서 소녀가 외친 소리는 “토로스! 토로스!”였다. 황소란 뜻이다.

이문열의 중편 소설 ‘들소’는 알타미라 벽화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신석기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가의 좌절과 영광을 그린다. ‘소에 짓밟힌 자’라는 별명을 가진 주인공이 위험한 사냥 대신 창에 무늬를 새기는 일을 하다가, 굴속에 벽화를 남기고 죽는다는 내용.

소의 이미지는 기업들 브랜드로 활용된다. 연전에 황소를 상표로 쓰는 업체들 간에 소송도 벌였다. 세계적 자동차 레이싱업체 ‘레드불’이 유사한 상징을 사용하는 국내 기업인 ‘불스원’과의 상표권 분쟁에서 승소한 사례가 있다. 양쪽 모두 근육질 붉은 황소가 도약하는 형상을 가졌다.

소는 다양한 심상으로 다가온다. 삼국지연의는 ‘태뢰의 소’라는 일화로 인간의 어리석음을 경계하고, 영화 ‘워낭소리’는 팔순 노인과 늙은 소의 우정을 보여준다. 구미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의 ‘우차 금동상’ 복제품이 새마을 정신을 일깨우듯 말이다.

지난해 EBS ‘한국기행’은 소를 키우는 농장을 낭만적으로 소개했다. 가축을 위한 노고를 미화했다고나 할까. 진짜 주목적은 그들의 고기다. 나는 안다. 소를 출하할 때는 주인의 눈물 젖은 아픔이 어렸다.

누구나 저만의 바둑이 있다는 ‘미생’의 명대사처럼 각자의 가슴에 소를 키운다. 그것이 정주영의 밑천이 될지는 스스로에 달렸다. 휘트먼의 ‘나 자신의 노래’나 김종삼의 ‘묵화’는 소를 예찬한다. 여러분은 새해에 어떤 소를 키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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