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화철 한동대 교수
손화철 한동대 교수

우리나라 사법부와 검찰의 힘은 늘 정치권력의 부침과 반비례했다. 그 치졸함이야 언제나 비판의 대상이었지만 정치권력 역시 불신을 받기는 마찬가지여서 그 힘은 든든히 유지되어 왔다. 지금 진행되는 두 기관에 대한 개혁 시도가 격렬한 저항을 받아 충분한 성과를 내지 못하는 것도 결국 개혁의 표면적 주체인 정치권과 객체인 사법부 및 검찰에 대한 불신이 묘한 균형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민의 역량이 올라가면서 부당한 기득권이 약해지는 것은 필연적인 과정이다. 특히 개혁 대상의 실체가 드러나면 변화는 반드시 오게 되어 있다. 군주도 똑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국민이 자각했을 때 민주주의가 도래했다. 종교개혁도 교황이 하나님 앞에 선 일개 죄인이라는 깨달음에서 비롯되었다. 검찰과 사법부의 개혁 역시 단순히 특정한 법의 제정이나 개정으로만 되는 것은 아니다. 검사와 판사에게 덧씌워진 과도한 기대와 그들에 대한 경외, 그리고 그들 스스로 가지고 있던 왜곡된 자의식이 무너지는 것이 그 개혁의 핵심이다.

개인적으로 어떤 검사가 쓴 에세이집을 원작으로 만들었다는 한 드라마를 시청한 후 검찰개혁의 필요를 실감했다. 이른바 ‘생활형 검사’의 일상을 사실적으로 다루었다는 그 드라마는 검사를 영웅이나 악당으로 만들지 않아 신선했다. 하지만 그 일상의 모습을 그리는 가운데 민주 시민의 상식에 반하는 퇴행적인 행태들이 그대로 노출되었다. 회의 시간에 연수원 기수를 따져 앉을 자리를 정하고 근무 중에도 선후배 사이를 강조하며 예사로 반말을 하는 것에 놀랐고, 그 와중에 서로를 ‘프로’라 칭하는 유치함이 민망했다. 예우와 아부가 뒤섞이고 시기 질투가 난무하는 것이야 그렇다 해도 판사와 검사가 밤중에 술을 마시다 자신들의 ‘부하’들을 불러 누가 더 빨리 오는지 내기를 하는 데에 이르러서는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소간의 극적 과장이 있었음을 감안해야 할 테지만, 이 드라마를 보고 나니 최근 검찰이나 검사 출신 국회의원의 언행을 이해하게 된다는 게 문제다.

고법 부장판사의 탄핵을 둘러싸고 고위 법관들이 연출한 장면들은 방송도 못할 저질 드라마다. 대법관은 탄핵 사유가 있으니 판사의 사표를 받을 수 없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대신 국회를 핑계하고, 판사는 그 대화를 녹음하여 공개했다. 법관들은 카톡방에 모여 거두절미 “법관을 지키지 못했다”며 대법원장을 비난하는데, 그게 또 언론에 보도된다. 이 모든 논란에서 해당 판사가 남의 재판에 개입하여 판결문을 고친 사실은 제대로 언급되지 않았다. 더구나 재판 개입은 판사의 권한 밖의 일이므로 직권남용이 아니어서 무죄라는, 일반인에게 해괴한 판결에 대한 논의는 깔끔하게 생략되었다.

판사의 탄핵, 공수처 설립, 검사의 수사권 박탈 시도가 사법부와 검찰을 얼마나 바꿀지는 두고 볼 일이다. 그러나 현실 같은 드라마와 드라마 같은 현실 덕분에 사법부와 검찰의 진짜 개혁은 이미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판사와 검사가 특별히 정의롭거나 영민한 이들이 아니라 오래 지속된 호의를 권리로 착각한 낡고도 평범한 이익집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모두 실감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들이 후진적이고 유치한 행패를 부리면서도 부끄러워할 줄 몰랐던 것은 그들이 악해서가 아니라 적절한 감시 대신 지나친 대접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의 평범함을 알게 된 이상, 그 부족함을 한탄하고 비난할 것이 아니라 부적절한 집단의식을 용인하거나 부러워하기를 멈추어야 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시민이 법 앞에 평등하며 권력의 사용이 자기 역할인 자는 거기 상응하는 견제를 받는다. 이 원칙에 모두가 충실해진다면, 잠시 엇나갔던 판사와 검사도 고쳐 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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