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평생 검도를 배우고 가르치면서 변함없이 재미있게 여기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사용하는 기술이 수백 개가 넘는데 개별 기술이나 몇 개의 기술을 묶어서 부르는 검법 이름이 아예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옛 기록이나 무협지에서 흔히 만나는 **검법, **보전, **대법, **세법 같은 것은 물론, 『무예도보통지』에 수록된 본국검법의 제 동작 이름인 맹호은림(猛虎隱林·호랑이가 숲에 몸을 숨기듯 칼 뒤에 몸을 숨김), 백원출동(白猿出洞·흰원숭이가 동굴에서 뛰쳐나오듯 날랜 동작과 기세로 상대를 찌름), 장교분수(長蛟噴水·이무기가 물을 뿜듯 크게 칼을 들어 내려침), 발초심사(發艸尋蛇·풀을 쳐서 뱀을 찾듯 빠르게 상대의 허리를 벰), 표두압정(豹頭壓頂·달려 드는 표범의 머리를 내리찍듯 상대의 머리를 누름) 같은 그럴듯한 기술 명칭도 없습니다. 그저 머리치기에는 뛰어들어가는 머리치기, 상대의 머리치기를 받아서(스쳐 올려서) 치는 머리치기, 상대의 공격을 막고(공격이 끝나기를 기다려) 뒤로 물러나면서 치는 머리치기가 있다는 정도로 설명합니다. 그 안에서 수도 없이 가지를 치는 구체적인 기술의 경지는 각자가 실행을 통해서 하나하나 쌓아나가기를 권합니다. 이름을 외우고 그 이름이 환기하는 동작의 기세와 목표를 새기는 것도 좋지만 그 것보다는 기술의 발현에 필요한 여러 가지 몸동작들을 충분히 익히는 게 선결과제라는 취지인 것 같습니다. 역설적인 이해도 가능합니다. 원래 오래된 기름집에 쓸 만한 됫박이 없고, 소문난 대장간에는 좋은 칼 없는 법입니다. 검법이라는 말 대신 기술(技術)이라는 말을 주로 쓰면서 “기술이 좋다”, “실기 능력이 뛰어나다”, “눈이 좋고 칼이 빠르고 정확하다”와 같은 표현을 즐겨 쓰는 게, 제가 보기에는, 실용을 앞세우고 허례허식을 배척하는 ‘배우는 사람들’의 소직(素直)한 마음가짐을 잘 드러내는 어법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며칠 전, 페이스북(심상협)에서 좋은 포스팅을 만났습니다. 늘 배우며 살아가는 삶의 지혜를 터득하는 게 중요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우리는 나쁜 사건을 기억하는 대신 나쁜 사건을 통해 배워야 합니다. 나쁜 사건들을 기억하는 것은 그 사건이 준 슬픔과 공포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만들 뿐이에요. 우리는 왜 그런 사건들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지 생각해보고 다시는 똑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사건을 일으킨 조건들을 하나씩 바꿔가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는 슬픔과 공포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으니까요.” (니체. ‘내 친구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에서)


근자에 들은 말 중에 가장 가슴에 와 닿는 말이었습니다. 아마 그 전날 밤 갑자기 떠오른 과거의 나쁜 기억 때문에 밤잠을 설친 경험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영문도 모르고 태어납니다.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관계없이 삶을 부여받습니다. 그래서인지 인생을 방기(放棄)해도, 도덕을 무시해도, 타인의 고통을 무시해도,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간혹 있습니다. 선과 악은 그저 상대적 가치일 뿐이라고 그들은 여깁니다. 그러나 그런 태도는 나약하고 나태한 자들의 자기합리화입니다. 내 뜻이든 아니든, 기적처럼 주어진 인생을 최선의 노력으로 아름답게 가꾸어나가는 것이 ‘멋모르고’ 태어난 자들의 삶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일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최우선적인 생의 의무라는 것을 우리는 본능적으로 압니다. 그렇기에 니체가 말한 것처럼 나쁜 사건을 통해 배워나간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거기서부터 출발해 슬픔과 공포와 원망과 증오에 머물지 않고 나의 삶을 아름답게 할 ‘생의 자유’를 하나씩 우리는 획득합니다. 그렇게 한 걸음씩 나아가다 보면 분명히, 언젠가는, 내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도 알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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