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극원 대구대학교 법학부 교수·전 한국헌법학회 회장
정극원 대구대학교 법학부 교수·전 한국헌법학회 회장

예행연습처럼 봄은 오는 것인가 봅니다. 실전처럼 온다면 매 순간이 긴장이고 떨림이 되어 힘들 것입니다. 기다림을 아는 듯, 모르는 듯 머뭇거림을 물리치고서 그렇게 봄이 당도하였습니다. 해마다의 반복이겠지만 해마다 다른 모습으로 찾아오는 봄인가 봅니다. 촉촉하게 비가 내릴 것이고 복병처럼 숨어있는 추위도 떠나보낼 것입니다. 같은 크기의 차가움이라도 해빙이 시작된 들판에 부는 바람은 이미 그 차가움을 잃었습니다.

물가의 버들강아지가 추위에 아랑곳 않고 여린 움을 내밀었습니다. 태생적으로 추위를 이길 수 있도록 보드라운 털을 감싸고서 첫 세상을 두리번거립니다. 살필 것이 많은지 가녀린 바람에도 흔들리며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는 것입니다. 얼음이 녹아 찬기가 더하여진 개울의 물이 졸졸 요란하게 소리를 내는 것은 냉기를 조심하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입니다. 그 물소리에 깨어난 버들강아지입니다. 소리는 생명을 각성하게 하는 촉매제가 됩니다. 소리가 있습니다. 아기 울음소리, 다듬이 소리, 책 읽는 소리입니다. 옛 부터 한 가정에서 울려 퍼지는 이 세 가지의 소리로 국가의 미래를 가늠하였던 것입니다. 국가의 비전이 소리에 달려 있었습니다. 아기 울음이 요란하여야 대를 이어갈 가정의 미래가 있는 것이고, 다듬이 소리가 우렁차야 집안의 경제가 살아있는 것이고, 책 읽는 소리가 중단이 없어야 국가의 발전이 있었던 것입니다.

응달에는 겨우내 언 얼음장의 두께가 그대로입니다. 마치 동파방지를 위하여 틀어놓은 수도꼭지처럼 졸졸 흐름이 있는 곳에는 얼음이 얼지 못합니다. 물은 흐를 때에는 작은 부피이다가 얼어서 얼음이 되었을 때에는 그 부피를 팽창시키는 것입니다. 무슨 비밀이 숨어 있는 것인가 봅니다. 얼게 하여 위세를 부려 보는 것인지, 부피를 키워서 거친 반항을 하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순순히 흐르다가 그 참에 한번 반항을 하여 보려고 그러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기다렸기에 물러가는 추위인 것인지, 피어 내는 버들강아지의 움이 있어 추위가 기죽은 것인지, 아니면 두 개의 의미가 합하여져 따스함이 오는 것인지, 추위는 또 따스함에 자리를 인계하고 마는 것입니다. 시간이 무르익었으니 더는 참지 못한 꽃들이 다투어 피어날 것입니다.

영원히 머물러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추위가 그렇고, 사람의 권력이 그렇고, 사람의 부가 그런 것입니다. 모든 것은 잠시 머물렀다가 지나가고 마는 것입니다. 섭리인 것입니다. 그러할진대, 가지지 못하여 안달할 필요도 없는 것이고, 가졌다고 하여 으스대면서 뻐길 이유는 하등 없는 것입니다. 삶에서 가지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고,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그것은 원래부터 없었던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본성이 그러하니 혹 가지고 있다고 하여 오래 머물러 있지도 않을 것이고, 행여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여 늘 비어 있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산다는 것은 얻었으니 끝맺음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얻은 그 무엇이 있다면 되갚아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고마운 것이라면 태어남 그 자체만으로도 귀한 것입니다. 오늘 어딘가를 향하여 걸어갈 수 있다면 걷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어떤 일을 할 수 있다면 일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곳에는 일인성의 의미뿐만 아니라 더불어 사는 다른 누군가가 보탠 타인성의 의미가 덧붙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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